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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든"
"살아내야제"
"견뎌내야제"
"이겨내야제"

절망 속의 조선, 2015년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우리와는 또 다른 '절망'이 엄습하던 시대였다. 일제강점기 '조센징'을 향한 무분별한 폭력과 끝을 모르는 비난은, 과연 이 땅에도 희망이 있을까 의심하게 만들었다. 뮤지컬 '아리랑'은 그 절망 속의 시대, 한반도와 만주, 그리고 하와이를 오가는 시공간 속으로 데려간다.

   
 

뮤지컬이라는 서구적 향이 짙은 장르에서, 전라도 사투리들이 즐비하다. 배우들은 각 넘버마다 "~해야제", "~혀" 등의 사투리를 사용한다. 이색적인 풍경이다. 극적이고 웅장하고 화려한 뮤지컬 넘버 속에 소박한 '사투리'라니 말이다. 사투리는 전라도 죽산면이라는 공간적 배경의 생동감을 살려주기도 하지만, '한국 창작 뮤지컬'만이 시도할 수 있는 정체성을 담은 특징이 되기도 한다. 더불어 고선웅 연출의 연극 '푸르른 날에'를 봤던 관객이라면 재미있게 받아들였을 점이기도 하다. 1980년대 광주를 배경으로 설정한 당시 작품에서도 모든 배우들은 사투리를 사용하며 그 감칠맛을 더하기도 했다. 특히 "여간 ~한 것이 아니여라"라는 식의 말투는 '푸르른 날에'에서도 '아리랑'에서도 고선웅이 즐겨 사용하는 전라도식 비꼬기의 유쾌함을 보여준다.

무대는 매우 단출해보였다. 고정된 배경이나 오브제가 없었고, 그저 무대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웬걸. 굉장한 무대였다. 배우들 뒤로 비춰지는 거대한 스크린 속에 수많은 이미지들이 출현했다. 사실적인 배경보다 추상적인 이미지의 파워를 실감하는 무대랄까. 특히나 일제를 표현하는 빨간 도형들의 향연은 욱일기를 떠올리게 하며, 일제의 잔혹한 속셈을 그대로 표현했다. 더불어 훈도시를 입고 북을 치는 남성의 뒷모습은 극의 전개와는 전혀 상관없는 상징적인 연출 부분이지만 관객들에게 일제에 대한 이미지를 제대로 각인시켜 주는 장면이 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수국이가 강간당한 이후 자살시도를 하다 실패하면서 득보와 함께 노래를 부르는 애달픈 장면에서는, 흰 꽃이 만발하다가 하나 둘 꽃잎이 떨어지며 결국에는 와르르 무너지는 이미지를 통해 수국이의 상황과 심정을 더욱 더 애달프게 만들었다.

   
 

또한 서구적 보이스와 우리 전통적 보이스가 함께 사무치는 장면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송수익은 서범석이라는 전문 뮤지컬 배우가 맡았고, 차옥비 역할은 우리 전통 소리꾼 이소연이 맡았다. 그 둘의 하모니는 생각보다 굉장했다. 이소연의 캐스팅은, 오는 26일까지 공연되는 연극 '문제적 인간 연산'에서의 이자람과 비교되는 캐스팅이었다. '문제적 인간 연산'의 이자람은 한(恨) 서린 인물들의 표현과 더불어 작품의 근본적 정체성을 담당하기 위해 필요한 인물이었다면, '아리랑'의 이소연은 서구적 장르와 한국적 스토리의 결합을 통해 꼭 필요한 인물이었다.

'아리랑'이 재밌는 점은 우리의 방식을 되살리려는 노력이 엿보였기 때문이다. 우리 전통 소리꾼을 캐스팅한 것뿐만 아니라, '아리랑'이라는 우리 민족 정체성이 고스란히 담긴 가락을 통해 무대와 객석 간의 장벽을 허물었고, 배우들이 마치 마당을 통해 객석과 호흡하고 있다는 듯한 느낌을 선사해주었다. 송수익 옆에서 아리랑을 시작하던 배우는 오케스트라를 향해 "나 첫음 쪼까 잡아줄라요?"라고 말하며, 전문성만이 가득해 범접하기 힘들었던 무대의 모습에서 탈피해, 마치 '마당'에서 가무를 즐기던 우리 선조들의 모습,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놀이의 한 마당을 재현하는 시발점을 알렸다. 더불어 커튼콜에서 앵콜곡으로 불려진 '아리랑'은 웅장하고 화려한 여느 뮤지컬들의 대표 넘버들과는 달랐다. 우리 민족이라면 누구나 부를 수 있는 가깝고 친숙한 '아리랑'을 통해 관객들까지 모두 이 노래에 참여시키는 것이 장관이었다.

   
 

대하소설 '아리랑'을 160분짜리 뮤지컬로 재현해내는 데, 고선웅 연출가가 얼마나 각고의 노력을 쏟았을지 짐작이 간다. 뮤지컬은 1부와 2부로 나눠 공연됐다. 1부에서는 극의 전개를 위해 많은 것을 '펼쳐놓는' 작업들이 이뤄졌다. 그래서일까. 극 전개를 통해 관객들이 희열을 느낄만한 서사적 요소는 거의 없었고, 사실상 지루하게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많은 인물들, 거대한 이야기들을 추리고 추려서 전개하려니 1부에서는 루즈(loose)함이 필연적일 수밖에. 역시나 반전은 2부에 있었다. 2부에서는 드디어 관객들이 기대하던 스피디한 전개와 함께 클라이막스가 함께 이뤄졌다. 특히나 인상에 남는 것은, 배우들의 마임을 통해 스피디하게 전개되던 줄거리의 표현방식이었다. '무빙워크(moving walk)'를 통해 배우가 걷거나 달리지 않아도 시공간의 흐름을 극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또한 겹겹이 나타나는 벽들은 한 무대에서 표현하기 힘든 수많은 시공간적 단절을 표현하기 위해 선택한 연출방식이었는데, 적절한 타이밍을 통해 관객의 입장에서는 활발한 무대전환이 그다지 산만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작품 넘버에는 "어떻게든"이라는 단어가 많이 나온다. "어떻게든 살아 돌아가야 할 텐데", "어떻게든 살어라!". 일제강점기 우리 조상들이 어떤 마음으로, 그 세월을 버텨왔는지에 대해 가장 소박한 단어로 표현해냈다. '어떻게든'이라는 어휘는, 딱히 문제를 타개할 구체적 방법이 없는 가운데서 반드시 희망을 가지고 이 문제를 해결해나가겠다는 모종의 의지를 상징한다. 당시 조선에는 아무런 희망도 보이지 않았다. 조국을 잃은 슬픔에 젖어들기에 앞서, 우리는 일제라는 잔인하고 강력한 폭력을 고스란히 견뎌내야 했고, 이 고통을 견뎌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잃은 조국을 찾기 위한 부단한 몸부림을 이어가야 했다. 그들의 '어떻게든' 정신은 결국 현재의 우리를 만들어주는 근간이 됐다. 빛 한 줄기 보이지 않던 어두운 땅에서, 자신도 모르게 붙잡는 희망. 언젠가는 한 줄기 빛이 발견될 것이고, 그 한 줄기로 인해 우리 땅 전체가 밝게 빛날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

   
 

뮤지컬 '아리랑'의 최고의 명장면은, 바로 수국이와 득보, 그리고 양치성의 죽음 장면이지 않을까 싶다. 여기서 우리는 '죽음'이 '희망'으로 치환됨을 발견할 수 있다. 아무리 조국을 배반해도 여전히 "너는 조국의 아들"이라고 말하던 조선. 그리고 충성을 맹세하고 온몸을 바쳐도 여전히 "너는 황국의 신민이 아니"라고 말하던 일제. 결국 양치성은 죽음의 순간, 자신의 조국이 어딘지를 비로소 깨닫는다. 그리고 그는 죽는 순간 증오하던 송수익 앞에 무릎을 꿇는다. 또한 일본 군사들과 싸우다가 죽게 되는 수국이와 득보. 득보는 "상여타고 장가 간다"라고 외친다. 인생 최고의 순간과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함께하게 된 수국이와 득보의 모습을 통해,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서야 진실을 깨닫는 양치성을 통해 관객들은 '죽음'을 끝으로만 바라보지 않는다. 상여 행렬은 곧, 민족 해방과 아름다운 사랑의 결실, 그리고 곧 도래하고 말 모든 희망을 싣고 가는 행렬이 된다. '죽음'을 이렇게도 희극적이고 행복하게 그릴 수 있는 작품이 몇이나 될까, 라고 생각해본다. 뮤지컬 '아리랑'은 수많은 비극적 순간 속에서도 우리의 아리랑을 통해 신명나는 희망의 순간을 빚어낸다.

   
 

2015년의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우리, 어느 새부턴가 다양한 '절망' 가운데서 언젠가는 도래하고 말 비극적 결말을 예상하고 있지는 않은가. '과연 희망이 있기는 한 것일까'라는 고질적 의심들은 우리 근처를 어슬렁거리는 희망들을 내쫓고 있는 결과를 내는지도 모르겠다. 여기, 조정래의 대하소설에 주목한 연출가 고선웅이 있다. 그는 소설 '아리랑', 그리고 노래 '아리랑'을 통해, 현실의 절망 속에 깊이 빠져 허우적대는 비극적인 우리네 모습을 "어떻게든" 되살려보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글] 문화뉴스 장기영 기자 key000@mhns.co.kr
[사진] 신시컴퍼니 & 문화뉴스 양미르 기자 mir@mhn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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