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아티스트에디터 박정기(한국희곡창작워크숍 대표). 한국을 대표하는 관록의 공연평론가이자 극작가·연출가. pjg5134@mhn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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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격의 뿌리 鐵農 이기우와 素丁 황창배 서예 전각전
- 전시명 파격의 뿌리: 鐵農 이기우와 素丁 황창배 서예 전각전
- 전시장소 스페이스 창배
- 전시일정 2017년 10월 19일~12월 30일
- 관람일시 10월 19일 오후 5시

[문화뉴스 아띠에터 박정기] 연희동의 복합문화공간 스페이스 창배에서 鐵農 이기우와 素丁 황창배 서예 전각전을 관람했다.

전각(篆刻)은 서화 등의 낙관에 쓰이는 도장에 전서(篆書)를 새기는 것을 말한다. 현대에는 방촌(方寸)의 세계의 생명의 약동을 표현하는 예술로서 글씨의 한 분야를 차지하고 있다. 어떠한 서체이건 좋으나 작서를 새길 경우가 많으므로 전각이라 한다.

돌·나무·대나무 등의 인재(印材)[B]에 문자를 반대로 쓰고서 인도(印刀)를 가지고서 새긴다. 문자가 붉게 바탕이 희게 압인되는 것을 주문(朱文)이라 하고, 그 반대를 백문(白文)이라 한다.

주문으로 새기는 것을 양각(陽刻), 백문으로 새기는 것을 음각(陰刻)이라고도 한다. 또한 각자(刻字)를 전각가(篆刻家), 새긴 것을 인장(印章)이라 하고, 역대의 고인(古印), 각 가각인(家刻印)의 인영(印影)을 모은 것을 인보(印譜)·인집(印集)·인존(印存)이라 부르고 있다.

예부터 중국에서는 인장이 쓰였는데, 가장 발달하였던 시기는 한대(漢代)였다.

11세기 송대(宋代)에 이르자 새로운 금석학(金石學)의 발달로 한나라의 인장이 부활하게 되었고 15세기 명대(明代)에 이르러 새기기 쉽고 아름다운 석재(石材)의 발견으로, 이전에 상아를 쓸 때와 같이 장인(匠人)들에게 인장을 의뢰하지 않아도 쉽게 새길 수 있게 되어 문인(文人)들은 장인예(匠人藝)로서는 이룰 수 없는 새로운 경지를 이루어놓았다.

수많은 문인들의 손을 거치는 동안, 전각은 시(詩)·서(書)·화(畵)와 병칭될 만큼 높은 평가를 받게 되었다. 초기의 창시자는 문팽(文彭)과 하진(何震)이며, 청대(淸代)에 이르면 정경(丁敬) 등의 한인(漢印) 연구로 더욱 새롭게 발전하였다. 그들은 출신지인 항저우[杭州]의 아명(雅名)을 따 '절파(浙派)'라는 세력을 이루기도 하였다.

청대는 전각의 흥륭기(興隆期)로, 등석여(鄧石如)·조지겸(趙之謙)과 같은 명인이 잇따라 나타났고 청대 말에서 중화민국 초에 걸쳐 활약한 오창석(吳昌碩)은 구중국(舊中國) 전각의 마지막 대가였다.

한국의 전각역사는 인장이 사용되기 시작한 고려 때부터이다. 당시는 대부분 동인(銅印)·석인이었고 모양도 4각형, 6각형, 원형이었다. 자체(字體)는 대부분 구첩전(九疊篆)이며 배자(配字)는 방사선식으로 되어있어 원주를 향하여 머리를 두고있다.

이 같은 고려 전각의 유풍은 조선으로 계승되어 상서원(尙瑞院)에서는 구첩전과 소전체(小篆體)로 동인 ·철인 등을 만들었다. 역대 임금의 많은 어보(御寶)가 만들어졌으며, 서예 · 회화의 발달과 함께 문인 스스로가 전각하는 사인(私印)이 유행하였다. 미수(眉戒) 허목(許穆)은 한국 전각의 제1인자이며 전각을 남긴 많은 사람 중에서 자기 스스로가 전각하였다고 믿어지는 문인문객은 정학교(丁學敎)·정대유(丁大有)·윤두서(尹斗緖)·오경석(吳慶錫)·이상적(李尙迪) 김정희(金正喜)·김명희(金命喜)· 김상용(金尙容)·오세창(吳世昌) 등 20여 명을 손꼽을 수 있다. 재료는 대개 부드러운 납석계(蠟石系)의 돌을 사용하고 도구는 철필(鐵筆)이라는 양날의 손칼을 사용한다.

전각의 종류에는 성명을 새긴 성명인, 호를 새긴 아호인, 좋아하는 문구를 새긴 사구인(詞句印), 작품의 소장을 확인하기 위한 수장인(收藏印), 새·물고기 등 동물문양을 새긴 초형인(肖形印) 등이 있다. 성명인에는 백문인이, 아호인에는 주문인이 주로 쓰이며, 사구인에는 서화 폭의 우측 상단에 찍는 두인(頭印)과 중간에 찍는 유인(遊印)이 쓰인다.

각법의 종류는 양각과 음각으로 나눌 수 있는데, 양각은 주문인(朱文印)이라 하며 바탕 부분을 새겨내는 것으로 찍었을 때 붉은색의 글씨가 된다. 음각은 백문인(白文印)이라 하며 글씨부분을 새겨내는 것으로 찍었을 때 흰색의 글씨가 된다.

철농(鐵農) 이기우(李基雨,1921~1993) 선생의 자(字)는 태섭(兌燮)이요 호(號)는 철농(鐵農)이며 서울에서 태어났다. 철농은 교육자 집안에서 태어나 일생을 전각에 전념한 전각가로서 ‘한국서예가협회(韓國書藝家協會)’ 대표위원과 ‘한국전각협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철필(鐵筆)로 농사를 짓고 묵(墨)으로 밭을 간다는 철농묵경(鐵農墨耕)의 뜻에서 아호(雅號)를 철농이라 지었다. 대한국정교과서 주식회사 조사역으로 평범한 샐러리맨의 생활을 하며 서도에 정진했다. '서예(世譽)를 불탐(不貪)'해서 국전에는 관여하지 않는다는 서예가로, 특히 전각(篆刻)에 뛰어나서 이승만·윤보선·박정희 등 역대 대통령의 사인(私印)을 각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철농선생의 장생안락부귀존영(長生安樂富貴存榮)

일찍이 무호(無號) 이한복(李漢福)과 위창 오세창 그리고 당시 일본의 전각대가인 이이다(반전수처(飯田秀處))등에게 서예와 전각을 사사하였다. 그 중에 철농에게 가장 영항을 많이 준 스승은 위창으로써 그는 추사에서 오경석 · 오세창 · 이기우로이어 지는 한국서예와 전각의 맥을 이어준 한국 근대전각의 대가로 위창에게 전통적인 예술정신을 통한 전각수업과 전각관련 문헌을 접하게 하여 전각가로서의 길을 본격적으로 이끌어 주었다. 철농은 주로 개인전을 통해 독창적인 작품세계를 발표했는데 1955년에 ‘철농전각소품전(鐵農篆刻小品展)’이라는 국내 초유의 전각전을 개최하여 한국서단에서 전각을 독립된 전시 영역으로 공개함으로써 전각 예술의 불모지를 개척한 선각자적인 면을 보여주었다.

 

철농 이기우 선생 작품

철농의 전각은 진 · 한인을 기초로 하여 등완백 · 오양지 · 조지겸 · 오창석 등의 제 대가들의 기법을 연마해 고법의 고졸미(古拙美)를 전각작품의 표현했으며 또한 고전에 시대감각에 걸 맞는 현대적 추상미를 접목시켜 격조 높은 독창력 작품세계를 확립하였다. 철농은 역대 대통령의 인장을 제작하는 등 많은 전각작품을 남겼으며, 저서로는 그의 전각생활 37년을 정리하여 1972년에 발행한 <철농인보(鐵農印譜)> 전3권이 있다.

 

그의 맥은 하농(荷農) 김순욱(金淳郁) · 모암(茅菴) 윤양희(尹亮熙) · 근원(近園) 김양동(金洋東) · 소정(素丁) 황창배(黃昌培)(사위) · 심설당(尋雪堂) 이종복(李宗馥) · 마하(摩河) 선주선(宣柱善) 등이 이어가고 있다.

황창배(黃昌培,1947~2001년) 화백은 파격적인 작풍으로 '한국화의 이단아'로 불리기도 했다. 1947년 서울에서 태어나 덕수초등학교, 경복중고교와 서울대 회화과 및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ROTC 8기장교로 군복무를 했다.

 

소정 황창배 작품 부천지자만물지역여(夫天地者萬物之逆旅)

월전(月田) 장우성(張遇聖, 1912~2005) 화백에게 동양화를, 철농(鐵農) 이기우(李基雨, 1921~1993) 선생에게 글씨를 각각 배우며 기초를 닦은 뒤 1980년대 초부터 본격적인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먹과 아크릴, 화선지와 캔버스 등 동서양의 재료를 혼합해 기존 한국화의 틀을 깨는 파격과 변화를 추구하는 등 역동적이면서도 자유분방한 그림세계로 독자적인 추상적 한국화 세계를 구축해왔다.

1977년 30세로 국전 문공부장관상, 1978년 31세로 국전 대통령상, 당시 한국화 분야에서는 최초의 대통령상 수상이었다. 1987년 선미술상 등을 수상했으며 1990년에는 도쿄아트엑스포에 참가하기도 했다.

1997년 말에는 중앙일보 통일문화연구소에서 실행한 「북한문화유산조사단」의 일원으로 북한 전역을 방문하면서 북한의 문화 유적지의 풍경 스케치한 그림들로서, 박연폭포, 개성 남대문, 을밀대, 선죽교, 평양 시가지, 아차산, 김일성 묘소, 평양 시민들의 인물도, 북녘의 산하를 담은 작품 전시회를 갖기도 했다. 1997년 북한 스케치에서 보여준 황창배의 작품은 서양화의 신표현주의적이기도 하면서, 우리 전통의 민화적 요소를 현대화시키는 방법을 차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작품 <무제>는 한지에 아크릴 물감으로 그린 작품으로 한국화라고 부르기보다는 모든 형상들을 자유롭게 만들어내고 구성한 소위 "황창배 화풍"의 전형적인 표현형식이다.

세계3대 미술잡지인 프랑스의 월간지 '보자르'는 1997년 그의 작품세계에 대해 '자유에의 길'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1990년 황창배는 서울화실을 정리하고 작업실을 충북 증평 외딴 사과나무 골 옆으로 옮겼다. 그리고 그의 화가로서의 인생의 마지막 10년을 이곳에서 지냈다.

불과 55의 나이로 운명하기 전까지 그의 인생에 가장 많은 걸작을 남긴 것도 충북 증평의 화실에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청주대학교 대학원에서 잠시 강의를 하게 되면서 청주와의 인연도 갖게 되었다.

황 화백은 한국화 <秘52>로 국전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하였지만, 자신을 화려하게 아마추어 화단의 정상에 올려놓았던 보수적인 동양화의 화법을 모두 떨쳐버리고 한국화의 현대화를 개척해 간 선두주자였다.

구상과 추상의 특징을 동시에 화폭에 구현한 황창배의 작품들, 그의 그림 속에는 수많은 글자가 들어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물론 수많은 시화전이 시와 그림으로 이루어지고, 역대 문인 화에서 서권기와 문자향이 감도는 작품도 많지만, 화폭에 낙서하듯 글이나 시를 써 넣은 작품은 황창배의 작품이 효시라고 할 수 있다.

 

황창배는 서울미대 재학시절 연극반장노릇을 했다. 서울미대 연극반을 만들고, 선배인 필자가 연출한 작품에 주인공으로 출연했다. 입센의 <인형의 집>에서는 노라의 남편 헬메르 역, <안네프랑크의 일기>에서는 안네의 아버지 오토 프랑크 역, 윌리엄 사로얀의 <혈거부족>에서는 대왕 역, 역시 필자연출의 서울대 총 연극 회 작품 도스토예프스키 작, 알베르 까뮈 각색, 김현 오태식 공동번역의 <악령>에서는 스테판 트로피모비치 베르호벤스키 교수역으로 출연해 발군의 연기 기량을 보여 동료학생들과 관람객의 갈채를 받았다.

금번 복합문화공간 스페이스 창배에서 鐵農 이기우 선생과 素丁 황창배 화백의 서예 전각 전에서는, 철농(鐵農) 선생의 죽각 행서와 죽각전서, 전서, 염서(染書) 장생안락부귀존영(長生安樂富貴存榮), 전각탁본, 그리고 전서 학수천세(鶴壽千歲), 석고에 전각을 한 애국가 등이 관람객의 눈길을 끌었고,

소정(素丁) 화백의 새옹마도(塞翁馬圖), 부천지자만물지역여(夫天地者萬物之逆旅), 전서, 예서(隸書), 전각장문, 행서(行書), 문인화 연년익수(延年益壽) 여천무극(與天無極), 낙천지명아무우(樂天知命我無憂), 전서 다문택기선자이종지(多聞擇其善者以從之) 등이 관람객의 발길을 멈추도록 만들었다.

철농(鐵農) 이기우(李基雨) 선생과 素丁 황창배(黃昌培) 화백은 장인과 사위지간이다. 스페이스 창배의 이재온 대표가 바로 철농 선생의 재예와 미모를 겸비한 따님이다.

 

12월 30까지 전시되는 연희동의 복합문화공간 스페이스 창배의 파격의 뿌리: 鐵農 이기우와 素丁 황창배 서예 전각 전에 연극인 여러분의 많은 관람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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