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오의 문화심리학] 사라진 그녀가 괴물이 된 것은 누구의 잘못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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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없이 행복하고 완벽해보였던 부부 '닉'과 '에이미'. 하지만 에이미는 그들의 결혼기념일에 사라져 버리고, 그녀 스스로 가출한 것인지, 혹은 누군가에게 납치나 죽임을 당해 실종된 것인지조차 불분명한 상황이 된다. 어쩌면 이들 부부가 마냥 행복했던 것만은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미심쩍인 분위기가 이따금 풍겨나는 가운데, 과연 진실이 무엇인지 궁금한 관객은 꽤 호흡이 긴 이 영화의 흐름을 놓치지 않고 따라가게 된다. 재미있는 것은 이 상황에 대해, 극중에서 '정말 진실이 무엇인지'는 그리 중요치 않다는 데 있다. 에이미가 사라진 상황에서 미디어는 각자의 입맛과 관심거리에 맞게 흥밋거리들을 버무려 자극적으로 내놓고, 심지어는 그녀 주변의 인물들조차 에이미의 안위보다는 자신들이 대중에게 어떻게 비칠 지에 더 신경 쓰는 모습을 보인다.

   
미디어의 마녀 사냥. 진실이 무엇인지는 중요치 않다.

연예인의 폭력 사건은 대중의 큰 주목을 받는 이슈이고, 특히 그 폭력의 대상이 그들의 연인이나 배우자였다고 한다면 더 커다란 관심을 받을 수밖에 없다. 얼마 전 큰 이슈가 되었던 몇몇 연예인들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엄청난 관심을 가지며 상대 여성을 폭행했다는 그들을 비난했다. 우리에게 전달된 그들의 모습은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한편으로는 미디어가 전달하는 일방향적인 내용만으로 우리가 진실에 가까워지기 어렵다는 데 그 위험성이 있다. 다시 말해, 우리가 듣고 보는 것은, 진실을 전하기 위한 것이라 할지언정 어떤 의도를 가지고 전달한 누군가의 이야기를, 또한 어떠한 의도를 가지고 재구성해 대중에게 전달한 미디어의 입을 통해서이라는 이야기이다. 이렇게 '필터링'되는 과정 속에서 진실이 무엇인지는 점차 희미해지고, 무엇이 좀 더 대중의 귀를 자극할 수 있고, 이야깃거리가 되며, 처벌받을 누군가를 명확히 하는가에 초점이 맞춰지게 된다.

영화 '나를 찾아줘'가 짚어내는 것은 바로 그 지점이다. 전 국민 혹은 전 세계에 '죽어도 마땅한 나쁜 놈'이라고 비치는 그의 모습은, 어쩌면 어떠한 연유로든 그에게서 벗어나고자 하는 여자로 인해 만들어진 이미지인지도 모른다는 것.

닉은 정말 에이미를 사랑하지 않았을까? 어쩌면 그저 그는 지극히 평범하고, 이기적이며, 때로 한심해지고, 다만 자신을 돌아볼 줄 모르는 뻔뻔한 남자였을 뿐이다. 그렇게 본다면, 아내를 죽인 살인범으로 몰려 죽음에 처할지도 모르는 위기에 당면한 그가 조금은 안쓰러워지고, '죽음으로 갚아야 할만큼의 죄를 지은 것은 아니지 않나' 싶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관계'라는 것의 잔임함이 바로 그 지점에 있다. 그 어떤 잘못보다도 상대에게 상처를 주고 그를 망가뜨릴 수 있지만, 사실 그에 대한 책임을 물을 방법은 그리 많지 않다. 인간이어서 변했고, 마음이 달라졌고, 한눈을 팔았다는데 그게 죽을 죄는 아니지 않냐고 묻는 사회에게, 그로 인해 자신의 세상 전부를 잃었다고 여겨지는 한 여자는 '내가 나서 직접 그를 벌하겠다, 내가 상처받은 그만큼'이라고 답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이처럼 닉이 안쓰럽다가도 그를 이런 곤경에 빠뜨린 에이미가 이내 이해되고 불쌍해지기도 해, 닉이 '죽어도 싼 남자'로 여겨지는 게 바로 이 영화의 관전 포인트이다.

   
 

물론 극중 에이미는 정상에서 많이 벗어난 캐릭터를 보여준다. 결혼 후 변했고, 직업을 잃고 실의에 빠져, 어린 여자와의 외도를 통해서라도 자신의 존재감을 인정받으려 했던 남편에게 '아내를 죽인 남자'라는 낙인을 찍어 죽음으로 몰려고 했던 그녀. 이후 다시금 변해가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닉에게 다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에, 잠시 이용했던 남자를 죽이고 돌아와 피해지안 양 연기하는 그녀는 지독할 만큼 병리적인 성격의 소유자이다. 하지만, 그녀가 처음부터 그런 괴물이었을까? 홀로 그렇게 되었을까? 그녀를 그렇게 만들었던 건 누구였을까?

실존하는 자신들의 딸을 완벽한 동화 속의 주인공으로 그려내어, 성장하는 내내 가상의 인물과 스스로를 비교하며 좌절하고 그에 조금이라도 가까워지기 위해 고군분투하게 하였던 그녀의 부모. 처음 사랑에 빠지고 청혼을 했을 때의 약속과는 다르게, 그녀를 있는 듯 없는 듯한 존재로 취급하며 인생의 중요한 결정들을 독단적으로 내려버렸고, 그녀에게 애정은커녕 일말의 관심이나 배려를 쏟지 않은 채, 이제 겨우 스무살을 넘긴 자신의 어린 학생과 별 죄책감도 없이 관계를 가진, 자신의 열등감을 되려 힘으로 드러내며 폭력을 행사함으로써 에이미로 하여금 그는 언젠가 자신을 죽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게 한 그녀의 남편. 이들이 아니었다면 에이미는 이렇게까지 괴물로 변해버리지 않았을지 모른다.

물론 에이미가 강박에 가까운 완벽주의 성향을 지녔고, 타인을 조종하기 위해 죄책감 없이 거짓말을 일삼거나 주변인들을 이용하고, 살인도 서슴지 않는 반사회적인 성격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녀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었다. 닉과의 관계에서 좌절하고 관계뿐 아니라 스스로까지 모든 것을 놓아버린 에이미는 마치 닉과 처음 만나고 자신이 보였던 모습들이 모두 그가 좋아할 만한 것이라 계산된 것이었고, 그는 그 모습을 좋아했을 뿐이며, 원래부터 자신은 원하는 것도 감정도 없는 존재인 양 생각하지만, 그것은 어쩌면 더없이 불행해진 스스로의 모습을 합리화하는 그녀의 노력이라고도 볼 수 있다.

   
 

정신질환의 발병은 어느 한가지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타고난 기질, 성장 과정에서의 양육 그리고 환경의 영향, 개인의 취약함을 자극하는 환경적인 요인과의 상호작용으로 발생한다. 그래서 어느 누구 하나만을 탓해야 할 일이 아니고, 어느 한 부분을 바로잡는다고 해서 바로 해결되기는 어려운 문제이지만, 그렇기에 문제의 시작점이 되었던 여러 지점을 알고, 각 지점에서 조금씩의 변화를 꾀하는 것이 달라지는 시작이 될 수 있다.

누가 등 떠민 것이 아닌, 서로에 대한 관심과 애정으로 시작되어 세상 그 누구보다도 가까운 사이가 되었던 두 사람이 서로를 괴물로 만들어 버리는 존재가 되는 것만큼 애석한 일이 있을까. 그런 비극을 초래하지 않기 위해 필요한 것은 결국 끊임없이 상대를 들여다보고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일, 변하고 퇴색되어 버리지 않도록, 결국 더 행복하기 위해 함께하기를 결심한 두 사람이라는 사실을 매 순간 잊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이지 않을까.

   
[글] 아띠에터 미오 jy3308@mhns.co.kr좋아하는 영화 '지금 만나러 갑니다'의 여주인공 이름이자, '미혹됨과 깨달음'을 통틀어 의미하는 말. 서강대 신문방송학과 심리학, 연세대 임상심리학 석사 과정을 마치고 현재 임상심리전문가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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