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팔 방송작가의 해남에서 김지하 시인과의 6박 7일

 
[글] 아티스트에디터 박정기(한국희곡창작워크숍 대표). 한국을 대표하는 관록의 공연평론가이자 극작가·연출가. pjg5134@mhns.co.kr

[문화뉴스 아띠에터 박정기] 1985년 김기팔 작가에게서 전화가 왔다. 김지하 시인이 출감되어 해남에 자리를 잡았다며 같이 가보자는 전화였다. 날짜를 정해 가기로 약속을 하고, 김기팔 작가는 김지하 시인이 출소 후 심기를 가라앉힌다며 서예와 사군자에 심신을 기울이고 있으니, 인사동에를 가서 벼루와 다기를 사다가 선물로 주자고 했다.

우리는 떠나는 날 물건을 구입하고는 곧바로 고속터미널에서 해남으로 향하는 버스를 타고 떠났다. 몇 시간 후 잠자는 나를 깨운 김 작가는 영암 월출산을 창밖으로 가리키며 보라고 했다. 월출산은 봉우리마다 마치 바람에 휘어진 듯싶은 바위덩이로 이루어져 있었다. 처음 보는 독특한 풍경이었다. 그러면서 독립 운동가이자 이 지역 국회의원인 낭산(朗山) 김준연(金俊淵, 1895∼1971) 국회의원에 관해 들려주었다.

해남에 도착해 김지하 시인이 살고 있다는 천 씨라는 아전출신 집을 찾으니 사람들이 금방 길을 알려주었다. 우리는 그 집에 도착해 김지하 시인의 환대를 받았다. 김 시인은 말끔한 모습에 건강한 편이었고, 집안으로 안내했다. 옛 아전 집 사랑채라는데 웬만한 주택 정원보다도 큰 마당에 쩍 벌어진 기와집 사랑채였다. 긴 마루에 앉도록 권하더니, 우리보다 먼저 방문한 인사가 있다며 그들을 소개를 시켜주었다.

전남대 교수 출신으로 광주 지역의 대표적 재야 민주인사인 명노근(1932~2000) 한국YMCA 전국연맹 이사장과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를 창설하여 초대 공동의장을 맡았던 소설가 송기숙(1936~), 정치학자 출신으로 후에 국회의원이 된 이수인(1941~2000) 등 세 사람이었다. 모두들 김기팔 작가를 TV드라마를 통해 알고 있었고, 무척 반가워했다. 필자도 3인을 처음 대하고 민주투사라는 명성으로 해서 강인하고 날카로운 모습인줄 알았는데, 온화한 모습에 다정다감한 말씨, 그리고 풍부한 유머감각으로 해서 금세 가까워질 수가 있었다.

3인이 먼저 이 집에 방을 정했기에 김기팔 작가와 나는 천 씨 집이 아닌 해남의 한 여관에 묵기로 했다. 6박 7일을 묵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이들이 모두 음주를 좋아해, 아침부터 저녁까지 만나면 대화를 술로 시작해서 밤에 잠이 들 때가지 술을 계속 들고는 했다.

마침 그 무렵에 완도연륙교가 해남과 연결되어 수영선수 조오련의 코치였다는 김 씨 성을 가진 청년이 직접 완도를 안내했고, 강진의 다산초당도 방문하고, 해남 대둔산의 초의선사가 있었다는 일지 암을 방문하기도 했다. 김기팔 작가는 김지하 시인에게 연금되어 있을 때 고문을 당했느냐고 물으니, 김 시인은 교도관들이 내가 쓴 "오적"이라는 시를 다들 읽고 좋아하는 눈치였다며 그래서 그런지 전혀 고문을 당한 일이 없노라고 대답을 해 모두들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6박 7일은 금방 지나갔고, 김 시인과 헤어져 돌아오면서, 김 기팔 작가는 김지하 시인의 손을 붙들고 죽지 말고 오래오래 건강하게 살라고 당부를 하며 돌아왔는데 그런 김기팔 작가는 1991년 55세의 나이로 요절을 해, 1년 뒤에 방송인과 친지들이 장곡 통일공원에 기념비와 기념상을 건립했고, 그간 원주 토지문학관으로 이사를 한 김지하 시인은 대저택에서 현재까지 건강하게 살고 있다. 바로 30년 전의 회고담을 김지하 시인은 "모로 누운 돌부처"라는 자서전에 수록해 남겼다.

2010년 10월 16일 서울대학교 관악캠퍼스 멀티미디어 강의동에서 거행된 한국언론학회 제 50차 정기총회에서고 김기팔(金起八) 방송작가 에게 "한국 미디어 발전 공헌상"을 수여했다.

고 김기팔(본명 김용남) 선생은 1937년 7월 13일 평양출생으로 서울대학교 문리대 재학시절 KBS 대학생극 경연대회에 참가하여 <산울림 이야기>로 1등을 차지하고, 1960년 KBS 라디오 연속극 현상공모에 <해바라기 가족>으로 당선되어 방송계에 등단했다.

1963년에 개국한 동아방송에서 1968년 <한국찬가> 1970년 <정계야화> 같은 다큐멘터리 드라마를 집필해 왕성한 작품 활동을 벌였고, TBC-TV에서는 연속극 <춘하추동>으로 많은 시청률을 올렸으며, 1969년 MBC-TV의 개국 드라마 <사랑과 슬픔의 강>을 집필하고 1980년대에 이르러 정치드라마 <제1공화국>을 비롯하여 <야망의 25시> <아버지와 아들> <억새풀>등의 연속극과 1990년대에 집필한 <땅>에 이르기까지 정치적으로 암울했던 시절 방송극에 민주와 정의를 방송극의 주제와 내용으로 한 드라마를 씀으로써 민주화의 한줄기 불빛이 되어 이 땅을 밝히고, 철학과 의식이 분명한 방송작가로서의 활동을 벌이다 1991년 12월 24일 55세의 나이로 요절한 불세출의 방송작가다.

특히 <춘하추동>과 <사랑과 슬픔의 강>은 필자가 탤런트로 활동을 하던 시절 주인공으로 출연한 작품이기에 감회가 깊다.

2010년 10월 16일 한국언론학회 미디어발전 공헌상 시상식장에 최현철 한국언론학회 회장, 오연천 서울대학교 총장, 극단신협대표이며 연출가 전세권, 극작가 조성현이 필자와 함께 자리해 수상을 축하했다.

 

1992년 김기팔 작가의 추모비를 시인 김지하의 비문과 조각가 심정수의 제작으로 고양시 장곡동 통일공원에 건립했는데, 고 김기팔 작가를 대신해서 수상한 필자가 답사에서 낭송한 비문의 추모시를 소개한다.

밤새 뜬 눈으로 지새다가 신 새벽에 돌아가셨다
밤새 사악한 무리를 질타하고 한 품은 이들을 달래시던 님은
민주와 통일의 먼동이 틀 무렵 기어이 돌아가셨다
그리던 북녘고향 저만큼 보이는 곳에서 님이여
아직도 걷히지 않는 어둠을 지켜 다가올 대낮으로 증거 하시라.

故 김기팔 선생의 <한국언론학회 미디어발전 공헌상> 수상을 축하하며

후배 박정기(朴精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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