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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베르 르빠주의 '꿈'이 95분간 관객들을 부유의 상태로 만들었다. 그는, LG아트센터라는 프로시니엄 극장, 곧 입체적일 수 없는 무대에서 '입체감'을 선사했다. 이 연극의 무대이자, 로베르 르빠주의 꿈의 무대요, 관객들의 부유(浮游)적 공간인 무대 정 가운데 놓인 거대한 큐브를 통해서 말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무대는 정육면체 큐브의 모양을 하고 있지만, 세 개의 면이 부재한 모습이었다. 두 명의 배우는 무대 '위'에 서있는 것이 아니라, 무대 '안'에 들어 있다고 표현할 수 있다. 두 배우는 무대 안에서 여러 이야기와 이미지를 풀어나가는데, 이 안에서 장 콕토, 마일즈 데이비스, 로베르 르빠주의 서로 다른 시공간이 '교감'하며 진행되고 있었다. 장 콕토의 '미국인들에게 보내는 편지(A Letter to Americans)'와 마일즈 데이비스의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의 고통, 그리고 자신(로베르 르빠주)의 실연이라는 에피소드들이 요람을 담은 큐브 모양의 무대 안에서 얽히고설키며 혼재돼가고 있었다.

 

   
 


우리는 무대 안에서 세 명의 인물과 그 스토리를 마주하며, 매우 감각적인 이미지들을 목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이미지들은 과연 시각적으로만 환원될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그들이 선사하는 이미지는 관객들에게 곧 3차원의 것으로 다가왔고, 관객들은 마치 극장 안에서, 아니, 우주 안에서 부유하고 있는 존재들로 인식되고 말았다. 칠흑 같은 어둠, 중력에서 자유로워 보이는 배우들, 꿈과 같은 이야기들, 입체적 이미지들.

 

   
 


이 연극이 신기한 것은, 로베르가 일반적이지 않은 무대효과를 사용함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은 낯설지가 않다는 데에 있다. 어디가 바닥이라고 말할 수 없는 움직이는 무대일뿐더러, 특히나 마일즈는 영상에 속한 듯 우리 실제 세계에 속한 듯 차원을 오가고 있었다. 뉴욕의 거리를 배회한다든지 트럼펫을 조립하는 과정, 아편을 투여하는 행위까지, 그는 영상과 실재를 오가는 존재였다. 게다가 장 콕토는 '꿈, 예언, 환상'이라는 단어들이 잘 어울리는 식의 이야기들을 늘어놓는다. 하지만 이 특별한 연극이 낯설거나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는 것은 기이할 노릇이다. 이것은 미래의 일반적 연극의 모습은 아닐까, 싶을 정도의 새로운 무대 기술이 관객들의 눈을 신비롭게 하지만, 그것은 1949년과 1980년대의 시공간적 배경을 소화하기에는 무리가 없었다. 기술과 이야기의 공존이 매우 조화로웠다.

마일즈의 트럼펫 소리, 1949년의 흑백 뉴욕 거리, 1980년대 로베르의 실연 감성. 이 모두가 낯선 기술과의 조우 속에서 각자 본연의 감성을 녹여내고 있었다. 꿈의 시간과 꿈의 공간을 다녀온 듯하다. '봤다'라는 동사로만 표현될 수 없는 연극이었다. 관객들은 로베르가 마련한 시공간을 '다녀온' 것이다.

 

   
 


"난 이제 잠들어 꿈꾸려 한다. 꿈은 통제가 존재하지 않는 세계이기에."

장 콕토의 목소리를 빌려, 로베르는 연극을 점차 꿈의 시공간으로 만들어버린다. 그는 "진보라는 이름으로 독창성을 대신해왔다"는 현실을 꼬집으며, "하늘에 보이는 오로라보다 내 생각의 오로라가 더 중요"하다고 외친다. 사실과 실재의 부재로 '꿈'은 존재 자체를 부정당해오거나 '진보'라는 대체재로 탈바꿈되어야 했던 것이다. 꿈꾸는 자들이 위로받을 수 있는 시간이 아니었을까. 꿈같았던 시간, 마음껏 꿈꿀 수 있는 시간. "죽음으로 향해 달려가는 급행열차"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는 꿈의 시공간에서 말이다.

 

   
 


문화뉴스 장기영 기자 key000@mhn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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