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치바이스, 서엽도횡피, 1948, 37.3 x 28 cm, 중국호남성박물관 ⓒ 문화뉴스 MHN 김민경 기자

[문화뉴스 MHN 김민경 기자] 예술의전당(사장 고학찬)이 10월 8일까지 서울서예박물관에서 '치바이스齊白石 - 목장(木匠)에서 거장(巨匠)까지'라는 제목으로 '치바이스齊白石' 전시회를 국내 최초로 개최한다. 

▲ 7월 31일에 열린 '치바이스齊白石 - 목장(木匠)에서 거장(巨匠)까지' 기자간담회 현장 ⓒ 문화뉴스 MHN 김민경 기자

예술의전당, 중국호남성문화청(청장 위신륑 禹新荣), 주한중국대사관(대사 추궈홍 邱国洪), 중국문화원(원장 스루이린 史瑞琳)이 공동 주최하는 이번 전시회는, 한중수교 25주년을 기념하는 특별전이다. 이번 전시회에는 '새우', '병아리와 풀벌레', '물소', '포도와 청설모', '수양버들' 등 호남성박물관 소장 치바이스 그림과 서예 전각 50점, 국내소장 작품 3점, 치바이스기념관이 소장하고 있는 생애유물 83점 등 총 136점이 국내 최초로 공개된다. 한․중 현대작가들의 치바이스 오마주 작품 40여 점도 함께 전시된다. 옌부츠, 진위명 등 중국 호남성 현대서가 11명, 권창륜, 박원규 등 한국의 전각가 10명, 사석원, 최정화 등 현대미술작가들의 오마주 작품을 통해서 치바이스가 한중은 물론 동아시아 서화미술의 21세기 정체성을 어떻게 제시하고 있는지를 볼 수 있는 자리다. 

▲ 7월 31일에 열린 '치바이스齊白石 - 목장(木匠)에서 거장(巨匠)까지' 기자간담회에서 류강 중국호남성박물관 학예실장이 발언하고 있다. ⓒ 예술의전당

7월 31일에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류강 중국호남성박물관 학예실장은 "치바이스의 작품은 사람들이 쉽게 보고 이해하기 쉬워서 젊은이들이 잘 알 수 있고, 연구가 많이 진행된다"고 밝혔다.

고학찬 사장은 "한․중수교 25주년을 맞아 한중 양국의 문화교류를 촉진하는 계기를 마련할 뿐 아니라, 중국을 대표하는 치바이스의 작품 세계를 한국 관람객에게 처음으로 선보일 수 있게 되어 감회가 남다르다."고 개최 의미를 밝혔다. 

▲ 치바이스, 산수, 1951, 중국호남성박물관 ⓒ 문화뉴스 MHN 김민경 기자

치바이스(Qi Baishi 齊白石, 1864 ~ 1957)는 '중국의 피카소'라 불리며 20세기 동아시아 미술의 최고봉으로 손꼽힌다. 치바이스는 농민화가로 시작하여 중국인민예술가 반열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시서화각(詩書畵刻) 일체의 조형언어로 '신문인화(新文人畵)'를 창출하여 중국 근현대미술을 혁신시킨 인물로 중국의 피카소로 불리는 존재다. 

▲ 치바이스, 소나무 숲, 중기, 중국호남성박물관 ⓒ 문화뉴스 MHN 김민경 기자

천문학적인 작품가격과 거장의 빛나는 명성에도 불구하고, 치바이스는 유년부터 찢어지는 가난으로 학교 교육도 제대로 못하였다. 치바이스 자신도 77세에 이르러 "가난한 집 아이가 잘 자라 어른이 되어 세상에서 출세하기란 진정 하늘에 오르는 것만큼 어렵고도 어려운 일이다"라고 고백하고 있을 정도다. 청․장년기에 이르기까지 오직 목장(木匠)․조장(彫匠)․화공(畵工)을 생업으로 삼았다. 치바이스의 예도(藝道)는 이와같이 생존수단으로 시작되었고 시와 글씨, 그림은 독학과 사교육을 통해 체득했다. 

▲ 전시전경 ⓒ 예술의전당

글공부는 친할아버지의 가학(家學)(4세)과 외할아버지의 서당 출입(8세)으로 시작하였고 시(詩)․화(畵)는 후친위안․천사오판 문하(27세)에서 본격화 됐다. '개자원화보(芥子園畵譜)'와 명대(明代)의 슈웨이(徐渭)와 명말청초의 바다산렌(Bada Shanren, 八大山人)으로 잘 알려진 주다(Zhu Da, 朱耷)와 같은 거장들을 평생 사숙하며 그림을 깨쳤다. 일생동안 오직 짓고 새기고 쓰고 그리면서 생존과 자아완성을 이룩해냈다. 이런 맥락에서 치바이스의 생애와 예술창작 궤적은 인간세상의 기적으로 통한다. 소몰이꾼, 시골 목수에서 출발하여 자신의 강인한 의지와 끊임없는 노력으로 고전과 자연을 교과서로 삼아 시서화각을 독학으로 마스터해냈다. 그 결과 '신문인화(新文人畵)'를 창출하여 중국근현미술을 혁신시킴으로써 한 세기의 모든 사람이 존경하는 거장이 됐다.

▲  치바이스, 배추와 감, 중국호남성박물관 ⓒ 문화뉴스 MHN 김민경 기자

시․서․화․각 일체의 인물이자 마스터(Master)가 치바이스다. 목장에서 출발하여 대시인이자 전각가·서가·화가로 거장의 반열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생전에 첫 번째로는 시, 두 번째로 도장, 세 번째로 자(字), 네 번째로 화(畵)라고 말한 적이 있다. 치바이스 예술에 있어 시와 서예, 그림, 전각은 한 몸 같은 존재다. 각 방면의 도리와 이치를 일맥상통하게 체계적이고도 철저하게 체득하여 실존의 세계를 고전의 변법을 통해 독자적인 필묵 언어로 표출해냈다. 그 결과 동서 문명이 충돌 교차하는 20세기 동아시아미술의 정체성을 새로운 예술경지 창출로 제시했다.

▲ 치바이스, 서락도책 중 늙은 쥐와 감과 땅콩, 1948, 35.8 x 27 cm, 중국호남성박물관(좌) / 치바이스, 서락도책 중 늙은 쥐와 당근, 1948, 35.8 x 27 cm, 중국호남성박물관(우) ⓒ 문화뉴스 MHN 김민경 기자

그는 평생 수 만 점에 이르는 예술품을 세상에 남겼을 정도로 다작이다. 그런데 주목되는 점은 대부분 작품이 최고의 격조를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흔히 목격하는 태작이 많은 다작 작가의 병폐를 찾아보기 어렵다. 천재성 이전에 노력의 결정이기 때문이다. 일상의 흔하디흔한 소재를 일생에 걸쳐 무수히 반복 묘사한 결과 대상의 본질과 미의 질서를 굵고 단순명료한 필획으로 추출해낸 것이다. 특히 꽃, 새, 풀, 벌레를 '살아있음' 그 자체의 생동감으로 표현하였다. 물고기, 새우, 게, 개구리는 마치 화선지 속에서 뛰쳐나와 헤엄쳐 다니는 착각에 들 정도다. 게다가 푸른 산과 숲, 강은 산림과 물의 기운을 그대로 필묵언어로 형상화해내었다. 그가 그린 인물화는 해학과 풍자, 유머 감각이 매우 뛰어나다. 

▲ 치바이스, 진서구언련, 1930, 중국호남성박물관 ⓒ 문화뉴스 MHN 김민경 기자

치바이스는 일상생활에서 발견되는 지극히 평범(平凡)한 소재 속에서 발견한 비범(非凡)함을  일도법(一刀法)과 일필(一筆)같은 독자적인 전각기법과 서법으로 형상화했다. 치바이스는 특히 '일도법'이라는 전각도법을 응용하여 한 칼로, 일필(一筆)로 침착통쾌(沈着痛快)하게 글씨와 그림까지 휘지하고 구사해낸다. 다시 말하면 자연과 삶의 속살을 파헤쳐 새로운 영역의 미의 질서를 추출해내고 조형언어를 개척해냈다는 점에서 중국회화의 신기원을 열었다. 이와 같이 치바이스 작품의 아름다움은 전통과 혁신이 두루 겸비된 지점에서 확인된다. 고풍스러움과 참신함, 소박함과 고고함이 공존하는 화면이 전개되고 공간 분위기가 형성된다. 이런 태도와 작풍은 치바이스의 모든 작품에서 확인할 수 있다.

▲ 치바이스, 물소, 초기, 중국호남성박물관 ⓒ 문화뉴스 MHN 김민경 기자

치바이스 예술의 아름다움은 한마디로 천진난만에 있다. 그 중에서 치바이스의 회화방면이 특히 주목되는 것은 색(色)과 필획(筆劃), 구도로 작가 자신을 가장 잘 표현해내는 조형언어를 구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치바이스 컬러'라 할 정도로 강렬한 원색의 대비, 장검을 휘두르듯 단숨에 죽죽 그어 내리는 직필(直筆)과 디테일한 묘사, 허허실실(虛虛實實)한 공간경영이 그것이다. 이와 같은 회화에서의 독창적인 행동은 예술가로서 치바이스의 담력과 패기에 근원한다. 

 

▲ 치바이스, 복숭아, 1948, 중국호남성박물관 ⓒ 문화뉴스 MHN 김민경 기자

치바이스는 청조(淸朝) 봉건사회가 망하고, 서구문명과 민주․공산․사회주의 득세와 일본제국주의 침략으로 격변하는 20세기 중국사회를 관통하면서 근 한 세기를 살았다. 그러나 치바이스는 낡은 봉건주의 관습에 얽매이거나 시세에도 영합하지 않았고, 철저하게 실존을 직시하며 정치인이나 관리들을 경계 비판하는 입장에 섰다. 시대와 사회를 생활 주변의 물상을 가지고 풍자와 우화로, 해학과 골계로 필묵으로 비틀고 녹여내며 예도 외길로 일관하였다. 치바이스는 시서화각 일체 언어로 평화사상을 그려낸 거장으로서 1956년 세계평화평의회에서 국제평화상을 받았다.

▲ 치바이스 전각 작품 전경 ⓒ 문화뉴스 MHN 김민경 기자

"나는 내 고향을 사랑하고 , 내 조국의 풍요로운 산과 강 그리고 흙을 사랑하고, 대지위의 모든 생명을 사랑하기에 한평생 평범한 중국인의 마음을 그림으로 그리고 시로 썼다. 최근 몇 년 동안 비로소 깨달았다. 내가 끊임없이 추구한 것은 다름 아닌 평화(平和)였다는 것을"

▲ 석조병풍, 1880년대, 상담시제백석기념관 ⓒ 문화뉴스 MHN 김민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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