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읽어주는 남자 #003 - 한준희 감독의 '차이나타운'

   
 
[문화가 있는 날·예술이 있는 삶을 빛냅니다…문화뉴스] 처음 영화의 제목을 들었을 땐 리메이크 작품인 줄 알았습니다. 로만 폴만스키의 '차이나타운'과 어떤 연관이 있을 것만 같았는데, 영화를 다 본 지금 생각해보면 '차이나타운'이라는 제목이 한준희 감독의 이 영화에 참 잘 어울립니다. 인천 차이나타운이라는 지역의 색채가 짙게 배어있고, 그 속에 있을 법한 힘의 역학관계도 그려져 있거든요. 사실, 누아르라는 장르로 봤을 때, '차이나타운'은 한국에서 볼 수 있는 새로운 종류의 영화는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 영화는 한국 영화사에 있어 중요한 분기점 위에 위치할 것으로 기대합니다. 이 글은 '차이나타운'을 가족, 면(noodle), 그리고 여성 누아르 라는 세 가지 키워드로 풀어본 파편적인 글입니다.

Part1. 가족

(1) '쓸모없음'에서 발견한 가족주의

"쓸모없으면 버린다." 마우희(김혜수)가 아이들에게 끊임없이 각인시키는 말입니다. 모든 아이는 그녀를 엄마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그녀에게 아이들은 모성으로서 끌어안을 존재가 아닌, 자신에게 필요한 도구적 존재에 불과해 보입니다. 그녀 밑에서 아이들은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일을 하고, 돈을 벌어 인정받으려 하죠. 그렇다면 마우희는 쓸모가 있는 아이들을 정말 인정했을까요?

인간이 도구를 인정하고 칭찬하는 경우는 무척 드물죠. 드라이버, 망치 등의 도구를 사용하고서 그들에게 고마움을 느낀다는 것은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상당히 동화적인 상황으로 보일 것입니다. 그 도구들은 그냥 그 자리에 있어야 할 것이고, 없으면 불편하고 짜증 나며, 제 몫을 하지 못한다면 버려야 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여기서 잠깐. 일영(김고은)이라는 이름을 이진법으로 접근해보면 흥미로운 가정을 해볼 수가 있습니다. 컴퓨터에서 전기적 신호는 0과 1로 나타내며 0은 '없음'을 1은 '있음'을 뜻하게 되죠. 이를 '차이나타운'의 일영에게 대입해보면 그녀의 이름은 '있음, 없음'이 되는데요. 도구로서 가치가 있다면 존재할 수 있고, 쓸모없으면 사라져야 하는 그녀의 극단적인 운명이 이름에 새겨진 것이 아니었을까요. 그냥 존재할 수는 없는 인물, 매 순간 가치를 증명해야 하는 삶. 물론, 이는 제멋대로 풀어본 사주풀이였으니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일영은 마우희의 세계관에 균열을 일으키는 도구입니다. 일영은 한 남자 때문에 문제를 만들고, 쓸모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지 못함에도 마우희가 버리고 싶지 않은 존재였죠. 마우희는 일영이 잘하지도 않고, 잘하려고도 하지 않아서 함께한다는 말을 합니다. 마우희의 보관함에 들어있는 고장 난 도구 일영. 일영 외에도 마우희와 함께 식탁에 앉아 밥을 먹는 아이들 우곤(엄태구), 홍주(조현철), 쏭(이수경) 역시 도구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는 것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홍주는 명령을 잘 따르는 인물이었지만, 정신적 문제를 가지고 있죠. 그래서 그는 주인에게 문제를 가져올 수 있는 도구입니다. 그를 관리하고 통제하는 리스크가 큼에도 마우희는 그를 데리고 있죠)

왜 마우희는 이용하기 까다로운 도구들을 보관하고, 심지어 함께 식탁을 공유하고 있을까요. 이 괴상한 구성원들의 조합을 이해하려면 가족의 의미에 대해 생각할 수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가족은 필요 때문에 구성원을 결정하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최적화된 집단이 아닙니다. (오히려 가끔은 인생에 문제를 던져줄 수도 있는 집단입니다) 가족은 도구적으로는 쓸모없음에도 함께 앉아 밥을 먹고 살을 맞대고 사는 집단이죠. 그들은 도구보다 이용가치가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도구가 충족시킬 수 없는 것들을 채워줄 수 있죠. 마우희에게 일영을 비롯해 함께 사는 아이들은 도구가 아닌 가족이었을 것입니다. 그녀에게 그들이 어떤 의미였는지, 무엇을 채워주고 있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녀는 분명 그들과 함께 밥을 먹고 싶어 하죠. (함께 살며 끼니를 같이하는 사람이란 뜻을 가진 '식구'라는 단어를 생각하게도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마우희의 쓸모없는 도구들을 보여준 '차이나타운'을 가족주의 영화로 읽을 수는 있지 않을까요.

(2) 하나의 왕좌 - 가족주의적 해석에 대한 반발

앞서 식탁에 모여 밥을 먹는 존재들에 초점을 맞춰 '차이나타운'을 가족주의적 영화로 읽었지만 이와 다르게 읽을 수도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힘과 권력입니다. 영화 속 차이나타운은 생존을 위해 자신이 필요하다는 것을 증명해야 하는 동물의 왕국처럼 보일 정도니까요. 그 속에서 여성으로서 왕좌에 앉아있는 마우희가 일영을 자신의 딸로 받아들이는 것은(가족, 모성 등으로 읽을 수도 있겠지만) 자신의 세계를 후계자에게 물려주는 대관식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마우희는 긴 시간 동안 그녀를 훈련했고, 그녀가 험난한 차이나타운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성장하게 했죠. 마우희가 자신이 더는 쓸모없다고 하는 대사를 던지는 것은 일영이 이 세계에서 홀로 살아갈 수 있을 만큼 성장했다는 신호이며, 왕좌를 비워줄 때가 되었음을 공표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차이나타운(1)

일영이 석현(박보검)을 만나면서 여려지고 여성으로서의 감정을 느끼려고 할 때, 마우희는 석현을 죽입니다. 마우희는 일영이 감정적으로 흔들리는 것을 절대 용납하지 않았죠. 그녀는 차이나타운의 왕좌가 여성으로서, 혹은 감성을 가진 채로는 오를 수 없는 냉정한 자리임을 석현의 피를 통해 알려줍니다. 다음으로 생각해 볼 것은 마우희의 죽음입니다. 일영은 마우희가 자신을 죽이려 했다고 생각하지만, 이는 분명 오해였죠. 심지어 마우희는 일영을 입양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마우희는 최후의 순간까지 해명하지 않고, 오해의 매듭을 풀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일영의 칼이 자신의 몸에 꽂힐 때, 힘을 빼지 마라며 자기 죽음을 재촉하죠. 영화 전반부에 마우희 자신도 과거에 '엄마'를 죽이는 과정을 통과했음을 고백했었는데, 그래서 이 장면은 그 과정의 반복이 아닐까 생각하게 합니다. 그래서 왕좌를 물려주는 대관식처럼 보이죠. 이 과정을 거친 뒤, 일영에겐 가족이 단 한 명도 남지 않고, 다시는 가족이란 정 때문에 흔들릴 일도 없어졌습니다. 냉정한 리더가 될 일만 남은 것 같네요.

'차이나타운'을 본 직후엔 이 영화를 통해 감독이 오해가 불러온 비극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발전해 과거 마우희가 자신의 어머니에게 가졌던 죄의식을 제 죽음으로 갚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죠. 그 외에도 이 영화를 마우희가 일영에게 가지는 특수한 모성에 대한 이야기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차이나타운이라는 험난한 지역, 그리고 일영이 속한 세계를 바탕으로 그녀의 존재를 바라보고 있는 지금, 이 영화는 살벌한 왕좌를 물려받은 공주의 이야기처럼 보입니다.

Part.2 파스타의 세계를 동경한 짜장면

'차이나타운'에는 두 가지 면이 등장합니다. 하나는 마우희의 식탁 위에 놓인 짜장면이고, 다른 하나는 석현이 만드는 파스타죠. 같은 면이지만 이 영화에는 일영과 일영 밖의 두 세계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기호로 사용되죠. 우선, 일영의 세계에 있는 짜장면은 생존을 위한 식량입니다. 영화에선 짜장면을 만드는 과정을 보여주지 않으며, 마우희의 가족들은 짜장면으로 매 끼니를 해결하고 있습니다. (조리과정이 생략되었다는 점은 뒤에 나올 파스타와 대비됩니다) 그들에게 짜장면은 굶주림을 채워주는 도구죠. 영화에서 일영이 처음 짜장면을 먹을 때 했던 말이 '곱빼기'였던 점도 재미있습니다. 이는 짜장면이라는 것은 '양'이 중요하며, 거대한 허기까지 채워주는 용도로 소모되었음을 알게 합니다. (파스타 곱빼기라는 말은 잘 하지 않죠)

   
 

이와 비교했을 때, 석현의 파스타는 허기를 채워주는 식량 이상의 역할을 합니다. 우선 그가 요리사가 되려고 한 계기에서 파스타라는 면에 대한 의미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그는 천 원짜리 음식을 먹으며 눈물을 흘렸다고 고백하죠. 맛이 있어서가 아니라, 고작 천 원짜리 맛에 매달리는 자신의 모습이 슬펐다고 합니다. 이 대사를 통해 '파스타'는 허기 이상을 해결해주는 음식이며 한 남자의 한을 풀어주는 요리였다는 것을 읽을 수 있습니다. 살아남기 위해서가 아니라 미각에서 느낄 수 있는 행복을 맛보기 위해 석현이 선택한 음식이 파스타였던 것입니다.

짜장면이 항상 조리과정이 끝난 상태로 등장하는 것과 달리 파스타는 조리과정을 보여준다는 점도 재미있죠. 석현이 파스타를 만드는 과정에서 보여주는 시각적 즐거움과 화려함이 짜장면에는 생략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보여주기의 차이가 두 면이 삶을 대하는 방식의 차이가 아니었을까요. 생존을 위해 먹는 음식인 짜장면, 생존의 절박함이 아닌 그 이상을 꿈꿀 수 있는 음식으로서의 파스타.

일영은 파스타의 세계에 사는 석현에게 관심을 가집니다. 파스타의 맛을 본 뒤, 이전엔 하지 않던 저항의 몸짓을 보이죠. '엄마'의 말을 거역하면서까지 그녀는 생전 처음 맛본 파스타의 세계를 지키려 했습니다. 그것이 사랑의 감정인지, 생존 이상의 것을 바라는 소녀의 성장인지, 짜장면에 파묻힌 '차이나타운' 이외의 세계를 향한 동경인지는 명확히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어떤 것을 원했든 결과는 같습니다. 마우희는 파스타를 베어버리죠. 그 행동엔 이런 메시지가 있지 않았을까요. '파스타는 네게 사치야. 살 걱정부터 해'

   
 

Part3. 여성 누아르 - 한국 영화의 분기점이 될 수 있는 이유

누군가는 이 영화를 본 뒤에 새롭지 못하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대부' 등의 고전을 비롯해 수많은 필름 누아르들과 비교했을 때 크게 새로운 점이 없지 않으냐고 평할 수도 있고요. 물론, 한국 영화 안에서도 이런 장르의 작품이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닙니다. 그래도 저는 과감히 이 영화를 한국 영화의 계보에서 중요한 분기점에 위치할 작품이라고 말하려 합니다.

한국 영화에서 누아르 장르의 주인공은 대게 남자였습니다. '조폭 마누라' 정도가 여성 보스라는 캐릭터를 보여줬을 정도죠. 범죄 물의 제작이 증가하면서 여배우가 설 자리가 없어졌고, 최근엔 20대 여배우 기근이라는 이야기도 심심찮게 들을 수 있습니다. 박보영, 심은경 등의 좋은 배우들이 있지만, 그녀들이 지금 걷는 길이 과거의 20대 여배우들만큼의 힘이 있을지는 확신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런 점에서 '차이나타운'은 한국에서 여성 배우의 역할을 확장한 인상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누아르 장르의 주인공이라는 설정 외에도 이처럼 두 여성 주인공에게 무게가 온전히 실려 있는 영화도 드물었습니다. 한국영화에는 '여고괴담' 시리즈 외에 기억에 남는 여성들의 이야기가 딱히 없습니다. 이런 미지의 영역에 김혜수와 김고은이라는 두 여배우가 발을 내디딘 것입니다. 단순히 성 역할이 바뀐 것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것만으로도 누아르라는 장르의 느낌 자체가 달라졌습니다. 그리고 누군가는 이 영화를 통해 여성만이 가진 '모성'이라는 신화에 대해 다양한 질문을 던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특히, 이 영화에서 김혜수는 건강한 몸을 가진 여배우로서의 기존 이미지를 전혀 가져오지 않았으며, 성적으로 어필을 하는 돌출적인 장면도 없습니다. 김고은 역시 '은교'라는 작품에서의 노출이라는 잔상을 전혀 가져오지 않죠. 이 두 여배우는 이번 영화에서 여성의 육체를 과시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여성성이라는 점도 크게 부각하지 않았죠. '차이나타운'은 여성의 성적 매력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내러티브와 장르적 세공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인 여성의 영화가 만들어질 수 있음을 보여줬습니다. 흥행 여부와는 별개로('어벤져스2'와 맞붙었기 때문에 엄청난 흥행을 기대하기는 어려웠습니다) '차이나타운'은 여배우의 활동 영역을 확장했고, 한국 영화의 장르적 외연도 넓혔습니다. 이를 기점으로 한국 영화에서 다양한 주인공의 다양한 이야기를 볼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차이나타운'은 한준희 감독의 첫 번째 상업영화입니다. 그의 첫걸음에서 김지운 감독이 보여준 '달콤한 인생'의 느낌이 살짝 묻어있는 듯했습니다. 그리고 마우희에게서 죄의식이라는 것을 연상하게 한다는 점에서 박찬욱 감독도 머릿속을 잠시 스쳐 가네요. ('차이나타운'에서 목에서 피가 뿜어져 나오는 장면은 '복수는 나의 것'의 그것과 닮았죠) 멋대로 그의 영화에서 대감독들의 인장을 연상했네요. 그만큼 한준희 감독이 늘 읽어보고 싶은 영화를 만들어 주는 감독이 되기를 바라고 있나 봅니다.

   
[글] 아띠에터 강해인 starskylight@mhns.co.kr 영화를 보고, 읽고, 해독하며 글을 씁니다. 좋은 영화는 많은 독자를 가진 영화라 믿고, 오늘도 영화를 읽습니다. 영화리뷰 웹진 '무빗무빗'의 에디터. (movitmovit.co.kr)

주요기사

 
저작권자 © 문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