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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와 시간은 다르지만 동서고금에 불변의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보리수 아래서 도를 깨우친 석가모니의 경우에서도 알 수 있듯 아마도 그것은 금욕과 거기에 직면한 자의 갈등일 것이다. 여기 전쟁을 멈추지 않으면 섹스도 없다는 구호를 집단으로 외치는 아마존 여전사들이 있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들이 구호가 적힌 피켓을 들고 세상과 남자들을 향해 선전포고를 한 것은 아니었다.

   
 

당차고 대차다 못 한 열혈녀들이 집단 출연하는 <리시스트라테>는 5포를 너머 7포 세대라는 비참한 신조어가 난무하는 21세기, 한반도 수도 서울의 대학로에서 분출의 출구를 제대로 찾지 못한 청춘들과 함께 지나간 청춘을 그리워하는 장년층이 하나가 된 축제였다. 춤과 노래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마당놀이와 같은 이 무대에서 가장 눈에 띈 것은 무엇이었을까? 물론 리시스트라테였다. 그렇지만, 리시스트라테는 사람 이름이 아니다. 바로 여자의 평화란 뜻이다!

놀랍게도 이 연극은 고대 그리스의 한 극작가에 의해 탄생했다. 아리스토파네스, 발음이 쉽지 않은 이 희곡작가는 아테네 출생으로 약 44편에 달하는 작품을 남긴 것으로 알려졌는데 작품 대부분을 펠레폰네소스 전쟁의 와중에 썼다고 한다. 그런 영향 때문인지 이와 같은 기발한 작품이 나온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이 가능하다. 단순한 염전(厭戰)의식이 그로 하여금 의식의 변화를 유도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전쟁의 첫날은 평화의 첫날과 같다는 그 유명한 말처럼 기원전 414년에 발표한 <새>라는 작품이 시칠리아 원정군의 전멸로 자신의 꿈에 회의를 하게 된 후에, 아리스토파네스의 작품 세계가 극적으로 달라진 것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 연극은 글자 그대로 성욕을 제대로 해소할 수 없는 여인들의 한낱 몽정기 같은 섹스스트라이크가 아니기 때문이다.

리시스트라테는, 여자의 평화라는 뜻에서 알 수 있듯 아테네의 여자들이 전쟁에 지친 나머지 자신들의 존재감을 남자들한테 피력하고 거기에 그치지 않고 요구사항을 관철했을 때의 희열을 의미한다고 할 수가 있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바로 인본주의에 입각한 깨달음이다. 아득하나마 페미니즘과 맞닿아 있는 이 멋진 희곡은 결국 인간 해방을 꿈꾸는 것이다. 그런데 왜 당대의 우리는 이 메시지를 리비도의 관점에서만 접근하는 것일까? 불행하게도 거기에는 7포 세대가 포진한 우리의 현실이 자리한다.

연극은 안개가 깔린 무대와 함께 막이 오른다. 이 안개는 연출자의 의도가 어디에 있건 간에 열정을 해소하지 못하는 청춘을 독박으로 뒤집어쓴, 혹은 대변하는 여인네들의 한처럼 공연 내내 무대에 유령처럼 출몰한다. 하지만, 관객들은 여자주인공인 미리네의 남편 키네시아스의 희화화된 성기의 우스꽝스러움에 매몰되어 희희낙락에 동참한다. 안개 너머의 세상에 무엇이 도사리고 있는지는 불문이다. 위험하지 않은가? 벌에는 침이 있고 장미에는 가시가 있는데 하물며 막다른 세계로 내몰린 자들이 판을 벌인 곳에 어디 만나(-모세의 지도 아래,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 이르러 굶주릴 때 하느님이 내려준 신비로운 양식-)와 같은 달콤함만이 있겠는가? 하지만, 한번 달궈진 무대는 객석을 꽉 메운 관객들과 함께 그냥 무한 폭주할 뿐이다.

   
 

거기에 기름을 부은 것이 있으니 바로 다른 연극에서 좀처럼 엿볼 수 없는 한 가지, 열악한 환경에서 고군분투하는 연극인들을 위해 일반인들이 연극의 부흥과 사회적 관심을 끌기 위해 특별출연한 것이 흥을 돋운다. 이 멋지고 순수한 바이럴은 마케팅으로서 효용가치가 충분하다는 점에서 돋보이지만 극의 완성도를 떨어뜨리는 것은 분명하다. 몸짓은 있되 활동이 없는 난장(難場)에서는 그저 같이 웃어주면 될 일이다. 굳이 무엇을 이해할 필요는 없다. 역설적으로 이런 삐딱함이 바로 당대의 리시스트라테가 세상에 빛을 보기 위한 질료였다는 것을 조금이라도 음미할 줄 안다면 이 극은 그 자체로서 성공한 것이다.

궤변이 아니다. 이미 우리 시대는 정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 7포 세대라는 용어가 나오지 않겠는가? 하나를 포기해도 숨 막히는 시대에 왜 우리 젊은이들은 이토록 많은 것을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일까? 연애, 결혼, 출산. 사실 이것만 하더라도 결국 그 출발은 사랑과 하나가 된 성욕이다. 그것은 곧 인간다운 삶의 시작이기도 하다. 그래서 리시스트라테는 휴머니즘이다. 섹스스트라이크는 그것을 뜻을 가진 아주 그럴듯한 미끼일 뿐이다. 이쯤 되면 점점 스트라이크의 대상이 다른 것으로 변주되는 쪽으로 내면이 소용돌이친다. 이 파업의 궁극은 결국 어디를 향해야 하는 것일까 하는 질문과 함께? 

놀라움이 환호로 바뀌는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아마추어들의 출현인데 객석 앞자리, 그리고 객석 중앙에서 시도 때도 없이 뛰쳐나가는 이 프로의 열정을 지닌 아마추어들은 전부 다 남자다! 물론 여자들도 있다. 하지만, 그들은 무대의 2층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기에 급작스러운 소위 깜짝쇼는 남자들의 몫이다. 그들은 극의 큰 줄거리를 담당하지는 않지만 제법 쏠쏠한 재미를 안겨주는 소품 이상의 역할을 하는데 정작 중요한 것은 그들의 외침과 목소리가 아주 많이 나약하다는 것이다.

왜 그들의 발언은 공감을 얻지 못하는 것일까? 이 연극은 표면적으로 수컷과 암컷이라는, 철저하게 동물적인 인간의 본능을 설파하는데 에너지를 쏟고 있다. 자연계에서 무리를 거느리는 수컷은 도전자에게 자리를 내줄 경우 자신의 모든 것을 잃고 만다. 그 냉혹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을 정도다. 그런데 그 자연의 법칙은 동물로서의 인간에게도 마찬가지다. 한번 주도권을 놓친 세력은 다시 권력을 되찾기가 어렵다. 사회 각계각층의 CEO 격인 이 무면허 배우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장년층을 대표하는 오피니언 리더라고 할 수 있는데 그들이 매파의 사술과 농간 때문에 힘을 잃는 설정은 7포 세대의 분노와 좌절을 더욱더 거칠게 스트라이크를 감행하게 하는 도화선으로 반작용하는 결과를 낳는다. 이 기묘한 상황에 정작 우리는 분노해야 하지 않을까?

   
 

연극은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린다. 모두가 행복해하는 척하는 무대를 뒤로하면 거기에 포개진 21세기, 스트라이크 공화국인 한국의 현실은 결코 해피하지가 않다. 가시밭길이 아닌 안개 밭길이다. 다음에 다시 이 연극이 무대에 오른다면 그때는 성공한 무면허 배우들이 무대를 채울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제자리를 찾은 청년들이 열정페이나 재능기부와 같은 기술적인 착취의 수단이 아닌 순수한 취미와 열정으로서 반전(反戰)을 설파했으면 좋겠다. 그래야, 비로소 이 연극의 원래 작의가 제대로 이해하고 먹혀들어간 것일 테니까 말이다. 아리스토파네스가 아직도 구천을 헤매고 있다면 아마도 그 이유 때문이 아닐까? 전쟁이냐 섹스냐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To be or not to be가 되어야 열녀(熱女)와 색녀(色女) 사이의 뜨거운 감자와 같은 사랑이 진정 깨달음으로 찾아올 것이다. #문화뉴스 아띠에터 이형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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