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프 레나르트, 요하네스 슈타르크, 나치 독일 협력한 민족주의 과학자
'도이치 물리학'으로 상대성 이론, 양자역학 탄압, 핵무기 개발 실패 기여

출처: 픽사베이, 아우슈비츠 수용소

[문화뉴스 MHN 권성준기자] 역사에는 종종 그릇된 가치관을 가진 과학자들이 존재하였다. 잘못된 신념을 가진 과학자는 대량 학살 무기를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에 다른 어떤 직종의 사람보다 위험한데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 1918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한 독일의 화학자 프리츠 하버(Fritz Haber, 1868~1934)를 꼽는다.

하버는 최초로 질소를 정제한 화학자로서 유명하다. 질소의 정제는 질소 비료를 만들어 인공적으로 비옥한 토양을 만들 수 있게 해주었고 이는 인류의 오랜 고민이었던 식량 문제를 해결하는 데 가장 큰 기여를 하였다. 실제로 하버의 업적은 현대 인류 문명을 있게 해준 일등공신 중 하나라고 여겨진다.

하지만 인류를 굶주림에서 구원한 하버는 또 다른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하버가 인류 최초로 독가스를 개발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역사는 그를 두고 '화학 무기의 아버지'라고 표현한다.

1차 세계대전 당시 그는 조국의 승리를 위해 여러 독가스 무기를 개발하였다. 하버의 이런 행적에 그의 부인은 견디지 못하고 자살까지 선택하였지만 하버는 뜻을 굽히지 않았었다. 심지어 그가 개발한 독가스는 이후 2차 세계대전에서 나치가 유대인을 학살하는데 사용하였던 것으로 유명하다.

출처: 노벨 재단, 필리프 레나르트

물리학의 역사에서도 하버와 같이 잘못된 사상을 가진 과학자는 존재하였다. 그중 한 명은 음극선의 연구 업적으로 1905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필르프 레나르트(Philipp Lenard, 1862~1947)가 있다.

음극선의 연구는 이후 전자의 발견으로 이어지는 만큼 과학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연구였다. 그뿐만 아니라 레나르트는 광전효과에 대한 연구로도 유명하며 아인슈타인은 그의 광전효과에 대한 발견을 통해 노벨상을 수상하였다.

하지만 그는 나치에 협력하여 인종 차별주의, 반유대주의 성향을 가진 도이치 물리학을 제창하였다. 도이치 물리학에서 레나르트와 함께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던 물리학자로는 요하네스 슈타르크(Johannes Stark, 1874~1957)가 있다.

출처: 노벨 재단, 요하네스 슈타르크

슈타르크는 그의 이름을 딴 '슈타르크 효과'를 발견한 것으로 알려졌다. 슈타르크 효과는 원자의 방출 스펙트럼이 외부 전기장에 의해 여러 갈래로 쪼개질 수 있는 효과를 의미하며 이 공로를 인정받아 1919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였다.

레나르트와 슈타르크의 민족주의적인 움직임은 1차 세계대전 무렵부터 시작되었다. 1차 세계대전 독일군이 벨기에를 침략하는 과정에서 루벤 가톨릭 대학교 도서관에 불이 붙는 사건이 발생하였고 이에 분노한 과학자들은 영국 과학자들이었다.

영국의 여러 유명한 과학자들이 독일군의 행동에 항의 서명을 실시하자 여기에 대항하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1915년 빈의 변위 법칙으로 유명한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빌헬름 빈(Wilhelm Wien, 1864~1928)과 슈타르크와 같은 물리학자들이 대표적이었으며 영국과 독일 과학계의 갈등은 좁혀지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이러한 민족주의적인 행동에 과격한 모습을 보였던 사람은 레나르트였다. 그는 자신의 유명세를 이용하기 시작하였으며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연구를 '유대인 물리학'으로 명명하며 이에 대항해 도이치 물리학을 제창하기에 이른다.

출처: 픽사베이

나치가 집권하기 시작하면서 그의 민족주의적인 행동은 과학을 넘어 정치계로 발을 넓히기 시작한다. 레나르트는 나치당에 가입하며 슈타르크와 함께 상대성 이론을 유대인 물리학으로 규정하여 반유대주의 운동을 벌였다.

둘은 나치의 사상을 이용하여 유대인 과학자들을 몰아내기 시작하였고 나치의 지원을 배경 삼아 독일의 대학들에 압박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1930년대 후반에 뉘른베르크 법이 제정되면서 독일에는 유대인 과학자가 존재하지 않게 되었고 레나르트는 히틀러의 조언자로 슈타르크는 독일 물리학의 총통이 되었다.

하지만 둘은 시간이 지나면서 영향력을 잃어가기 시작하였다. 과학계는 그들의 도이치 물리학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들의 지원자였던 나치는 물리학자 베르너 하이젠베르크(Werner Heisenberg, 1901~1976)에 더 관심을 기울였다.

출처: 노벨 재단,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하이젠베르크는 양자역학을 제창한 과학자 중 한 명으로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로 인지도가 높은 물리학자이다. 레나르트와 슈타르크가 공격한 유대인 물리학의 하나인 양자역학은 핵무기를 개발하는데 필요하였고 나치는 하이젠베르크가 더 젊고 유능함을 알고 있었다.

나치의 압박으로 하이젠베르크는 핵무기 개발 계획이었던 '우라늄 프로젝트'에 강제로 참여하게 되어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으며 히틀러는 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하면 하이젠베르크의 연구소에 경제적인 지원을 약속하였다.

하이젠베르크가 핵무기 개발에 무관심했는지 의도적으로 개발을 하지 않은 것인지에 대해선 다소 논란이 있지만 나치 독일의 '우라늄 프로젝트'는 실패로 돌아갔고 히틀러는 핵무기를 갖지 못하게 되었다.

출처: 픽사베이, 히로시마 원폭

오히려 '우라늄 프로젝트'는 미국으로 망명한 물리학자들에게 영향을 끼쳤고 그들은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을 설득하여 '맨해튼 계획'으로 알려진 미국의 핵무기 개발 계획을 추진하여 결국 원자 폭탄을 만드는데 성공하였다.

레나르트와 슈타르크와 같은 잘못된 사상을 가진 물리학자가 '유대인 물리학'을 탄압한 것은 역사 속의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이 거부한 과학은 이후 현대 물리학의 정설로 자리 잡았다. 둘과 같은 과학자가 핵무기 개발에 필수적인 이론들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은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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