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WBC에 이어 또 다시 국가대표팀 감독직을 받아들인 노장

▲ 2010년 고교야구 최강전 결승전 당시 시타에 임한 김인식 감독. 사진ⓒ김현희 기자

[문화가 있는 날·예술이 있는 삶을 빛냅니다…문화뉴스] 2006년에 개봉한 영화 중에 ‘김관장 대 김관장 대 김관장’이라는, 다소 독특한 제목의 영화가 있었다. 택견과 검도, 그리고 쿵후 학원을 운영하는 세 명의 김관장이 벌이는 에피소드를 개그 형식으로 승화시킨 영화인데, 전후 사정을 모르는 이들은 ‘동명 3인의 김관장 이야기 아닌가?’ 하는 착각에 빠질 수도 있다. 수강생을 뺏고 빼앗기는 과정 속에서 나타날 수 있는 각종 상황들이 연출됐다는 점에서 ‘이유 없이 웃기다.’라고 이야기하는 이들이 많았던 영화가 바로 ‘세 명의 김관장’ 이야기다. 특히, 최성국과 신현준, 권오중 트리오가 풀어가는 개그 코드는 영화 내용을 제쳐 두더라도 사람들의 웃음을 이끌었다는 사실만은 분명해 보인다. 그것이 벌써 9년 전 이야기다.

프로야구에도 적지 않은 ‘김 감독’이 과거에서부터 지금까지 존재해 왔다. 올해만 해도 한화 이글스 김성근 감독, NC 다이노스 김경문 감독, SK 와이번스 김용희 감독, KIA 타이거즈 김기태 감독, 두산 베어스 김태형 감독까지 무려 다섯 명의 김 감독이 프로야구 그라운드를 수놓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이렇게 많은 김 감독 중에서 동명이인은 드물었다는 사실이다. 간혹 선수들 중에서 동명이인이 투-타 맞대결을 펼치거나 같은 날 1군 엔트리에 드는 경우는 있어도 적어도 사령탑 중에서는 동명이인의 감독이 맞대결을 펼치는 일은 없었다. 그런데 2015년 들어 두 명의 ‘김 감독’이 프로야구 그라운드 밖에서 노장의 투혼을 발휘하고 있다. 공교롭게도 둘은 동명이인이기도 하다. 한 명은 ‘국민 감독’이라는 별명이 더 잘 어울리는 김인식 현 국가대표팀 감독이고, 또 한 이는 현재 국내 유일의 독립리그구단 창단 감독을 맡고 있는 김인식 감독이다.

‘불멸의 에이스’ 김인식, 국민 감독이 되기까지

현재 야구팬들에게 ‘김인식 감독’에 대한 존재를 묻는다면, 열에 아홉은 당연히 ‘프리미어12’를 준비 중인 김인식 현 대표팀 감독을 떠올릴 것이다. 2006, 2009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이하 WBC)에서 대표팀 감독직을 맡으며 대한민국의 호성적을 이끌었음은 물론, ‘믿음의 야구’를 바탕으로 노장의 재활에도 탁월한 기질을 발휘하여 ‘국민 감독’으로 널리 호평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고요한 가운데,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움직인다.’라는 정중동(靜中動)의 자세를 유지하는 가운데서도 팀을 이끌어가는 모습이 상당히 인상적일 정도였다.

이러한 ‘국민 감독’의 현역 시절은 어떠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김 감독 역시 범상치 않은 현역 시절을 보낸 바 있다. 특히, 김소식(전 대한야구협회 부회장) 등과 함께 장래가 촉망되는 투수로 인정받았던 선수였다. 1965년, 크라운 맥주에서 선수생활을 시작했던 김인식은 해병대 야구단(1966-1968년)을 거쳐 1969년부터 3년간 한일은행 선수로 활약했다. 다만, 어깨부상이 발목을 잡으면서 원치 않게 일찍 선수 생활을 접어야 했다는 점이 다소 아쉬웠다. 그러나 그의 이른 은퇴는 그의 지도자 생활을 앞당기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스물여섯이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모교 배문고등학교 야구부 감독을 맡았던 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재미있는 것은 이때 까지만 해도 김인식 감독이 지금의 ‘덕장’과는 거리가 멀었던 ‘다혈질 용장’이었다는 사실이다. 젊은 김인식은 모교 그라운드를 울리는,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제자들을 가르쳤다. 이는 상문고등학교 감독(1978-1980년), 동국대학교 감독(1982-1985년) 시절에도 마찬가지였다. ‘호랑이 감독’이 따로 없을 정도였다.

그렇게 12년간 후학 양성에 힘써왔던 김인식 감독은 1986년부터 김응용 감독의 부름을 받아 해태 타이거즈(현 KIA 타이거즈)의 수석 코치직을 맡게 된다. 그리고 그가 해태에 몸을 담고 있는 동안 팀은 한국시리즈 우승을 놓치지 않으며, 1989년까지 4연패의 위업을 달성하게 된다. 김응용-김인식 콤비는 그렇게 ‘해태 왕국’을 완성했다. 이 당시 지도력을 인정받은 김인식 감독은 1991년을 기점으로 리그에 합류하는 쌍방울 레이더스의 창단 감독을 맡게 된다(1990년).

당시 마흔셋에 불과했던 김인식 감독은 여전히 젊음을 과시했다. 불 같은 열정으로 선수들을 독려했던 그는 매 경기 선수들에게 ‘승부에서 지더라도 기는 죽지 말라’고 주문했다. 하지만, 하위권을 전전했던 팀의 부진까지 막을 수 없었다. 결국, 김인식 감독은 2년간 93승 155패라는 초라한 성적표를 간직한 채 쌍방울 유니폼을 벗어야 했다.

그랬던 김 감독을 다시 현장으로 부른 것은 OB 베어스(현 두산 베어스)였다. 당시 하위권을 전전했던 OB는 쌍방울 창단 감독이었던 김인식 감독을 신임 감독으로 임명하며 팀을 맡겼다. 이에 김 감독은 김형석, 김상호, 김경원 등을 앞세워 1995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끄는 기염을 토했다. 당시 74승 47패 5무승부를 기록했던 OB는 1994년 7위를 기록한 이후 바로 다음해에 우승을 차지하며, ‘김인식 전성시대’를 알리기도 했다.

이후 김인식 감독은 2003년까지 OB/두산 베어스 감독을 맡았다(1999년도에 팀 명칭 변경). 자신의 감독 생활 중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했던 베어스 감독 시절, 김 감독은 두 번의 한국시리즈 우승(1995, 2001시즌)을 포함하여 팀을 다섯 번이나 가을 잔치에 이끌었다. 이는 역대 베어스 감독들 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성적이었다.

그리고 이 시기에 50번째 생일을 맞이했던 김 감독은 이때부터 선수들을 윽박지르거나 불 같은 모습을 감추기 시작했다. 예전 같지 않았던 자신의 건강 문제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끝까지 선수들을 믿고, 많은 기회를 부여했던 김인식 감독은 이때부터 ‘진정한 덕장’으로 거듭나기 시작했다.

이에 김 감독은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김응용 감독과 다시 만나 코치직을 훌륭하게 수행했고(당시 동메달 획득),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에서는 처음으로 대표팀 감독직을 수행하며 조국에 금메달을 선사했다. 국가대표 감독직 데뷔전을 훌륭하게 치른 김 감독은 이때부터 서서히 ‘국민 감독’으로서의 모습을 드러내게 됐다.

2003년을 끝으로 두산 베어스 감독직에서 물러난 김인식 감독은 자신의 후계자로 선동열 당시 KBO 홍보위원을 지목하기도 했다. 후배에게 감독 자리를 물려주고 본인은 일선으로 물러나겠다는 뜻을 분명히 한 것이었다. 비록 선동열 감독이 두산 유니폼을 입지는 못했지만, 대신 김경문 감독이 두산 사령탑을 맡으면서 팀을 다시 일으켰다는 것만으로도 김인식 감독에게는 다행이었다.

이후 김인식 감독이 자리를 옮긴 곳은 한화 이글스였다. 가을잔치와 유독 인연이 없었던 한화에게 김인식 감독 카드는 분명 매력적이었다. 이에 김 감독은 2005년을 시작으로 2007년까지 3년 연속 팀을 포스트시즌에 진출시켰다. 문동환, 정민철, 송진우, 구대성 등은 이 시기에 특히 더 빛났던 노장들이었다. 당시 MBC-ESPN 해설위원을 맡았던 故 조성민 역시 김인식 감독의 부름에 잠시나마 한화 유니폼을 입으며 마지막 투혼을 불사르기도 했다.

이에 KBO는 2006년 제1회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이하 WBC)을 이끌 사령탑으로 김인식 감독을 임명하기도 했다. 당시 김재박, 선동열 등 ‘감독급 코치진’들이 즐비했던 국가대표팀은 일본을 두 번이나 격파하는 등 승승장구한 끝에 4강 진출이라는 위업을 달성했다. 이때부터 국민들은 김인식 감독에게 ‘국민감독’이라는 칭호를 붙여주며 진심 어린 경의를 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더 이상 국가대표팀을 맡지 않겠다.’던 김인식 ‘국민 감독’은 남들이 서로 안 하겠다던 제2회 WBC 국가대표팀 감독직을 다시 한 번 수행해야 했다. 물론 전과 같은 ‘감독급 코치진’들을 구성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이러한 어려운 시기에 국가대표팀을 맡은 김인식 감독은 1회 대회 때보다 더 좋은, ‘준우승’이라는 금자탑을 세우며 세계를 다시 한 번 더 깜짝 놀라게 했다. 특히, 일본을 다섯 번이나 만나고도 전혀 위축되지 않은 플레이를 펼치자 하라 감독은 “더 이상 한국을 국제무대에서 만나기 싫다.”라며 혀를 내두르기도 했다.

2009년 한화 사령탑을 끝으로 현역에서 물러난 김 감독은 16년간 프로야구 감독을 맡으면서 통산 980승 1,032패 45무승부를 기록했다. 1,000승 이상을 기록한 다른 노장에 비해서는 크게 보이지 않을 수 있으나, 약체팀을 이끌어 이 정도 성적을 냈다는 점만으로도 높은 점수를 줄 만하다. 그리고 한동안 KBO 기술위원장 등을 맡으며 현장에서 잠시 떨어져 있던 김 감독은 프리미어 12를 앞두고 또 다시 ‘국민 감독’으로 돌아왔다. 많은 야구팬이 김 감독에게 끊임없는 박수를 보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래서 국민 감독이라는 칭호는 아무에게나 붙여 주는 것이 아니다.

- 제2편, 또 다른 김인식 편에서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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