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청룡 원년 멤버 김인식, 지금은 국내 유일 독립야구단 창단 감독으로 '새로운 도전'

▲ MBC 청룡 멤버로 '베트콩'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했던 김인식은 현재 연천 미라클 초대 감독으로 부임했다. 사진ⓒ김현희 기자

[문화가 있는 날·예술이 있는 삶을 빛냅니다…문화뉴스] (1편에서 계속)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자신의 직업이나 직책, 아니면 호칭 앞에 ‘국민 OOO’이라고 불리는 것은 엄청난 영광이다. 그래서 ‘국민 타자’라 불리는 이승엽의 존재를 비롯하여 ‘국민 감독’으로 칭송받는 김인식 대표팀 감독은 분명 한국 야구사에 반드시 아로새겨져야 할 인물임이 틀림없다. 그리고 그 김인식 감독은 올 시즌 이후 치러지는 또 다른 국제 대회인 ‘프리미어 12’를 준비하기 위해 다시 한 번 더 국가대표팀 감독직을 수락했다.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 금메달, 2006 WBC 4강, 2009 WBC 준우승의 꿈을 이뤄 낸 김인식 ‘국민 감독’이 또 다른 기적을 일궈낼지 지켜보는 것도 그래서 자못 흥미로운 일이다.

그러나 앞선 1편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야구계에 ‘김인식 감독’은 한 명만 있는 것이 아니다. 또 다른 김 감독 역시 프로야구와 아마야구 사이에서 가교 구실을 하며, 한 명의 제자라도 프로에 보내기 위해 애를 쓰고 있다. 현재 국내 유일의 독립 리그 야구단, ‘연천 미라클’을 이끄는 김인식 감독(62)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원조 철인’ 김인식, 환갑에 맞은 ‘새로운 도전’

지금이야 ‘김인식’ 하면, ‘국민 감독’으로 유명한 김인식 국가대표팀 감독을 떠올리지만, 사실 선수 시절 명성 자체만 놓고 본다면, 미라클의 김인식 감독이 더 많은 유명세를 탔었다. 동대문상고(현 청원고)-성균관대 졸업 이후 MBC 청룡(LG 트윈스 전신)의 원년 멤버로 프로에 입문했고, 개막전에서도 1번 타자로 나서며 좋은 활약을 펼쳤기 때문이었다. 흔히 ‘몸에 맞는 볼의 달인’ 하면 공필성 전 롯데 코치를 떠올리게 마련이지만, 1980년대 까지만 해도 김인식이야말로 진정한 ‘몸에 맞는 볼’의 달인이었다. 몸에 공이 맞으면, 주저할 것 없이 1루로 뛰어나가 다음 플레이를 준비했기 때문이었다. 말 그대로 ‘근성의 아이콘’이었다.

이렇게 포기할 줄 모르는 근성은 한국 프로야구 ‘원조 철인’의 탄생을 가능하게 했다. 김인식은 1982년 프로 개막전 경기 이후 1987년까지 무려 606경기 연속 출장 기록을 세웠는데, 이는 김형석(전 두산), 최태원(전 SK) 등이 이 기록을 깨트릴 때까지 부동의 1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실업야구에 먼저 몸을 담으면서 프로 입문이 다소 늦어졌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이 기록 또한 대단한 가치를 둘 수 있었다.

이후 1988년 올림픽을 기점으로 현역에서 물러난 김인식은 프로야구 통산 타율 0.255, 553안타, 11홈런, 153타점, 99도루를 기록했다. 은퇴 이후에는 MBC/LG 코치를 거쳐 2군 감독을 다년간 경험했고, LG에서 퇴단한 이후에는 모교 청원고 감독을 맡으며 본격적으로 아마야구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모교를 떠난 이후에는 안양 충훈고에 야구부가 창단되면서 창단 감독으로 다년간 선수들을 지도했다. 이 기간에 성양민과 유영하(이상 SK)가 프로로 가는 발판을 마련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기간에 김인식 감독은 ‘야구부를 혁신하겠다.’라는 명분으로 전임 예체능 부장으로부터 일방적인 사퇴 압력을 받는 초유의 사태를 맞게 됐다. 이에 반발한 이형진 안양시 야구협회장을 필두로 ‘일개 교사가 교장의 승인을 받지 않은 상황에서 일방적으로 야구인을 해고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행위’라며 국가 인권위원회에 관련 사항을 제소하기도 했다. 제소 결과는 안양시 야구협회를 필두로 한 김인식 감독의 승리로 끝났지만, 이번에는 이 결과에 대해 학교 측이 다시 항소하면서 지루한 ‘시간 끌기’가 지속됐다. 이에 김인식 감독은 “이로 인해 다치는 것은 아이들뿐이다. 그리고 설령 내가 복직을 한다 해도 선배가 후배 자리를 도로 뺏는 모양새가 되지 않겠는가!”라며 학교와의 연결 고리를 스스로 끊었다.

이후 잠시 야인으로 살았던 김 감독은 고양 원더스의 해체와 함께 일종의 대안으로 떠오른 ‘연천 미라클’의 창단 감독 제안을 받는다. 하지만 당시 허리디스크 수술을 앞두고 있던 김 감독은 미라클의 제안에 감사하면서도 고사의 뜻을 표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미라클 측에서는 “그렇다면, 감독님이 수술을 다 받고 회복하실 때까지 기다려 드리겠습니다.”라는 말로 김 감독의 생각을 돌려놓게 된다. “당시 구단의 제안이 참으로 고마웠다.”라는 김 감독은 영원한 동반자이기도 한 정진환 투수코치와 함께 기꺼이 연천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하지만 구단주가 전폭적인 지원을 시행한 고양 원더스와는 달리, 철저하게 ‘야구 사관학교’를 지향했던 연천 미라클은 말 그대로 ‘최악의 상황’ 속에서 성과를 내야 했다. 김인식 감독 역시 이를 인정하여 현역 시절에 키워 온 악바리 근성을 선수들에게 심어 주기 위해 상당 부문 애를 썼다. 그리고 그 성과는 NC 2군과의 창단 첫 경기 승리라는 결과로 다가왔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미라클 선수 명단에 포함됐던 투수 이케빈이 2016 신인지명 회의에서 삼성에 2차 2라운드 지명을 받는 성과로도 이어졌다.

한때 ‘원조 철인’으로 불리며 화려한 프로 생활을 했던 김인식 감독. ‘악바리 정신’이 무엇인지 몸소 보여줬던 그는 환갑이 넘은 나이에도 도전을 멈추지 않고 있다. 지금은 ‘한 명의 선수라도 프로에 보내는 일’이 김 감독에게 가장 중요한 업무다.

지금도 김인식 감독은 선수들이 타는 버스를 직접 운전하면서 전국을 누비고 있다. 충훈고 사령탑 시절, 본인이 직접 학교 버스를 운전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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