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장에서 정치적 의사 표현은 금지된다.' FIFA 규정 57조는 비단 축구에서뿐 아니라 모든 스포츠 종목에 적용된다. 선수들의 능력이 유감없이 발휘될 수 있어야 할 스포츠 경기가, 순수한 열정이어야 할 스포츠 정신이 자칫 정치적 도구로 전락해버리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하지만 시계를 조금 되돌려보면 이 같은 생각이 꿈같던 시절이 있다. 미국과 러시아의 이념 대결이 한창이던 냉전 시대, 체스 세계 챔피언십이 열리는 방콕에서 사람을 붙잡고 묻는다면 이런 대답이 돌아올지도 모른다. "저들은 체스 게임을 하는 게 아니라 나라를 대표해 전쟁하는 것이다"
아나톨리는 '체스는 체스일 뿐'이라고 외치고 싶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작은 행동도 모두 러시아의 감시를 받고 있으며, 그의 주변엔 자신과 체스 게임을 이용해 정치적 목적을 이루려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체스 게임에서의 승리도 결국 타인의 지배를 받는 승리일 뿐이다.
반복되는 상황에 지쳐가던 아나톨리는 프레디의 조수 플로렌스를 만나면서부터 조금씩 달라진다. 많은 능력을 갖췄음에도 프레디 뒤에서 그를 보조만 하는 플로렌스를 동정의 시선으로 바라보던 아나톨리는 점차 그녀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 하지만 플로렌스는 러시아로 인해 자신의 조국 헝가리가 침공 당했고, 가족을 잃었다. 플로렌스는 그와 나누는 대화 속에서 사랑을 느끼고 희망을 발견하는 자신이 당황스럽다.
'체스'는 두 남자의 체스 대결을 전면으로 다루고 있지만 흥미로운 점은 플로렌스의 존재감이 가장 극대화된다는 것이다. 특히 1막은 프레디의 오랜 조수로 일하던 플로렌스의 고군분투기라고 봐도 무방할 듯하다. 자신과 아무 상의도 없이 경기를 중단시키고 상황이 꼬여버리게 하는 프레디를 진정시키는 것도, 체스에 집중하지 않는 그를 어르고 달래 아나톨리의 수를 알게 하는 것도 모두 플로렌스다. 전개에서뿐만 아니라 굵직굵직한 넘버 또한 플로렌스의 몫이니 뮤지컬 '플로렌스'라 불러도 무방할 듯하다.
그래서 1막 마지막 부분, 아나톨리가 자신을 억압하는 러시아의 감시 체계를 견디지 못하고 플로렌스와 함께 미국행을 택하며 부르는 넘버 'Anthem'을 보며 플로렌스가 차려놓은 밥상을 아나톨리가 빼앗는 듯한, '웃픈' 기분이 든다.
1막 못지않게 2막도 이야기가 빠른 속도로 전개된다. 한국인이 공감하기 힘든 냉전 시대의 이야기를 그리며 그 시절 사람들의 감정을 전달해야 하기 때문에 그 어려움은 어느 정도 예상돼 있었다. 외국인에게 6.25 전쟁의 슬픔과 아픔을 공감하라며 강요할 수 없듯이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빠른 전개에 비해 개연성이 떨어진다는 점은 아쉽다. 시대적 배경의 설명은 부족하고 캐릭터 설명도 뒷받침되지 않으니 이야기는 어느 순간 따라가기 어려워진다.
더구나 체스를 내세웠음에도 체스 장면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부분이 적다는 점도 극의 특색을 반감시킨다. 아나톨리와 프레디의 긴장감 넘치는 체스 대결을 기대했던 이에게 경기 결과만 말해주는 아나운서의 안내방송만으로 만족감을 줄 수 있을까.
특히 조권의 아나톨리는 기대 이상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조권에게서 흔히 떠올릴 수 있는 얇은 목소리와 장난기 넘치는 모습을 '체스'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20대의 나이로 표현해내는 중후함은 부족할지라도 자기 삶을 송두리째 흔드는 조국의 감시 속에 좌절하고 저항하는 아나톨리를 잘 표현했다. 그의 말대로 아나톨리의 조권화가 아닌 조권의 아나톨리화를 위해 노력한 모습이 역력하다.
사람의 진심은 보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믿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란 말이 있다. 아나톨리의 진심은 그 시대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사람들이 믿고 싶은 대로 왜곡되며 결국 시대적 상황이란 거대한 파도에 희생된다. 그 과정을 조금 거칠게 표현하긴 했지만, 시대가 외면한 아나톨리의 진심을 보고 싶다면 오는 7월 19일까지 공연되는 뮤지컬 '체스'를 만나보자.
문화뉴스 전주연 기자 jy@mhn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