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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년 서울컵 라이트급 국가대표 백승영

 

[조영섭의 복싱스토리] 지난 주말 동작구에 있는 강택주 관장이 운영하는 세기 복싱체육관에서 한국 아마복싱 중량급<中量級>에서 군웅활거 하던 80년대 그때 그시절 한 페이지를 장식하며 스타복서 킬러로 명성을 날린 현재 용산 경찰서 교통계 백승영 경감과 상봉 그의 파란만장한 옛 추억을 경청하는 의미 있는 시간을 가졌다. 62년 8월18일 충남 예산출신의 백승영은 대전체고 용인대를 거쳐 상무에서 꽃을 피운 복서로 당시 복서로는 보기 드물게 복싱의 4S(Speed,Strategy,Skill,Sense)를 겸비한 정통파 복서로 발진<發進>을 앞둔 함재기처럼 정교하고 빠른 스텝에 174Cm의 신장에서 송곳같은 날카로운 스트레이트로 무장한 <바람개비>라 불릴 정도로 날렵한 복서였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대전 한밭체육관 소속의 백승영은 79년 제60회 전국체전에 밴텀급으로 출전 1회전에서 전북대표 곽동성 과 맞대결 판정패하며 성장통 을 겪는다 곽동성은 결승에서 충북대표 박광천 을 꺽고 금메달을 획득한다.

충남 복싱협회 심판위원 백승영 경감

당시 우승자인 전북대표 곽동성은 아시안게임 2연패에 세계선수권 은메달을 획득한 김동길<한국체대>, 모스크바 올림픽 대표출신에 IBF 세계챔피언을 역임한 김지원<수경사ㅡ경희대>, 79년 뉴욕 월드컵 은메달에 78년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획득한 황철순<한국화약>, 75년 아시아 선수권 금메달 한창덕<중산체>등을 각각 잡은 극강의 파이터 였다. 전열을 추스린 백승영은 한체급 월장 80년 제4회 김명복 배 페더급 결승에서 이현주<전남체고> 를 잡고 올라온 박광천<청주농고>과 맞대결 접전 끝에 판정패했지만 소중한 은메달을 획득하며 성장 가능성을 보였고 백승영 을 잡고 최우수복서에 뽑힌 박광천 은 당시 10만원의 장학금을 받았다. 당시 중등부 최우수상은 5만원 대학부 최우수상은 15만원을 각각 지급 하였다. 이어진 학생선수권 페더급 준결승에서 <복싱계의 저팔계>로 불릴 정도로 강철체력 을 보유한 복서 전칠성<목포 덕인고>을  반박자 빠른 카운터 펀치로 전칠성 의 공세를 무력화 시키면서 주도권을 잡고 완승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탄력을 받은 백승영은 81년 한중일 3개국 국제대회 파견 선발전 결승에서 그해 학생선수권 라이트급 우승자이자 83년 인도네시아 대통령배 <웰터급> 은메달에 이어 87년과 88년 킹스컵과 올림픽에 각각 국가대표로 선발된 복싱계의 고수 하종호<경북체고ㅡ한국체대>를 잡고 라이트급에서 우승을 차지하자 각 대학에서 스카웃 제의가 물밀 듯 쇄도 결국 82년 용인대학에 진학 한다. 그해 제63회 마산 전국체전 1회전에서 전국대회 5관왕에  최우수선수상을 2회나 수상한  80년 인도네시아 대통령배대회 동메달 리스트인 베테랑 국가대표 조규남<원광대>을 맞이한 백승영은 일진일퇴의 치열한 타격전 끝에 극적인 판정승을 거두며 결승까지 진출하는 만만치 않은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고 결승에서 전남대표 이현주<목포대> 와 살얼음판을 걷는듯한 박빙의 승부 끝에 2ㅡ3으로 분패했지만 정상급 복서임에 손색없는 실력을 유감없이 보여줬다.

고교생 국가대표 였던 이현주는 81년 인도네시아 대통령배 금메달. 킹스컵 과 마르코스배 대회에서는 은메달. 82년 아시아선수권 대회에서는 동메달을 각각 획득한 특급 복서였다. 탄력을 받은 폭주 기관차 백승영 은 83년 제64회 전국체육대회 에서 준결승에서 87년 세계군인선수권 과 한미 국가대항전 에서 2관왕을 차지한 정교한 테크니션 인  정희조<경북대>마저 판정으로 꺽고 결승에 진출 비록 83년 제6회 인도네시아 대통령배 최우수복서 출신의 인간 기관차 진행범<한국체대>에 패해 은메달에 머물렀지만 녹록치 않은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85년도에도 김명복 박사배에 대회 라이트급 결승에서 83년  청소년 대표로 활약한 도종태 (동아대)를 맞이한 백승영은 주특기인 스트레이트 연타가 불을 뿜으면서 판정으로 잡으며  다시 한번 건재를 과시하며 유종지미를 거두며  용인대 를 졸업한 그는 86년 이흥수 사단의 상무에 입대하며 복서로서 기량이 일취월장하며 변곡점<變曲點> 을 맞이한다.

86년 12월 전국선수권 대회 우승자 백승영

86년 3월15일 제1회 킹스컵 국가대표 선발전에 출전 파죽의 3연승을 거둔후 만난 상대가 한차례 꺾은 전칠성<목포대>였다. 83년 로마 월드컵과 84년 LA 올림픽에서 메달을 획득하며 견고한 입지를 구축한 전칠성 은 과거의 전칠성이 아니었다. 2회전까지 우세한 경기를 벌인 백승영 은 3회전에 전칠성의 파상공격에 실점 1ㅡ4 로 고개를 숙인다. 전칠성은 백승영에 비해 복싱 스킬은 부족했지만 열정과 성취욕이 백승영 에 비해 상대적으로 매우강한 복서였다. 분기탱천 한 백승영은 그해 6월에 치러진 제 67회 전국체육대회에서 라이트 웰터급 결승에서 국제대회 3관왕의 대업을 성취한 강력한 우승후보 고희룡<제주도> 을 잡고 올라온 장용강<울산 정인체>을 판정으로 꺽고 충남 팀 일반부 유일한 금메달을 획득한다.

당시 충남은 대학부에서 박병진이 슈퍼 헤비급에서 금메달을 획득 토탈 2개의 금메달을 건진 대회였다. 전년도 전국체전 우승자로 대회 2연패를 노리던 장용강<울산 정인체>은 준결 에서 강력한 우승후보 고희룡 <제주도>을  잡으며 결승에 진출 기세를 올렸지만 죽을수는 있어도 질수는 없다는 <수사불패>의 군인정신 으로 무장한 백승영 에 의해 고배를 마신다.

백승영 경감과 세기 체육관 강택주 관장

장용강은 86년 3월 아시안 게임 2차선발전 에서도 김시영<상무> 을 잡고 우승한 정통파 복서로 이후 프로에 전향 90년 7월 장승태<동아체>를 꺽고 국내 웰터급 챔피언에 등극하면서 통산 16전11승 <5KO승> 3무2패를 기록한 울산 정인 체육관 최정인 관장의 수제자였다. 당시 우승자 명단은 라이트 플라이급 김오곤<경남>, 플라이급 조정현<부산>, 밴텀급 김성길<경기도>, 페더급 김철수<경기도>, 라이트급 조정환<전북>, 라이트 웰터급 백승영<충남>, 웰터급 정용범<서울>, 라이트 미들급 이재학<대구>, 미들급 안달호 <서울>, 라이트 헤비급 곽귀근<대구>, 헤비급 장한곤<강원도> 등이 주인공이다

86년 12월 한해를 마무리하는 전국선수권 대회에서도 백승영은 전년도 전국체전 라이트 웰터급 금메달 리스트 오봉균<동국대>에 완봉승을 거두고 한해를 마무리한다. 87년 3월  88서울 올림픽 1차 선발전에서 국내에서 8체급을 석권한 김민기<한국체대>에게 두차례 판정승한 하이테크한 복싱을 구사하는 김시영<경북체고 ㅡ동아대>을 결승에서 잡고 우승을 차지한 그는 하종호, 정희조에 이어  김시영까지 경북체고 출신 국가대표 3인방을 차례로 잡으며 경북체고 킬러란 별명을 얻었다.  당시 선발된 대표선수 명단은 다음과 같다. 라이트 플라이급 <오광수>, 플라이급<김용상>, 밴텀급 허영모, 페더급<박윤섭>, 라이트급<정희조>, 라이트 웰터급 <백승영>, 웰터급 <송경섭>, 라이트 미들급 <박시헌>, 미들급 곽귀근, 라이트 헤비급 <민병용>, 헤비급 <백현만>, 슈퍼 헤비급<김유현> 등이 주인공이다.

용산 경찰서 교통계  백승영 경감

이후 백승영은 87년 4월26일 한미 국가대항전에서 미국대표인 마르티네에게 1ㅡ2 판정패 했지만 경기내용은 박빙의 승부였다. 당시 라이트 플라이급에서 오광수가 미국대표인 마이크 카바할에 3ㅡ0 완승을 거둔 인상적인 대회로 기억된다. 이후 88 서울 올림픽 2차선발전 우승자인 김시영과 평가전을 치러 또다시 판정승을 거두면서 견고한 아성을 구축한 백승영은 치명적인 무릎부상이라는  불청객이 방문 하면서 서울대학병원에 입원, 링 위에서 날지 못하는 비운의 황태자로 전락 한다. 결국 성치않은 몸을 추스려 올림픽을 목전에 두고 88년 3월 개최된 제1회 서울컵 에 통증을 무릎쓰고 경기에 출전했지만 영국에 엘리오트 선수에게 중도에 경기를 포기한 백승영은 이후 핀란드 템머 대회와 세계군인선수권 대회는 물론 사나이의 모든 것을 걸고 애오라지 대비해왔던 가장 중요한 88서울 올림픽 최종선발전 마져 출전하지 못하면서 9년동안 114전 98승(32KO.RSC) 16패의 전적을 소품처럼 남기고 링을 떠난다. 작은 성공은 노력으로 이룰수 있지만 큰 성공은 운이 없으면 성취하기 어렵다는 말을 다시한번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백승영은 12체급에 걸쳐 도돌이표 처럼 반복되는 선발전 경기를 관중석에서 쓸쓸히 지켜봐야 했던 비운의 황태자 였던 것이다.

백승영 경감 부부

88년 7월 상무에서 전역한 백승영은 89년 8월 긴 장고 끝에 인생 2회전을 경찰로 전환하며 새로운 출발을 시도한다. 그는 어울리지 않는 취업은 어울리지 않는 결혼과 같다고 깊이 성찰 한후 자신의 적성에 잘 맞는 경찰직에 투신 30년이 넘는 긴 세월을 철두철미한 원리원칙과 공명정대한 사명감으로 무장 경찰의날에 경찰청장 및 경우처장 표창상 등을 수차례에 걸쳐 받은 공로로 경감에 전격적으로 승진한다. 백승영은 난세의 영웅들이 출현, 물고 물리는 치열한 각축전을 벌였던 삼국지처럼 그역시 사각의 링에서 국가대표로 한축을 담당했던 지난 빛바랜 지난 추억을 속 잠바에 슬그머니 감춘 체 교통사고 조사 팀장으로 용산 경찰서 교통계 에 묵묵히 재직하고 있다. 인생이나 복싱이나 총체적으로 보면 새색시 처럼 슬그머니 나타났다가 바람처럼 잽싸게 사라지는 기회를 잡기위해 항상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하며 결과가 나올 때 까지 계속 두들기는 적극적인 자세가 성공으로 향하는 직선코스란 생각이 든다. 스코틀랜드 속담에 어둠을 탓하기 보다는 한 자루 촛불을 켜라는 말이 생각난다. 백승영 경감의 건승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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