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뉴스 윤경민 칼럼니스트] 20년 전 오늘, 동북아 역사의 한 페이지가 쓰였다.

해방 후 처음으로 북한과 일본의 정상이 만나 국교정상화의 기본 원칙을 합의한 것이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는 과거 식민지 지배에 대해 공식 사죄했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일본인 납치를 전격 시인, 사과하고 재발방지를 약속했다. 또한 상호 청구권 포기와 경제협력 방식의 과거사 청산에 합의, 본격적인 국교정상화 교섭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핵문제는 국제사회와의 협의를 통해 풀어나가고 미사일 발사 보류도 연장하기로 하는 등 북한의 안보 불안 제거에도 상당히 기여한 회담으로 평가받았다. 

이 같은 내용의 '평양선언'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이며 매우 파격적인 발표였다. 북일 관계의 정상화를 위한 주춧돌이 놓인 것으로 인식되었고 당장이라도 수교가 이뤄질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후 벌어진 현상은 전혀 뜻밖이었다. 일본에서는 반북 여론이 거칠게 고조되기 시작했다. 납치 피해자 '5명 생존, 8명 사망'이라는 북한의 조사 결과 때문이었다. 설마 했던 납치가 실제 북한 공작원에 의해 벌어졌음이 확인되었고 8명이나 이미 세상을 떠났다는 충격적인 발표에 일본 열도 전체가 분노로 휩싸였다. 

ⓒ YTN 방송 화면 
ⓒ YTN 방송 화면 

솔직하게 인정하고 사과하면 끝날 줄 알았던 북한으로서는 당혹스러운 역풍이었다. 부시 미국 정권과의 대립 속에 일본과의 관계 개선으로 경제난을 극복하려던 북한의 계산은 완전히 빗나갔던 것이다. 

역풍을 잠재우려 북한은 생존 납치 피해자 5명의 일본행을 임시로 허용했다. 하지만 이 역시 패착이었다. 일본은 그들을 붙들어놓고 북한에 머물고 있는 가족까지 돌려보낼 것을 요구했다. 북한은 "약속을 위반한 건 일본이다. 일단 피해자들을 북한으로 돌려보내면 가족들의 의사를 물어 본인들의 희망대로 하게 하겠다"고 했지만 일본은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리고 1년 8개월 뒤인 2004년 5월 두 번째 북일 정상회담이 열렸다. 다시 평양으로 날아간 고이즈미 총리는 납치 피해자 가족 5명을 데리고 도쿄로 돌아왔다. 나머지 3명도 몇 달 뒤 일본에 입국함으로써 납치 피해자와 가족 문제는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사망자 8명의 사망 경위가 석연치 않다며 철저한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목소리는 사그라들지 않았다. 특히 가짜 유골 파문이 반북 여론에 불을 지폈다. 북한 측이 요코다 메구미(13살 때 피랍)의 것이라며 일본 측에 건넨 유골이 DNA 검사 결과 가짜로 판명됐다는 일본 정부의 발표가 기폭제였다.

이후 6자회담 공간에서 일본은 집요하게 납치문제 해결을 촉구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하다가 2014년에 가서야 '스톡홀름 합의'라는 또 다른 이정표를 마련했다. 북한은 납치 피해자와 행방불명자뿐 아니라 1945년 전후에 북한에서 사망한 일본인의 유골과 묘지, 잔류 일본인, 일본인 배우자에 이르기까지 포괄적 조사를 실시하고, 일본은 대북제재의 상당 부분을 해제하기로 한 합의였다. 이제 진실이 규명되는가 싶었지만 이 합의 역시 깨졌다. 북한은 조사를 지연시켰고 2016년 1월 4차 핵실험을 실시하자, 일본은 대북 제재를 재개함으로써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이후 북한은 일본에 대한 기대를 접었다. 미국에 대항하며 핵개발을 지속했다. 북일관계 개선 가능성은 점점 멀어져 가고 있다. 국교정상화는 요원해졌다. 일본이나 북한이나 납치문제에 납치되었다. 북한은 결단코 비핵화란 없다며 핵 위협을 고조시키고 있다. 일본은 이를 빌미로 군사력을 강화하고 있다. 여차하면 평화헌법도 바꿔 전쟁 가능한 나라라고 선포할 태세다. 

77년의 긴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과거를 청산하지 못한 채 적대관계에 있는 북한과 일본. 

과연 '납치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빛바랜 2002년 9.17 평양선언의 부활을 기대해본다.

[글] 윤경민 (전 YTN 도쿄지국장) 
[글] 윤경민 (전 YTN 도쿄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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