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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용엄니, 최불암과 함께 전원일기를 대표하던 MBC의 아이콘이 헬머니로 돌아왔다. 그런데 할머니가 아닌 헬머니라니? 지옥에서 온 할머니란 뜻인가? 정답이다. 영화를 보면 헬이 지옥을 뜻하는 Hell이 맞음을 수긍하게 된다.<가문의 영광>에서 보여준 통 큰 여장부 스타일에 찰진 욕을 구사하던 캐릭터를 자연스러운 노화로 버무려 헬머니 김수미로 변신시킨 이 영화는 솔직히 큰 볼거리는 없다. 그만큼 부담도 덜하다. 그렇다고 심심풀이 킬링타임용도 아니다. 왜? 최소한의 영화에 대한 예의는 존재한다. 바로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 모정이 주제이기 때문이다.

   
▲ 손자를 돌보는 헬머니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지만 국립대학교를 몇 번 들어갔다 온 헬머니는 큰아들을 찾으러 다니다 도박에 사로잡힌 씨 다른 둘째 아들과 만나 그 집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며느리한테 천만 원이라는 거금을 덥석 안겨주며 당분간 몸을 의탁한 채 가슴에 상처를 입은 큰아들과의 화해를 위해 부의 상징인 XX 아파트에 권모술수를 부려 파출부로 들어간다.

권력과 돈에 환장한 장모의 기에 눌려서 집에서나 회사에서나 존재감이 없던 승현은 한눈에 신분을 위장한 헬머니가 바로 자신의 생모임을 알아보지만 냉정하게 인연을 거부한다. 전형적인 한국의 드라마 구조다. 절대 번역이 불가능한 그 빌어먹을 '정'으로 얽힌 우리의 가족관계에 대한 탐구는 이 영화에서도 그 거대한 뒷심을 유감없이 드러낸다. 딱히 뭐라고 말하기 그런, 그렇다고 감성팔이라고 말하기도 참 뭐하다. 그저 한국영화의 스펙트럼이 다양할 뿐이라고 거들면 모양새가 좋다.

어쨌거나 우리의 레전드, 80년대 MBC의 대표 드라마였던 전원일기의 몇 안 되는 생존자인 김수미 여사가 그냥 '모든 게 다 내 탓이요'하고 가만있을 리 없다. 교도소에서도 소위 범털을 나무라고 교화하던 여장부가 아닌가? 괜히 헬머니이겠는가?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친손자인 원휘를 위해서라도 둘 사이의 맺힌 한과 오해를 풀기 위해 고군분투하는데 그 좌충우돌의 과정에서 그만 정체가 탄로 나고 그 일로 사돈이자 아들의 장모에게 더 미운털이 박혀 이혼을 종용당하는 몹쓸 꼴을 목격하게 된다.

우리의 헬머니, 김수미 여사는 무시당하는 아들을 보고 모정 폭발, 휴전선의 클레모어 보다 더 무서운 한국 어머니의 힘으로 속사포 같은 비장의 무기를 내뱉는데 아뿔싸 그것이 그만 때와 장소를 잘못 만난 것이었으니 바로 거기에서 그녀는 아들이 보는 앞에서 무릎을 꿇는다. 레전드가, 저러면 안 되는데. 오 마이 갓이다!

그런데 은근 부애가 난다. 아들은 왜 그토록 참아야만 하는가? 여성 상위 시대에 공직의 중간 관리자로서 사회적 체면과 중산층 이상의 삶을 꾸려가면서도 돈과 명예를 거머쥔 악착스런 장모의 눈칫밥을 먹어가면서 숨죽이고 살아야 하는가? 이게 오늘날 한국의 대다수 가장의 모습이라면 일반화한 오류라는 지적이 돌팔매처럼 사뿐히 날아올 것인가? 아니면?

   
▲ 전국 욕의 고수를 찾아나서는 양PD와 조연출

코미디 영화를 보면서도 겁나는 세상에 대한 해석 때문에 마음이 편치 못하다. 그만큼 우리 사회가 녹록지 않고 경직되어 있다는 것 아닐까? 헬머니의 욕은 그런 우리의 어긋난 음지의 세계에 대한 고발이자 도발이라고 지레짐작으로 위로해본다. 억압에 대한 분노를 말로 풀 수 있다면 그것처럼 경제적인 것이 어디 있겠는가 말이다.

이야기는 결국 심장병을 앓는 과거의 대감 집 댁 따님인 '마님'이 거액의 상금을 위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극강의 서바이벌인 '욕의 맛'이라는 오디션에 참가하는 것으로 서서히 헬머니의 본색을 드러낸다. 이 역, 정말 김수미 여사가 아니면 감당할 수 없다. 그녀가 선전하던 간장게장이 밥 도둑이라면 그녀의 찰지고 때로는 거칠고 폭력적인 욕은 세파에 쩌든 우리의 모든 부정직한 감정의 찌꺼기를 일거에 해소해주는 쾌감 제일의 청량제인 것이다. 100년 묵은 산삼도 못하는 일이다.

신한솔 감독은 다소 무리한 설정과 억지스러운 전개에도 불구하고 얼개 구조에 큰 균열을 일으키지 않는 범위에서 헬머니의 진심을 담아낸다. 관객은 예전처럼 더는 어설프지 않은 눈매의 소유자들이지만 그녀의 진심이 담긴 몇 마디에서 수긍한다. 감독은 조금전까지 기발하고 기상천외한 그 어떤 것을 잔뜩 기대하던 속물들의 기대 지평을 결국, 인간의 심장이 전 하는 몇 마디로 완전히 무너뜨린 후 예고된 카타르시스를 안겨준다. 영화에서 그녀의 아픈 심장은 욕이 아닌 아주 간단한 몇 마디였다. 다들 이런 경험이 있지 않은가? 끝내 전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며 가슴에 묻어둔 몇 마디….

그것이 세레이드로서 제대로 기능한 것인가 아닌가는 중요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뻔한 해피엔딩에 묻힌다는 것은 아쉽다. 일각에서는 병맛 콘셉트 운운하지만 헐리우드에서 만든 영화는 과연 그런 손가락질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지 의문이다. 아메리칸 파이 같은 영화도 버젓하게 우리의 소중한 원화를 태평양 너머로 집어가는데 굳이 이 영화가 폄하되어야 할 이유는 없다. 우리의 정서를 헐리우드가 대신하는 것도 아닌 이상.

소재나 줄거리가 문제가 아니라 완성도가 문제라면 그것은 먼저 이 영화를 만든 감독에게 화환을 걸어주고 따질 일이다. <싸움의 기술> 이후 10년 만에 대중의 관심을 비교적 제대로 받는 영화를 보고 충분히 이미 느끼지 않았는가? 당신이 헬머니처럼 푸짐하게 배틀의 최고수가 되어 작품성에 대한 불만을 한바탕의 욕지거리로 늘어놓으면 된다는 것을.

   
▲ 도박에 사로잡힌 찌질이 운전강사와 그의 과분한 아내

감히 그렇게 할 자신이 있다면 말이다. 물론 뒷감당은 철저히 당신의 몫이다. 이럴 때는 명예훼손이라는 검열의 수단이 일견 우리를 냉정하게 만들어주기도 한다. 세상은 욕만 하고 살 수도 없지만 욕 없이도 살아서는 안되는 법. 만개를 향해 가는 꽃을 보며 우리, 정말 마음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움트는 악성 종양 같은 응어리가 있다면 한바탕 시원하게 욕지거리로 내뱉어 버리고 웃자. 욕배틀의 레전드로 귀환한 일용엄니, 김수미 여사를 생각하면서! 분명 헬머니가 도와줄 것이다. #문화뉴스 아띠에터 이형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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