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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 골든컵 금메달 김인창 경기모습(좌측)

 

[조영섭의 복싱스토리] 청명한 가을이 무르익은 9월이다. 오늘 스포츠산책 주인공은 현재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 에서 13년째 <덕현복싱 체육관>을 운영하는 80년대를 전후해 한시대를 풍미했던 김인창 관장이다. 

현역시절 넓은 시야와 빠른 스피드를 겸비 <미스터 컴퓨터>라 불릴 정도로 정교한 복싱을 구사하는 테크니션이었던 김인창은 57년 10월22일 강원도 화천출신이다. 화천은 방송인 노사연 길은정 가수 나비소녀가 태어난 고장으로 선천적으로 운동신경과 심폐지구력이 뛰어난 김인창은 73년 서울로 복싱 유학을 떠나 이창길이 간판복서로 활약하는 동근체육관에서 이광우 사범의 지도로 복싱을 수학한다 이후 2개월후 김인창은 이광우 사범과 <경흥 체육관>으로 이적, 그곳에서 그의 복싱이 꽃을 피우는 서막의 장이 펼쳐진다.

경흥체육관 듀오 황철순과 김인창

 

경흥체육관은 3체급 국내챔피언 최만성 과 박종팔을 KO로 잡은 슬러거 강흥원 염동균 김득구와 무승부를 기록한 최영철과 김종표. 모스크바 올림픽 대표인 황철순 장흥민등 걸출한 복서들이 윤창수 관장의 지도로 배출된 사설 명문체육관이었다. 이곳에서 74년 서울 신인대회 B급에서 우승을 차지하고 그해 입학한 한영고는 1년 선배인 복싱의 박찬희가 그해 테헤란 아시안게임 <LF급>에서 금메달을 획득,  한영고 동기생인 씨름의 이준희가 후일 필자와 대담에서 박찬희를 선망의 대상으로 삼았다고 회고할 정도로 스타덤 에 올라설 때였다. 김인창은  55회 전국체육 대회 (대구)에 페더급에 서울 대표에 선발되었지만 김창석(육군)에게 2회 RSC 당하는등 복싱에 눈을 뜨지 못한채 별다른 성적을 창출하지 못했다. 그의 잠재력이 활화산처럼 터진 것은 졸업반인 76년도였다 그해 학생선수권을 비롯해 대통령배를 석권하며 비로소 이름 석자를 알린다.

1978년 방콕 아시안 게임 라이트 웰터급 금메달 김인창

 

그해 전국체전과 전국선수권대회 L급 결승에서 김인창은 76년 몬트리올 올림픽 Fe급 에서 8강까지 진출한 최충일 에게 두차례 경기에서 주도권을 잡고 우세한 경기를 펼쳤지만 모두 4ㅡ1로 패하며 피눈물을 쏟으며 내려온다. 하지만 파도는 장애를 만날수록 더욱더 거세지듯이 그는 점점 강해져간다. 모든 것을 잃었다해도 희망만 남아있다면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할 수 있다. 희망은 항상 출발이자 영원한 시작이기 때문이다. 그런 김인창은 77년 한국체대에 진학한다. 한국체대는 76년 12월26일 통수권자인 박정희 대통령이 전년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레슬링의 양정모의 금메달에 탄력을 받아 이뤄진 체육회 인사들과 청와대에서 개최된  간담회에서 나온 건의안을 받아들여 속전속결로 설립한 대학이다.

 

역설적으로 이야기 하면 양정모의 금메달이 없었다면 한국체대의 설립도 없었다. 복싱에도 김연아 박태환 같은 걸출한 슈퍼스타 복서가 탄생해야 하는 까닭도 바로 이 때문이다. 사업에도 계획서가 필요하듯이 무슨 일이든지 기획하고 추진하려면 내세울 만한 명분이 필요한 법이다. 대학에 진학하면서 LW급에서 김인창은 전국선수권대회에서 최충일을 잡은 박남철에 완봉승을 거두면서 주목을 받은데 이어 78년도 방콕아시안게임 최종결승에서 킹스컵 대표 출신의 난적 유흥석 <수원복싱> 의 저돌적인 파이팅을 섬광<閃光>처럼 터지는 카운터로 제압하며 선수촌에 입촌한 김인창은 이후 <불암산 적토마> 불릴 정도로 탄탄한 피지컬과 용광로처럼 들끓는 열정이 결합되어 일취월장 기량이 상승한다. 축구선수 <호나우두>의 명언이 생각난다 나의 장점은 드리볼 스피도가 아닌 축구에 대한 열정이다.  

 

결국 김인창은 본선 LW급에서 북한의 김동훈을 잡고 금메달을 획득한다. 복싱에선 72년도 뮌헨 올림픽 첫 남북대결 에서 이석운이 북한의 김우길에게 패했고 김우길은 LF급 에서 은메달을 획득하였다. 당시 북한은 사격 소구경복사 에서 이호준이 금메달을 획득했을 때 우승소감을 묻는 기자들 질문에 <타켓> 을 원수의 가슴으로 생각하고 사격하라는 교시를 따라했더니 우승했다고 소감을 밝혀 당시 큰 파문을 일으켰다. 이런 경색된 분위기 속에 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 결승에 7명이 올라가 라이트급 김태호등  5체급에서 금메달을 획득했지만 F급 의 황철순과 LW급의 박태식은 하필이면 북한의 구영조와 노용수에게 각각 패해 체면을 구겼다. 76년 몬트리올 에서는 북한은 B급의 구영조가 금메달을 LF급의 이병옥이 은메달을 획득하며 기세 등등 했지만 안타깝게도 한국복싱은 72년 뮌헨 대회에 이어 76년 몬트리올 대회까지 복싱에서 노메달의 수모를 당했다.

방콕 아시안게임 금메달 황철순 최충일 김인창 황충재 박일천(좌측부터)

 

78년 방콕아시안 게임에서도 한국은 LF급의 홍진호가 북한의 이병옥에게 3ㅡ2로 패하자 당시 대표팀 강준호감독이 링에올라가 캔버스에 드러누으며 격렬하게 항의했고 F급의 오인석선수가 북한의 김윤철 에게 판정으로 패하자 링위에서 기쁨의 세레모니를 펼치며 환호하던 북한의 장웅IOC 위원이 내려 오자  당시 조철제 전무가 득달같이 달려가 북한의 장웅 위원의 뺨을 후려갈겨 몸싸움 일보 직전까지 갔던 헤프닝이 발생했다. 여담이지만 북한의 김윤철을 잡고 플라이급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선수가 일본의 이시이 고키다. 이시이 고키는 77년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도 한국의 박인태를 꺽고 우승한 선수였는데 프로에 돌아 WBC. SF급  타이틀을 넘보다가 82년 2월 10일 챔피언 김철호의 4차방어 상대로  8회 47초 KO패 당한 바로 그 복서이다.

 

김인창의 복싱은 적어도 동양권에선 <언터쳐블> 이었다. 79년과 80년 대통령배를 2연패에 성공하면서 LW급 에서 국내를 평정한 김인창은 당시 AIBA 세계랭킹 7위에 치솟았다 하지만 79년 10월 제1회 뉴욕 월드컵대회에 출전했지만 미국선수에게 복싱을 시작한이래 그렇게 일방적으로 얻어맞은적이 없다는 말을 토해 낼 정도로 난타당한 끝에 패한다. 하늘 높은줄만 알았지 땅넓은줄 몰랐던 그는 중대한 결심을 한다.

세계무대에선 본인의 주종목인 LW급 에선 승산이 없음을 자각하고 한체급을 내려 올림픽을 겨냥한다 평소 68Kg나가는 체중에서 L급 체급까지 무려 8kg을 더 감량 해야하는 고통속에서도 끊임없이 그는 분출되는 창조의 에너지를 발산  마지막 한방울 까지 남김없이 소진하며 임한 80년 모스크바 올림픽 선발전에서 김동길<전남체고>과 맞대결 두차례 판정승하며 승선에 성공한다. 김동길은 곽동성<원광대> 에게 패한이후 처음으로 패배의 쓴잔을 든 것이다. 당시 김인창 은 수도승처럼 올림픽 금메달에 몰입하며 무념무상 <無念無想>의 경지에서 오직 올림픽 금메달 획득에 몰입한다.

김인창이 아시안게임에서 북한의 김동훈을 다운시키며 판정승을 거둔다

 

마치 얼마전 타계한 롯데 창업주 신격호 회장이 60년대 초반 일본생활 20년만에 귀국했을 때 부친을 만나는 자리에 통역을 대동하고 왔을 정도로 모국어를 완전히 잊어버린체 일본생활에 철저히 녹아들면서 사업에 몰입, <롯데그룹> 창업의 서문을 열었듯이 김인창도 그런 무아<無我>의 경지에서 굳은 신념을 세운것이다. 신념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 신념이 역사를 한걸음 나가게 하는 무한한 힘을 갖고 있다.하지만 80년 모스크바 올림픽은 동서냉전으로 무산된다.

그해 9월 김인창은 케냐 골든컵에 출전한다 올림픽 보이코트 로 서방 75개국이 모여 대체올림픽이 열린 것이다 김인창은 1회전에서 미국의 조맨리 선수와 맞대결 2회전에서 카운터 보디블루를 때리자 상대는 총맞은 노루처럼 푹 고꾸라지며 RSC승을 거둔다. 8강에서 서독대표에 2회 KO승 .준결에선 필리핀의 아도요에 판정승을. 결승에선 케냐 최우수복서인 페트릭 와웨루 에 판정승을 거두고 7명이 출전한 대표팀에 유일한 금메달을 앉겼다. 그해 11월 LA 시장배에서 L급에서 김인창은 캐나다선수를 꺽고 금메달을 획득했는데 골든컵 대회보다도 수준높은 대회였다고 회고했다.. 81년 2월 김인창은 80년도 대한체육회 최우수선수 로 선정된다 56년 멜버른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획득한 송순천옹에 이은 2번째 복싱인이 수상한 체육회 대상이다. 이후 김인창은 그를 눈여겨본 삼우트레이딩 <유병언 회장>에 의해 스카웃되어 당시 천 오백만원의 계약금을 받고 81년 9월16일 프로에 대뷔한다.

두꺼비 체육관의 장규철 관장의 지도로 4연승<2KO>을 거뒀지만 아뿔사 아시안게임 금메달 로 병역 혜택을 받았지만 프로에 진출함 으로써 자격이 소멸되어 <징집영장>이 날라온 것이다 차선책으로 수경사로 입대 할수도 있었지만 26살의 늦은나이로 입대하면 후배들과 불편함을 염려한 끝에 내린 결론은 마치 부나비가 스스로 불속에 몸을 던져 산화하듯이 다음 경기에서 자폭<自爆>을 결심한다.

82년 7월 김인창은 세이다르<일본> 와 5차전에서 깔끔하게 정리한후 10년간의 복서생활을 접고 일반 병으로 현역입대 한다. 재대후 프로스펙스에 근무하며 복싱발전에 지대한 공헌을한 김인창은 현재  최문순 화천군수와 지역체육발전을 위한 프로젝트를 설계하고 한국체대 안용규 총장과 연결고리를 형성 밑그림이 그려지면 낙향할 계획 이다. 인생의 고락을 함께하는 기쁨회 회원들인 조용래 박태국 김영연 김종대 이재훈등 복싱인들 과 돈독한 유대관계를 형성하면서 인생3막을 시작하는 김인창의 앞길에 서광이 비추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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