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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전선> 박근형 연출을 인터뷰하게 하게 된 계기는 지난 3월 말 일본 도쿄 신주쿠의 <타이니 앨리스 페스티벌>을 현장 취재하면서 느낀 감동 때문이었다. 일본인들은 대체로 자국 내의 연극뿐만 아니라 외국의 연극에 대해서도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는 거로 유명한 데, 적어도 이 작품은 현지에서 그렇지가 않았다. 폭소와 눈물이 공존하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아닌 '타이니 앨리스'에서의 공연은 그 자체로 신기원이라고 할 수 있었다.

박근형 연출과 출연 배우들 그리고 모든 스태프가 이런 반응은 처음이었다고 할 정도로 의외적인 것이어서 그 '힘'을 우리나라 독자들과 함께 느끼고 싶었다. 그리고 제36회 서울 연극제에 이 작품이 개막작이라는 것도 상징적 의미가 있다. 일본에서 과거 식민지 출신의 배우들이 피식민지인들의 정서를 건드린 작품으로 큰 호응을 받았는데 하필이면 귀국하자마자 제36회가 되는 서울연극제에서 개막작으로 선정되었다는 것 자체가 우연으로 다가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안녕하세요.
ㄴ 네, 안녕하세요.

도쿄 신주쿠에 있는 타이니 앨리스 극장에서 <만주전선>을 공연한 계기가 가장 궁금했습니다.
ㄴ 몇 년 전부터 일본에 공연을 가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의사소통은 안 되지만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스토어 하우스(일본 도쿄 우에노를 대표하는 소극장)의 기무라 신고(Kimura Shingo, 일본극단 온천 드래곤의 예술감독)선생님을 만났습니다. 전 그분의 연극 태도에 매료되었습니다. 에고다라고 하는 도쿄 외곽에 있는 소극장에서 만난 인연인데 다시 소극장을 하신다고 하셔서 저희도 한번 가서 놀아보고 싶다고 했더니 기꺼이 초청해 주셔서 3년간의 교류가 있었습니다. 그 와중에 타이니 앨리스를 운영하시는 니시무라 히로코 선생님이 극장이 폐관되니 한번 오지 않겠느냐고 하셨는데 마침 저도 거기에 가보고 싶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오태석 선생님과 이윤택 선생님이 작업하셨던 곳으로 한국 연극인들과 인연이 오래된 극장이기에 저도 전부터 작업을 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럼 이번에 타이니 앨리스에서 공연하신 것은 처음인가요?
ㄴ 네 처음입니다. 그전에는 좌담회 때 한번 갔습니다. 15, 6년 전에 <청춘예찬>을 초청해주셨는데 10명(출연배우 포함 전체 스텝의 규모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이 넘는다고 해서 묘하게 작품이 바뀌면서 전 못 가게 됐습니다.

만주전선을 극작하시고 연출하시고 공연하시게 된 비하인드 스토리를 말씀해 주세요.
ㄴ 비하인드 스토리까지는 아니고요. 이런 얘기 한번 해보고 싶었습니다. 저희 아버지한테 언뜻 들었는데 젊은 시절에 아버님이 만주에 계셨습니다. 연세가 높으셔서 당구라는 것도 모르고 그러실 줄 알았는데 어느 날 매형과 함께 당구장에 가는데 인사치레로 아버님도 같이 가실래요 하고 말씀드렸더니 '내레 만주에서 당구 150을 쳤디' 그러시는 겁니다. 도대체 그 당시 40년대 만주에 당구장이 몇 개나 있었을 것이고 거기서 150을 쳤다면 우리 아버지는 대체 만주에서 무슨 일을 하셨을까 하는 궁금증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책을 보니 당시 조선의 엘리트들이 만주에 많이 갔다고 하는데 그 사람들은 거기서 어떻게 살았을까 그런저런 것들이 쌓여서 그냥 하게 됐습니다.

   
 

극작으로 완성하신 것은 언제입니까?
ㄴ 제가 원래 스타일이 그렇지만 대본을 미리 써 놓고 공연을 하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 그냥 큰 줄거리 가지고 배우들한테 내가 이런 연극을 할 건데 같이 한번 해보겠습니까 하고 그래서 만나고·…. 그게 공연 한 달 전이죠. 매일 쪽대본 나오고 그거 갖고 발전시키고 그랬습니다. 작년 봄, 5월이었습니다.

그럼 혹시 세월호와 맞물려서 방향 선회를 한 것과 같은 (시류에) 영향을 받은 것인가요?
ㄴ 아니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저는 현실 정치에 대해서는 조예가 깊거나 많이 아는 사람이 아닌데 우리나라가 다른 건 몰라도 정치적으로나 정치의식으로나 아직도 참 멀었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묘하게 공연 올라가고 며칠 있다가 문창극 국무총리 후보 얘기 나오고 (그래서) 공교롭게 됐어요.

일본공연에서 토요일과 일요일 공연에서 아메리카 민트향 대사가 빠진 이유는 무엇인가요?
ㄴ 그건 삭제한 게 아니라 배우가 깜빡한 겁니다.

저는 그것이 1943년이면 미국과의 전쟁에서 일본이 밀리는 시점인데 양국이 교류가 완전히 단절된 상태에서 껌이 물을 건너왔다는 것을 고증 상의 문제로 누군가 지적해서 그렇게 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군요.
ㄴ 현미 선생님께서 개성 분으로 집이 부자셨는데 6.25 즈음 전후에 아메리카 민트껌을 사려면 쌀 한 가마였다고 합니다. 그럼, 일본은 우리보다 서구 문물이 일찍 들어왔지만 껌이 상당히 귀한 상상도 못 할 물건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만주에도 있지 않았을까? 지금은 쉽게 몇백 원이면 사는 껌이지만 당시에는 껌이라는 것이 그렇게 귀한 것이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나서 집어넣은 겁니다.

김은우 배우가 맡은 주인공 이름이 아스카인데 일본에서도 흔하지 않은 이름인데 그 특별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고대 일본 문화에서 백제계 후손이 주도한 문명인데요.
ㄴ 배우들한테 각자 자기 이름(맡은 배역)을 지어오라고 했습니다. (웃음) 대부분 지어온 대로 했는데 정확한 기억은 없습니다.

극에 보면 아스카 너는 조선의 별, 북두칠성이 되라는 대사 때문에 상징성이 큰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북두칠성에 대한 개념도 의도한 것이 아니었나요?
ㄴ 별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요 북두칠성이라고 하면 좀 그럴듯할 것 같아서 그렇게 했습니다. (웃음) 우연입니다.

   
 

특정 성씨의 종파가 나오는데 국당공파가 등장하는 이유는? 
ㄴ 그 이유가 있습니다. 저는 족보가 없는 사람이라서 잘 모르는데 가문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잖아요? 저희 단원 가운데 한 사람이 국당공파 37대손입니다. 그래서 얘기를 들었죠. 대표적인 경우가 전 대통령인 이명박입니다. 국당공파의 조상 섬김이 남다르다고 합니다. 훌륭한 가문 중의 하나입니다. (이 부분은 연극을 직접 관람하지 않으면 이해하기가 어렵다.)

성극을 이용한 극중 극이 인상이 깊었는데 개신교와 성서의 인용이 <경숙이, 경숙이 아버지>에서도 중요하게 등장합니다. 전매특허 같은 이러한 연출에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ㄴ 우리나라가 아시아에서 유달리 기독교가 흥하고 신자가 많잖아요? 그래서인지 한국사회에서 기독교는 영향력이 크지 않습니까? 특히 대형교회의 권력이 어마어마하잖아요. 저도 어머니 따라서 교회에 가면 선거 때만 되면 유력인사들이 목사님 설교가 끝나고 신도들한테 인사를 하고 그러는데 그런 것에 대한 일종의 풍자죠. 종교와 성서 자체에 대한 알레르기가 아니라 한국 개신교가 왜곡된 것에 대한 간접적인 얘기를 해보고 싶었습니다.

극중 극의 두 번째 극에서 아스카에 의해서 모든 사람이 죽음을 맞이하는데 연출자의 메시지가 전달된 작품의 하이라이트가 아닌가 한데 이것은 처음부터 계획한 것입니까?
ㄴ 두 가지 측면이 있는데요 하나는 두 번째 성극 역시 첫 번째와 마찬가지로 상식선에서 끝난다면 식상할 것 같아서 조금 극단적일 수 있지만 내가 하나님이라면 그렇게 종말이 날 것 같더라고요. 그들이 생각하는 성서에 따른 해석이 첫 번째 성극에 성서의 말씀대로 나왔다면 두 번째 극 중 극의 성극에서의 비극적 엔딩은 그런 결론을 내릴 것 같았습니다.

일본 현지에서 그 부분을 보고 관객이나 일본 연극관계자가 혹시 항의하지 않을까 조마조마했습니다. 전 개인적으로 굉장히 떨렸습니다. 연극의 모든 메시지가 여기에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풍자 이상의 것으로 다가왔으니까요. 이 작품은 일본에서 전국투어를 할 수 있는 자격조건이 되는데 그런 계획이 있으신가요?
ㄴ 아니 그런 거 없고요. 거기 있는 어떤 연출 선생님이 이 작품을 자기 극단에서 했으면 어떻겠느냐고 하셨고 또 다른 하나는 일본 배우들이랑 했으면 어떻겠느냐고 하셨습니다. 대본만 수출하는 게 첫 번째고 나머지는 제가 직접 연출로 가서 일본 배우들이랑 하면 어떻겠느냐고 거였습니다. 아마 시간이 맞으면 그래 보자는 얘기만 했습니다. 보셔서 아시겠지만 일본분들이 의외로 이 작품을 되게 잘 보시더라고요. 남의 나라 연극으로 보지 않고 당신들의 이야기, 당신들의 연극으로 봐서 좀 놀랐습니다.

제가 만주전선을 보면서 느꼈던 감동 중의 하나는 만주전선이 우리나라에 관한 이야기일 뿐만 아니라 일본과 같이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지역적인 경계를 넘을 수 있다는 것이죠. 충분히 일본 관객과도 소통할 수 있는 경쟁력 높은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ㄴ 네 저도 공감합니다. 그런 의도는 아니었는데 일본분들이 의외로 상당히 적극적으로 보고 자기 얘기처럼 느껴서 놀랐습니다.

그 이후에 그분과의 소통은 적극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ㄴ 그날 이후는 모르죠. 거기 계신 한일 연극 교류 코디네이터이신 마정희 선생님이라던가 이시카와 주이라는 분(자막담당 선생님)이 계세요. 그분이 저희 작품 번역을 해주셨는데 이 두 분이 한일간에 연극 교류(실무자)를 하니까 아마 좀 시간이 흐른 후에 연락이 오지 않을까 합니다. 우리보다 일본에서 연극 제작하고 기획하는 건 숨이 좀 길더라고요. 저희는 바로바로 하는데.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아마 소식이 있지 않을까 합니다.

선생님이 보시는 일본과 우리나라의 연극의 장점과 차이가 무엇인지 말씀해 주세요.
ㄴ 대부분의 사람이 다 인정하는 바이지만 우리나라 배우들이 에너지가 훨씬 더 많죠. 감성이 풍부해요. 단지 우열을 비교하자는 게 아니라 그런 차이가 있고 한국 배우들이 연출의 지시만 받아서 수행하는 게 아니라 자기 체화를 해서 무대에서 선보이는 스타일입니다. 그러니까 일본 배우들은 대체로 수동적입니다. 연출이 지시하는 한도 내에서 표현하고 (물론)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그런데 글 쓰는 극작 층은 일본이 훨씬 더 두텁죠. 일단 작가들이 더 많고 작품의 소재 자체가 한국에 비해서는 훨씬 다양하죠. 좋은 텍스트들이 일본에 많아요. 전체적인 연극을 보면 일본이 우리나라보다 자본주의가 먼저 들어오고 발달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처럼 상업 극이 지나치게 넘치지 않는 것 같아요. 상업 극을 하더라도 대학로에 많은 연극이 남녀의 연애와 달콤한 이야기들을 하는데 이렇게 치우치지는 않습니다. 아무래도 국가에서 예술가들을 대하는 태도와 문화적 지원이라던가 이런 것이 체계적인 이고 견고해서 그런지, 하여간 그런 느낌이에요.

그런 일종의 쏠림 현상이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민족적인 성향하고도 연관이 있다고 보시는 거죠? 그리고 문화의 다양성 측면에서 우리가 부족하다는 뜻이겠죠?
ㄴ 아마도 그런 것 같습니다. 우리는 좀 불이 불면 '확' 하고 일어났다가 금세 사그라지고 하는데 그런 건 일본이 덜할 것 같습니다.

   
   
 

극단 골목길과 작업하는 배우들을 보면 역량이 뛰어난 느낌을 받는데 그중에 가장 인상적인 것이 목소리, 음색, 톤, 성량, 발성, 화술이 다르다는 겁니다. 여기서 그분들의 역량을 강화하는데 선생님이 나름대로 어떤 특별한 트레이닝을 하시는 게 있는지 궁금합니다.
ㄴ 아니요. 제가 배우를 따로 훈련하는 건 없고요. 오히려 배우들한테 그런 걸 하지 않으려고 하는 편입니다.

일부러요?
ㄴ 네. 그러니까 훈련은 개인 스스로 자기에게 맞는 걸 자기가 하는 거지 마치 무슨 어떤 메소드를 공부하거나 하는 것은 하고 싶으면 각자하라 하지 같이 하지 않는 편입니다. 저랑 작업하는 배우들이 안팎에서 좋은 평가를 받고 하는데 제게 어떤 특별한 훈련 방법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뭐랄까, 그들이 내버려 두는 제 작업 스타일에서 더 강해지지 않았나 합니다. 어떤 분들은 저보고 방목스타일이라고 하는데 비슷한 것 같아요. 웬만하면 연습할 때 뭐 해라 뭐 하지 마라 거의 안 합니다. 그냥 쭉 보고 있다가 좋으면 그거 좋다 그냥 계속해라 그러고 제 스타일과 다르거나 작품 전체에 비해서 어긋났다 싶으면 제가 몇 마디 하면 다 각자 알아서 하는 스타일인 것 같아요. 다른 데서 작업하다 저랑 만나면 처음에 다 당황해 하는 편이죠. 그런데 몇 번 작업을 해보면 제가 갈피를 못 잡을 때는 여지없이 작품이 무너지는데 대체로 어느 정도 큰 윤곽만 그리면 배우들 스스로 다 헤쳐나가요. 말이 길어 졌는데 제가 훈련을 하는 게 아니라 좋은 배우들을 많이 만난 편이죠.

제가 볼 때는 선생님이 인복이 많으신 것 같습니다. 그게 참 쉽지가 않은 일인데요. 역량 있는 분들이 선생님께 알아서 찾아오는 것 아닙니까? (웃음)
ㄴ 놀기 좋아하니까요. (웃음)

이번에 일본에서 만주전선 공연하시면서 일본 관객의 반응을 피부로 느끼신 것에 대해서 말씀해 주세요.
ㄴ 같이 갔던 배우들하고 다 기뻤어요. 제 작품이 그동안 일본에서 다섯 작품 정도를 한 것 같은데 가령 <청춘예찬>이나 <경숙이, 경숙이 아버지> 같은 경우는 공연 끝나면은 관객들이 조용하더라고요. 그래서 아 이 사람들이 내 이야기에 별로 관심이 없구나 하고 그렇게 생각해서 물어보면 원래 반응이 그렇다고 그러더라고요. 일본 분들은 공연을 보면서 반응을 안 한다고 그러더라고요. (웃음) 그런데 나중에 보면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그러는데 이번 작품은 정말 의외였어요. 중간에 가끔씩도 웃기도 하고.'

   
 

폭소가 터지더라고요.
ㄴ 원래 안 그러는 분들인데 그래서 놀랐고, 저랑 같이하는 배우 중에 따로 일본에서 작업하는 배우들이 보고되게 좋아하더라고요. 인정받고 하니까, 그래서 요번에 되게 기뻤습니다.

그 이유가 이전에 하셨던 작품과 달리 관객들의 반응이 즉각적이었다는 것에서 기억에 남으시는 거죠
ㄴ 네. 이런 반응을 보인 적은 없었거든요. 그리고 제가 뭐 일본말은 모르지만 일본연극을 봐도 관객들이 대체로 차분하고 조용히 킥킥대던가 하지 대놓고 웃거나 하는 건 참 놀라운 일이었어요.

선생님이 연극에 입문하시게 된 계기와 작법에 대한 독특한 노하우를 좀 말씀해 주세요.
ㄴ 저는 연극이 뭔지도 모르고 누나들만 있고 그래서 형들 세계가 부러웠어요. 그래서 연극을 하면 이렇게 막 떠돌아다니고…. 제가 그런 떠돌이 기질을 흠모했나 봐요. 연극배우가 되거나 글을 쓴다거나 하는 것에 아무 생각이 없었어요. 그냥 연극이 좋았어요. 제가 아주 사소한 역할, 포스터를 붙이던 전단을 돌리던 그런 것도 참 좋았어요. 작법이라는 것도 딱히 없고 글도 문학수업을 받은 것도 아니고 내가 생각하는 연극을 해야겠는데 누가 내 생각을 써 줄 사람도 없고 희곡을 쓴다기보다 하고 싶은 연극을 하기 위해서 최소한의 시놉시스 정도만 갖고 전 작품을 만들고 합니다.

연극입문은 공식적으로 몇 년이나 되시는 건가요?
ㄴ 올해로 33년 정도 됐네요. 19, 20살에 들어왔으니까요.

대표로 있는 극단 '골목길'만의 궁극적인 담론은 무엇인가요? 앞으로 줄기차게 추구해서 도달하고자 하시는 세계에 대해서 말씀해 주세요.
ㄴ 배우들한테 이런 말을 합니다. 연극을 위한 연극을 하지 말자. 연기를 위한 연기를 하지 말자. 우리가 말하고 싶은 얘기, 하고 싶은 표현을 타성에 젖어서 하지 말고! 아주 중요한 것은 관객은 한국 사람이다. 다시 말해서 나와 같이 숨 쉬는 이 시대의 사람들이기 때문에 엄한 얘기거나 옛날 얘기하지 말자. 내가 말하는 옛날 얘기란 스토리가 아니라 이 연극을 보는 사람들이 지금 우리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 바로 지금 이 순간에! 동시성!!

70년 전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과 큰 차이가 없다는 점에서 만주전선의 연작 가능성이 커 보이는데 혹시 그런 걸 구상하고 계신가요?
ㄴ 연작 정도까지는 아니고 그 비슷한 걸 구상하고 있습니다. 1960년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정확히 말하면 4.19가 일어나던 해의 부정선거를 다룬, 가칭 제목은 삼일오입니다.

3월 15일이요?
ㄴ 숫자로 쓰지 않고 2015년 압구정동에서 벌어지는 삼일오, 2015년 강남 사람들이 느끼는 삼일오 얘기를 해보고 싶어요. 그날이 부정선거일이잖아요?

재미있겠는데요. (웃음) 그럼 이 작품 내년에 볼 수 있을까요?
ㄴ 모르겠어요. (웃음). 곧 나오겠죠.

어느덧 연극계 중진이신데 후배 연극인들을 위해서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ㄴ 제가 후배들을 위해서 할 얘기는 없고요. 후배들이 굉장히 열심히 합니다. 그런 사람 참 많아요. 그런데 환경이 더 열악해졌어요. 물질적인 것은 더 어렵죠. 그런데도 더 열심히 하는 후배들이 많은 데 돕지 못해서 죄송할 뿐이죠. 힘들지만 이 꽉 깨물고 눈 부릅뜨고 견뎌내기를 바랍니다.

관객의 한 사람으로서 참 가슴 아픈 부분입니다만 모든 것이 열악해지는 상황에서 역설적으로 걸작이 탄생할 가능성은 오히려 커지는 걸까요?
ㄴ 그렇겠죠. 연극이란 분야가 숨 막히는 환경에서 숨 막히니까 으악 하고 쌓인 함성을 내지르는 것이니까요. (끝) 

#문화뉴스 아띠에터 이형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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