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뉴스 MHN 박리디아 부사장] ▶ [박리디아가 만나는 대한민국 최고예술가 100] 28. 모델 김동수 "패션모델도 '예술가' 맞다" ① 에서 이어집니다.

1980년대 미국, 유럽 활동을 이야기해 달라.
ㄴ 대학생 무렵 모델이 되겠다고 했을 때, 우리 집에서도 "네가 무슨 모델이 돼. 모델은 예뻐야 하잖아. 모델은 돈도 많이 못 벌잖아"라는 말이 나왔다. 언어도 잘 안 되고, 영어도 버벅거리는 상황이었다. 심지어 우리 언니가 패션 디자이너 학교를 미국에서 장학생으로 다닐 때였는데, 언니가 "세계 7대 불가사의에 하나를 추가해서, 너를 넣자"라고 할 정도였다. (웃음) 한 번 우연히 모델 콘테스트를 LA에서 나가게 됐다. '졸지에' 3등이 되어서 깜짝 놀랐다. 부상으로 1등이 가야 하는데, 이상하게 1등과 2등을 젖히고 기획사가 나를 데리고 프랑스 파리로 갔다.

그때만 하더라도 모델은 철저한 상품인데, 프랑스 파리에 가서 쇼했다. 그들이 나를 바라봤을 때, "너처럼 아름다운 여자는 처음 봤다"는 것이다. 미의 기준이 달랐다. 광대뼈가 많이 나오고, 턱선이 강하고, 목이 길고, 새까만 머리를 보며 그들이 생각하는 동양인의 기준에 맞아떨어진 것이었다. 내가 영어, 프랑스어도 못하는 상황인데도 내가 하고자 하는 적극성을 본 것 같았다. 그러한 저 사람들이 나를 모델로 바라보는 특별함이 있는지를 3년 걸려 알게 됐다.

옷을 입고 잘한다는 찬사를 받으며, 서서히 나를 인정하게 됐다. 그런 사람이 한국에 오니 너무나 놀랐다. 당시 톱 모델이 167cm인데 내가 175cm였다. 바로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 1988년 서울올림픽이 있고, 1989년 해외여행 자율화가 되는 세계화의 초석이 된 시기였으니 나는 정말 극과 극을 오간 것이었다. 내가 나를 인정하기 시작했고, 나로 인해서 변화를 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땐 정말 미쳤고, 그것만 생각하고 행복했다. '김동수, 너는 모델을 위해 태어난 사람이야'라는 마인드 컨트롤을 했었다.

▲ 미국 활동 당시의 김동수 모델 ⓒ 김동수

20대 중반은 정말 찬란했다. (웃음) 서양인들이 직업인으로 모델을 존중하는 거 인정해줘야 한다. 그러나 또 하나 배운 것이 있다. 그 사람들이 처음에는 나약하게 "똥수, 똥수" 이러면서, 내가 가르쳐줄게 하면서 '빅 브라더'처럼 있다가 딱 치고 올라가는 순간에 강력한 견제가 들어갔다.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인데, 무대 뒤에서 연출하는데 동선이 틀렸다고 당당히 연출가 앞에서 모델들이 "진로를 방해했다"라고 말을 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그건 아닌데'라고 수긍하다가, '어, 이거 봐라. 이제 작전으로 들어오는구나. 나를 보호해야겠다'라는 생각으로 바로 옷을 갈아입으면서 대꾸를 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견제를 넘어선 순간에 존중을 해주는 것을 배웠다. 당시 나는 슈퍼모델은 아니었고, 워킹클래스모델로 순수하게 모델 일만 해서 1년 먹고 살 수 있게 살았다. 더 벌 수 있으면 좋겠지만, 쾌적했다. 동양인의 한계도 있었다. 철저하게 백인 위주의 사회였다. 인종차별이라기보다는 마케팅이 백인 위주로 돌아간 시기였다.

이탈리아에서 황홀한 시간을 보낸 적도 있다. 일단 사람들이 멋있고, 점심을 먹으면서 바로 "오늘 저녁에는 우리 어디 가서 뭘 먹을까? 너는 어떤 옷을 입을래?"라는 이야기를 한다. 어떻게 보면 먹고 사는 것보다 중요한 이야기는 없었다. (웃음) 그리고 주말만 되면 별장에 가자는 제안을 받았다. 고성 같은 별장에서 바비큐 파티를 하고, 춤을 추더라도 20대 중후반 사람들이 왈츠나 차차차를 췄다. 알고 봤더니 클래스가 높았던 사람들이었다.

▲ 1980년대 이탈리아 활동 당시의 김동수 모델 ⓒ 김동수

그런 곳에서 언어는 부족하더라도 모델로 대우받았다. 이루 말할 수 없는 특별한 경험이었다. 나중에는 갑자기 한국의 가을 하늘이 너무 보고 싶을 때도 있었다. 아무튼, 방랑자처럼 트렁크만 들고 미국,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몬테카를로, 스위스, 스페인 등을 기차 타고 다니던, 좋은 친구들도 사귀었던 정말 찬란했던 시절이었다. (웃음)

유럽에서 모델 생활을 하면서 힘들었던 점은?
ㄴ 힘들어도 힘들지 몰랐고 즐거웠을 때였다. 힘들었던 것은 생존의 문제였다. 오늘 사진 촬영이나 패션쇼를 할 때, 다음 일정이 한 달 뒤에나 있는 경우가 있었다. "아, 다음 달 방값을 어떻게 내지"라는 생각을 할 때, 또 일이 들어오기도 했다. 그러니까 한 달 한 달 살아가는 인생인데, 아르바이트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톱 모델이 되고 싶은 사람이니, 내 관리를 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언제든지 준비가 되어야 하는 상황인데, 그게 나만 겪는 게 아닌 프리랜서의 숙명이기도 하다. 그나마 미국 에이전시들은 정확히 전주에 일한 것을 1주일 후에 계산을 딱 해줬었다.

그리고 어려웠던 점을 말한다면, 이탈리아에서 명품 패션쇼를 하는데 5월이면 축제가 많다. 패션쇼 중 발레, 오페라 갈라가 쭉 있다. 중간에 잠깐 모델들이 빠져달라고 해서, 패션쇼가 완전히 끝나는 줄 알았다. 오페라, 발레 갈라 준비하기 위해 잠시 빠진 것이었는데 그것도 모르고 짐을 싸서 로마로 가버렸다. 다음날 에이전시가 전화로 "킴, 어떻게 된 거냐. 모델이 중간에 가버렸다"라고 말했다. 황당했고, 그런 일은 처음이어서, 결국 모델 개런티 반만 받았다. (웃음) 그런 기가 막힐 일도 있었다.

 

모델에 대한 인식이 워낙 아름다움의 기준이고 최고라는 대우를 해주니 고급 파티가 열리면, 파티의 꽃으로 초대받은 후 오셔서 감사하다고 개런티를 더 주기도 하신다. 그런 경험을 20대 중반에 하다 보니, 아주 새로웠다. 그런데 중심을 잡아야 하는 것이 있었다. 그렇게 되다 보면 유혹도 많다. 당연하게 선남·선녀가 있고, 국제적 문화예술인이 모이기 때문이다.

내가 '한국인'이기 때문에, "한국이 어디에 있나? 전쟁한 나라 아니었나? 북한 아닌가? 중국 옆에 있는 나라인가?" 등 질문을 들으면서 애국심이 생겼다. 당시 스위스에는 북한 사람을 나타내는 '붉은 배지'도 달고 있는 사람이 꽤 많아서, 긴장감이 들기도 했다. 나는 '동수'라는 이름을 끝까지 바꾸지 않았다. "제발 좀 단순하게 불러달라"고 하지만, "나는 안 된다"라고 고집을 부렸다. (웃음)

언어보다 어려웠던 점이 많았다. 한강에 돛단배만 봐도 낭만 있어서 좋았던 시절인데, 솔직히 자가용 비행기, 요트를 타고 다니면서 파티를 하는 사람들을 보면 신기했다. 지금이라면 아니겠지만, 처음 타본 파리의 지하철 노선이 엄청 많아서 어려웠다. 딱딱한 바게트도 입천장을 쿡쿡 찔렀는데, 한 달 지나니 너무 맛있었다. 그런 적응 과정은 지금이나 그때나 누구나 겪을 것이다. 외롭고 힘들어도 울지도 못했다. 울면 쓰러지고, 쓰러지면 아무도 나를 보호해 줄 사람이 없고, 믿을 것은 나 하나뿐이었다.

▶ [박리디아가 만나는 대한민국 최고예술가 100] 28. 모델 김동수 "모델과가 워킹만 배운다고요?" ③ 에서 계속됩니다.

golydia@mhns.co.kr 정리·사진ⓒ문화뉴스 MHN 양미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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