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아티스트에디터 (아띠에터) 남예지 artietor@mhns.co.kr. "재즈 보컬리스트입니다. 육식은 하지 않고, 멋진 글을 쓰고 싶은 꿈이 있어요"

[문화뉴스 남예지 아띠에터] '플레전트빌(Pleasantville)'은 이름 그대로 즐거움과 유쾌함이 가득한 마을이다. 마을 사람들은 넘치는 예의와 상냥함으로 늘 서로를 배려하며 공동체적 선을 이룬다.

그러나 이 마을, 어딘가 조금 이상하다. 날씨는 결코 비가 오거나 흐린 일이 없이 사시사철 쾌청하고, 화재와 같은 재난은 절대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소방관들의 임무란 기껏해야 고양이를 나무 위에서 내리는 일 뿐이다.

모든 가장(家長)들은 같은 시간에 퇴근해서 그림같이 차려진 식탁에서 저녁식사를 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 누구도 이 마을이 어디로 이어져 있는지, 마을 바깥에는 무엇이 있는지에 대해서 궁금해 하지 않는다. 오로지 마을과 가족이 세계의 전부이다. 온통 백지로 이루어진, 겉표지 뿐인 도서관의 책들은 새로운 지식의 습득을 허락하지 않는다. 마을의 행복을 위해서는 개인의 욕망이나 삶의 진실 따위는 중요치 않다. 그들의 세계는 모든 색깔이 억압당한 채, 흑백의 유토피아를 이룬다.

데이빗은 그러한 제니퍼의 행동에 반발하며 흑백의 유토피아를 보존하고자 애쓰지만, 결국 돌이킬 수 없는 변화를 받아들이고 아담과 이브의 신화가 떠오르는 장면을 통해 여자친구가 주는 선악과를 받아 문다. 영화 속 '플레전트빌'은 TV 시트콤 속의 마을이다. 리모컨의 고장으로 인해 데이빗과 제니퍼는 '플레전트빌'로 빨려 들어간다. 평소 시트콤의 애청자였던 데이빗은 최대한 마을의 규범에 어긋나지 않도록 행동하며 적응해 나가려 하지만, 그렇지 않았던 제니퍼는 마을 사람들의 숨겨진 욕망을 자극함으로써 억압당해있던 감정의 색이 조금씩 드러나도록 만든다.

본 영화의 주요한 특징 중 하나인 흑백과 컬러 화면의 병치는 1939년 영화인 '오즈의 마법사(The Wizard of Oz)'에서도 사용된 바 있다. 주인공 도로시는 모험과 일탈을 욕망하는 소녀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녀의 욕망과는 거리가 멀다.

그녀의 현실은 가족의 농장을 유지하기 위해 개인의 욕망은 절제한 채 각자 맡은 일에 충실해야만 하는 세계이다. 심지어 도로시는 마을 사람들이 싫어한다는 이유로 사랑하는 반려견마저 소유할 수 없는 위기에 처한다. 이렇게 삭막한 세계가 무채색의 세피아(sepia) 톤으로 그려져 있다. 어느 날 엄청난 태풍에 도로시의 집이 날아가게 되고, 도착한 곳에서 문을 열고 또 다른 세계로 발을 디디는 순간, 화면은 온통 화려한 색깔의 풍경으로 가득 찬다. 여기에서 컬러화면은 도로시의 욕망과 꿈이 반영된 세계를 표현한다.

이러한 서사구조에 따른 화면구성은 '플레전트빌'에서 역전된 방향으로 나타난다. '오즈의 마법사'가 주인공의 욕망을 표출하기 위해 컬러화면으로 이동했다면, '플레전트빌'은 주인공들이 흑백화면으로 이동하여 욕망을 억압당하게 된다. 또한, 전자에서는 흑백화면과 컬러화면의 전환이라는 요소가 주인공은 인식하지 못한 채, 관객만이 알아볼 수 있도록 메타 서사적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후자에서는 주인공들이 화면의 전환을 인지하고 있으며, 이는 갈등구조 내에서 등장인물들의 인식변화와 행동에 동기를 부여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흑백의 화면 밑으로 은폐된 색들은 공동체의 행복 밑으로 억압된 개인의 욕망을 나타내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타인의 욕망이 하나둘씩 드러나는 것에 대해 엄청난 반발을 하지만, 곧 타인의 욕망이 자신의 욕망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개인의 욕망을 추구하는 일이 반드시 공동체의 행복에 반하는일이 아님을 깨달아간다. 

반면 여전히 흑백으로 남아있는 사람들은 감정의 색깔이 묻어난 사람들을 ‘유색인종’이라며 차별하는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그들은 공동체의 잘 정돈된 행복이 깨어지는 것에 불안을 느끼고 마을 사람들의 욕망을 더욱 강하게 통제하기 위해 새로운 행동강령을 만든다.

 

반면 마을 사람들이 사랑을 주고받던 장소인 연인의 호수와 대중소설을 읽을 수 있는 도서관을 폐쇄하고 애국가와 같은 건전한 음악만을 허용한다. 그림을 그릴 때도 흑, 백, 회색만을 사용하게 하며, 학교에서는 ‘역사의 불변성’만을 교육하게 한다. 이를 통해 영화는 전체주의적 행복 추구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여주며, 관객에게 ‘유색인종’의 승리를 더욱 기대하게 만든다. 

한편 흑백의 사람들에게 감정의 색깔을 찾아주는 것은 성적인 욕망, 팝(pop), 소설이었다. 즉 한때 저급문화, 소비문화라 치부하던 대중문화가 인간의 욕망과 감정을 솔직히 드러내 주는 문화로써 결국 은폐된 진실을 전복시키고 ‘유색인종’의 승리를 이끄는 데에 필수 요소로 작용하는 아이러니 또한 본 영화의 백미라 할 수 있다.

 

'플레전트빌'은 1950년대의 전형적인 고급문화와 저급문화의 구분을 전복적인 시선으로 바라봄으로써 일종의 환상성을 부여하고 있다. 이러한 환상성을 통해 관객은 현실에서 억압된 욕망을 영화 속에 투영하게 된다. 로즈마리 잭슨(Rosemary Jackson)에 의하면 환상은 사회적인 맥락 안에서 생산되고, 결정되기 때문에 사회적인 맥락으로부터 분리해 이해하기는 힘들다.

환상이란 문화적인 속박으로 인해 생겨난 결핍을 보상하려는 속성을 지니기 때문에, 결국 사회적 맥락의 한계에 대한 투쟁이라고 볼 수 있다. 즉, 환상을 통해 현실을 전복시키고, 현실에서의 불가피한 결핍을 잠시나마 극복하고자 하는 것이 영화 속 환상성이 지니는 중요한 역할이라고 할 수 있다.

TV 속에서 행복하고 아름답게만 그려지고 있는 마을의 이면에는 개인적 욕망의 철저한 은폐가 존재한다는 아이러니와, 당시 소비적이며 퇴폐적이라고 비판받던 대중문화가 오히려 긍정적인 자극제가 된다는 아이러니는 현실의 결핍에 대한 전복이며, 카타르시스로 작용하고 있다.

 

오늘날의 대중문화는 더는 저급문화나 소비문화가 아니며, 소비를 통한 재생산의 문화이자, 미학적 가치를 가지고 현대인의 정체성을 함축하는 문화이다. 특히 '한류'로 대표되는 한국의 대중문화는 국가 이미지를 높여주는 좋은 수단이 되기도 한다.

얼마 전 모 종교인의 드럼(Drum)과 청바지에 대한 맹렬한 비판을 보며 씁쓸함을 느꼈던 것은 대중문화가 아도르노(Adorno)식의 ‘문화산업’으로만 치부되던 시절의 이데올로기가 아직도 사회 곳곳에 남아있는 듯했기 때문이다. 물론 비판받아야 할 부분은 비판받는 것이 옳으나, 단지 존재자체가 사회적 악(惡)이 되는 시대는 이제 지나갔다. 이러한 점에서 1998년 작품인 영화 '플레전트빌'은 대중문화의 승리(?)를 일찍이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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