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아티스트에디터 박정기(한국희곡창작워크숍 대표). 한국을 대표하는 관록의 공연평론가이자 극작가·연출가. pjg5134@mhns.co.kr

2017 한국연극협회의 연극인 선영 순회참배기

[문화뉴스 아띠에터 박정기] 한국연극협회(이사장 정대경) 주최로 10월 23일 월요일 연극인 선영참배가 있었다.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 앞에 모인 연극인들은 오전 9시에 대절 버스를 타고 선영순회에 나섰다.

정대경 한국연극협회 이사장, 김숙희 세계아동청소년연극협회 한국본부 이사장, 박 웅 전 한국연극협회 이사장, 김병호 전 아시테지 이사장, 권성덕, 최대웅, 심양홍, 오영수, 공호석, 정아미, 김성태, 최현섭, 심 완, 김미지 월간 한국연극 기자 그리고 필자(박정기)가 동참했다.

금년에는 변기종 선생을 비롯해 박 진, 김동훈, 윤조병, 권오일, 장민호, 백성희 그리고 김의경 선생의 순으로 선영을 순회 참배하기로 했다.

우선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 광전리 천주교 세종로교회 영복동산에 안장된 변기종 선생과 박 진 선생 묘역을 방문했다.

변기종(卞基鍾, 1895~1977) 선생은 일제 강점기와 해방이후에 2백여편의 영화와 연극에 출연했다. 본명은 변창규(卞昌圭)이며, 호는 남계(南溪)다.

 

<변기종 선생>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서 태어났다. 명동성당의 전신인 종현 성당이 부설한 학교에 1902년에 입학하여 한학을 공부하였다. 이 학교의 고등과를 1911년에 졸업하고 연극계에 뛰어들었다.

변기종이라는 이름은 1912년 경 연극계에 입문하면서부터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1913년에는 연극 운동의 선구자였던 이기세와 만나 개성에서 이기세가 창립한 유일단에 입단하였다. 이때부터 이기세와의 인연이 이어져, 당시로서는 신선한 시도였던 일본의 신파극을 수입하여 공연하는 활동에 참여하였다.

1919년에는 이기세의 조선 문예단에 합류하였고, 연쇄극 《지기》에서 순이 부친 역으로 출연하였다. 이때 20대 중반의 젊은 나이였으나 노역을 맡았으며, 노역 전문 연기자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이후 신극좌, 조선극우회, 조선연극사를 거쳐 1935년에 청춘좌 단장을 맡았다. 연극 공연과 라디오극 출연, 극단 운영을 겸하였다.

미군정 시기에는 조선연극동맹 산하의 자유극장 위원장에 올랐다. 자유극장은 청춘좌와 성군의 후신 격이었으며, 연극계에 유행한 좌익 사상에 충실한 작품인 《3·1 운동과 만주영감》, 《태백산맥》을 공연하였다. 그러나 점차 미군정의 좌익 탄압이 심화되면서 연극계의 좌파 인맥은 월북하여, 자유극장은 공연을 중단하게 되었다.

변기종 선생은 연극 무대를 주요 활동지로 삼으면서 영화배우 활동도 병행하였다. 데뷔 초기의 연쇄극 출연을 제외하면, 1949년에 출연한 《마음의 고향》이 본격적인 영화 데뷔작이다.

1956년에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으로 피선되었고, 한국무대예술원 부원장, 한국연극협회 고문, 국립극단 단장 등 연극계의 요직에서 활동하였다. 1973년에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여받았다.

 

<박 진 선생>

박 진(朴珍, 1905~1974) 선생은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극작가 겸 연출가이다. 본명은 박승진(朴勝進)이며, 호는 우석(愚石)이다

대한제국 고관 출신으로 일제 강점기에는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낸 남작 박기양의 차남이다. 1911년에 경성부의 명문가 자제들이 다니는 교동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며, 이때부터 연극에 흥미를 가지기 시작했다.

1918년에는 양정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고, 1923년에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도요 대학과 니혼 대학에서 수학했다. 일본 유학 중 연극에 대한 관심이 더욱 깊어졌다. 학교는 졸업하지 못하고 1927년에 귀국했다.

귀국과 동시에 연극 연출로 연극계에 정식으로 데뷔하였으나,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극단 활동은 순조롭지 않았다. 박 진 선생은 1929년에 <별건곤> 기자로 입사하여 한동안 언론인으로 활동하였다. 1934년에 토월회 재기 공연작인 <아리랑고개>가 큰 성공을 거두어 이름을 알리게 되었고, 이 시기부터 연출 외에 극작을 병행하기 시작했다.

1935년에 동양극장이 개관하여 전속계약을 맺고 1939년까지 연출가이자 극작가로서 전성기를 보냈다. 동양극장 공연은 주로 비극과 시대물로 구성되었으나, 박진은 희극에 장기를 보였다. 1939년에 동양극장을 나와 아랑을 설립했으며, 일제 강점기 말기의 총동원 체제에서는 관변기구에서 활동하며 친일 연극을 무대에 올린 기록이 있다.

한국 전쟁 중에는 육군 군예대 소속으로 공연 활동을 했고, 종전 이후로 한국 연극계의 중추적인 인물이 되었다.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을 비롯하여 국립극단 단장, 전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부회장, 한국연극협회 이사장, 한국무대예술연구소 소장 등 연극계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예술원상과 서울시 문화상, 국민훈장을 수여받았다.

일행은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남한산성 희안대로에 있는 한 식당에 잠시 머문 다음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오산리에 위치한 용인가톨릭공원묘지를 방문해 김동훈 선생의 묘역과 윤조병 선생의 납골당에 참배했다.

 

 

<김동훈 선생>

김동훈(金東勳, 1939~1996) 선생은 배우 겸 연출가이다. 서울 출생으로, 경기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 미학과를 졸업하였다. 대학시절부터 연기와 연출을 시작하여 ‘실험극장’의 창립멤버이며 1960년대 연기자의 주역이었다. 용모에 있어서나 정확한 발성, 지성과 감성 등을 고루 갖춘 만능 연기자로 평가받았으며, ‘실험극장’ 대표를 지냈다.

김동훈 선생이 주연한 대표작으로서는 데뷔작 《아들을 위하여>(서울대학)를 비롯하여 <포기와 베스>·<다리에서의 조망>·<안도라>·<무익조(無翼鳥)>·<세일즈맨의 죽음>·<롤러스케이트를 타는 오뚝이>·<심판(審判)>·<에쿠우스>·<햄릿>·<피가로의 결혼> 등 수십편이 있고 연출작품으로서 <오셀로>·<피가로의 결혼> 등이 있다.

 

 

 <윤조병 선생>

윤조병(1938~2017) 선생은 충남 연기 출생으로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다니고, 1967년 국립극장 장막희곡 공모에 <이끼 낀 고향에 돌아오다>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인천시극단 예술감독, 한양여대,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교수를 역임했다. <참새와 기관차>, <농토>, <휘파람새>, <풍금소리>, <아버지의 침묵>, <세상 어머니 노래> <모닥불 아침 이슬> <붓바람> 외 다수 공연하였다. 현대문학상, 동아연극상, 서울극평가그룹상, 백상예술대상희곡상, 한국연극예술대상, 서울연극제희곡상, 중앙문화대상예술상 등을 수상하였다.

극단 하땅세의 대표이자 연출가 겸 무대미술가인 윤시중 군의 부친이다.

다음은 경기도 광주시 오푸음 능평리 시안공원묘지에 위치한 권오일 선생의 납골당을 참배했다

 

 

<권오일 선생>

권오일(1932~2008)선생은 경상북도 영양군 일월면에서 출생했고, 호는 백양(白楊)이다. 1953년 부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57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육심리학과를 졸업했다.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 상담심리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육심리연구소 연구원(1963~64), 한국시청각 교육연구원(1964~65)을 거쳐 서울시립대 교수(1965~1997)를 역임했다.

연극은 1952년 부산 청문극회 창단 동인으로 시작하여 서울대학교 재건연극회 초대 회장(1955~57)을 맡으면서 본격적으로 활동했다. 1956년 「떠오르는 달」과 「상선 테나시티」의 연출을 시작으로 2008년 「물의 노래」(배봉기 작)에 이르기까지 52년간 100여 편을 연출했다.

선생의 연극 활동은 크게 극단, 연극협회, 연출 세 분야로 이루어진다. 1969년 극단 성좌를 창단하여 극단 운영과 연출을 거의 도맡았다. 1989년에는 동숭소극장(종로구 동숭동 1-54 백암빌딩 지하, 150석)을 개관하였는데, 이때 성좌 대표는 배우 전운이었다.

권오일은 한국연극협회 이사장 직을 마치고 성좌 대표로 복귀한 후 극장 이름을 성좌소극장으로 개칭했다. 한국연극협회 이사장(1989~1991)을 맡으면서 그가 세운 공적은 1991년 ‘연극의 해’ 행사를 성공적으로 추진한 것이다.

그의 연출 대표작은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존 오스본 작, 1970),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테네시 윌리엄즈 작, 1980), 「시련」(아서 밀러, 1982), 「적과 백」(이재현 작, 1983), 「밤으로의 긴 여로」(유진 오닐 작, 1984), 「봄날」(이강백 작, 1984), 「검은 새」(정복근 작, 1985), 「느릅나무 그늘의 욕망」(유진 오닐 작, 1985), 「초승에서 그믐까지」(윤조병 작, 1986), 「쟁기와 별」(오케이시 작, 1989), 「세일즈맨의 죽음」(아서 밀러 작, 1989),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테네시 윌리엄즈 작, 1998), 「아카시아 흰꽃은 바람에 날리고」(이근삼 작, 1998) 등이다.

권오일 선생은 극단 성좌를 이끌면서 미국 현대극을 주도한 유진 오닐, 아서 밀러, 테네시 윌리엄즈 등의 주요 사실주의극을 연출하고, 아일랜드 극작가 숀 오케이시의 「쟁기와 별」을 초연하는 공로를 세웠다. 또 이재현, 이강백, 윤조병, 정복근 등 한국 대표 극작가의 현대희곡을 초연하는 데도 노력을 기울였다. 그의 연출세계는 리얼리즘에 바탕을 두고 있다.

특히 「세일즈맨의 죽음」,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느릅나무 그늘의 욕망」 같은 현대 리얼리즘극의 고전을 극단 성좌의 상설 레퍼토리로 자주 연출함으로서 대중에게 리얼리즘극의 무대와 연기술에 친숙하게 만든 점을 공적으로 꼽을 수 있다.

1983년 성좌의 「적과 백」(이재현 작)으로 대한민국연극제 대상 및 희곡상을, 1984년 성좌의 「봄날」(이강백 작) 연출로 대한민국연극제 대상, 연출상, 미술상을 수상하였다. 1985년에는 서울시 문화상을, 2002년에는 문화훈장 보관장을, 2005년에는 한국예술발전상을 수상했다.

마지막으로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야탑돌 메모리얼 파크에 있는 장민호, 백성희, 김의경 선생의 납골당에 참배를 했다.

 

 

<장민호 선생>

장민호(1924~2012)선생은 황해도 신천 출생으로 1946년 월남하여 1947년 광복 후 특1기로 KBS(당시 서울중앙방송국) 방송극단 연구원 1기로 입사했다. 당시 동기로는 조남사, 황태수, 민구 등이 있다. 그 후 2기 연구원으로 이춘사, 구민, 최무룡, 이혜경 등을 뽑았는데 이들이 현재 KBS 특기 성우로 분류된다.

원로연기자로 잘 알려져 있지만 대한민국 최초의 전문 성우 중 한명이다. 당시에도 성우라는 말은 없었다고 한다. 물론 그 이전에도 광복 이전에도 한국어 라디오 방송극은 존재했고 그 때 목소리 연기는 주로 복혜숙 등 기존 연극 배우들이 맡았다고 한다.

지금 같으면 연예인 더빙 논란으로 성우 커뮤니티가 부글부글 끓을 일이지만 그 당시만 해도 라디오극에 연극배우들이 출연하는 관례였고, 이는 1960년대까지 이어졌다. 백성희, 나옥주, 피세영 선생 등이 이에 해당한다. 당시 중앙방송국 1기 연구원 중에서 성우로 왕성히 활동했던 이는 장민호 선생 한 명뿐이다. 나머지는 연극배우, 프로듀서, 작가로 활동분야를 옮겼다. 한국연극협회 초대 이사장과 국립극단 단장을 역임했다. 2011년에 선생의 이름을 딴 백성희장민호 극장이 개관했다.

 

 

<백성희 선생>

백성희(본명 이어순이, 1925~2016) 선생은 서울에서 태어나 17세에 빅터무용연구소 연습생, 빅터가극단 단원을 거쳐 1943년 극단 현대극장 단원으로 입단, 같은해 연극 ‘봉선화’로 데뷔했다.

선생은 1950년 창단한 국립극단의 현존하는 유일한 창립 단원이자 현역 원로단원이었다. 18세에 연극 무대에 데뷔한 이후 70년 넘게 한 길만을 걸어온 한국 연극사의 산증인으로 꼽힌다.

1972년 국립극단에서 처음 시행한 단장 직선제에서 최연소 여성 단장으로 선출돼 1974년까지 재직했고, 리더십과 행정력을 인정받아 1991∼1993년 다시 한번 단장을 지냈다. 1998년부터 국립극단 원로단원에 이름을 올렸다. 2002년부터는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으로 활동했다.

2010년 국내에서 처음으로 배우의 이름을 따 문을 연 극장인 ‘백성희장민호극장’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고인은 회고록 ‘연극의 정석’에서 밝혔듯 “작품은 가려서 선택하지만, 배역은 가리지 않는다”는 신조로 평생 400여 편의 연극에서 다양한 역할을 맡았다.

최근까지도 ‘3월의 눈’(2013), ‘바냐아저씨’(2013) 등에 출연했다.

특히 국립극단은 백성희 선생이 “내 연극 인생의 거의 전부를 바쳤던” 곳이다. 1950년 국립극장 창립단원으로 합류한 이래 계속 몸담았다.

대표작으로 <봉선화>(1943), <뇌우>(1950), <나도 인간이 되련다>(1953), <씨라노 드 벨쥬락>(1958), <베니스의 상인>(1964), <만선>(1964), <달집>(1971), <무녀도>(1979),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1981), <메디아>(1989), <강 건너 저편에>(2002), <3월의 눈>(2011) 등이 있다.

한국연극영화예술상(제1회 백상예술대상,1965), 동아연극상(1965), 3.1연극상(1969), 대통령표창(1980), 보관문화훈장(1983), 대한민국연극제 여자주연상(1985), 동랑유치진연극상(1988), 대한민국문화예술상(1994), 이해랑연극상(1996), 춘강상(1997), 대한민국예술원상(1999), 비추 미여성대상(2009), 은관문화훈장(2010) 등을 수상했다.

 

 

<김의경 선생>

김의경(1936~2016) 선생은 평남 순안에서 태어나 서울사대 부속고교와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1970 미국 브랜다이스대학원 연극학과 졸업, 1983 미국 하와이대학교 연극학과를 수료(∼1984)했다.

1960 극단 [실험극장] 창립동인, 1961 MBC 청설 멤버, 1964 TBC 창설 멤버, 1964 ‘세익스피어 탄생 400주년 기념축전 위원회 사무간사, 1964 국제극예술협회 한국본부 사무국장(∼1968), 1971 서울대⋅국제대⋅동국대⋅고려대⋅덕성여대 강사(⋅1974), 1971 서라벌예술대학 부교수, 연극영화학 과장(∼1973), 1973 중앙국립극장 공연과 초대 과장(∼1976), 1976 극단 [현대극장] 대표, 1971 서라벌예술대학 연극영화과 부교수(∼1973), 1973 국립극장 공연과장(∼1976), 1981 국제극예술협회 한국본부 부위원장(∼1994),

1982 한국국제아동청소년연극협회 초대 이사장(∼1986), 1986 제15대 한국연극협회 이사장(∼1988), 1993 국제극예술협회 음악극분과위원회 이사(∼2000), 1994 서울시극단 단장(∼2000), 1994 베세토 연극제 조직위원장, 1995 국제극예술협회 한국본부 회장(∼1999), 1997 국제극예술협회 한국본부 위원장(∼2000), 1997 국제극예술협회 세계총회 집행위원장, 1997 서울시립극단 초대 단장 겸 예술감독(∼2000), 1997 한국5공립극단협의회 회장, 2001 공연문화산업연구소 이사장, 2002 <의정부음악극축제> 집행위원장 겸 예술감독, 2004 서울예술단 이사, 2007 <세계국립극장 페스티벌> 조직위원장을 역임했다.

1975 백상예술상 희곡상 - <남한산성>, 1975 한국연극영화예술상 작품상 - <남한산성>, 1985 색동회 눈솔상, 1986 백상예술상 희곡상 -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 1989 문화훈장 보관장, 1990 한국ꥶᅨ술문화단체총연합회 예총예술문화상, 1991 서울연극제 희곡상 - <길 떠나는 가족>, 1995 한국뮤지컬협회 공로상, 2001 문화관광부 대한민국문화예술상, 2007 한국예술발전협의회 한국예술발전상, 2015 예술원상 연극영화무용부문을 수상했다.

<애욕(愛慾)의 우화(寓話)>(실험극장 초연 1963) <갈대의 노래>(문학춘추.1964) <신병후보생>(문학춘추.1964) <남한산성>(1973) <논개>(1975) <함성>(1976) <원효대사>(1976) <북벌>(1978) <삭의 계절>(1982) <식민지에서 온 아나키스트>(1984)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1985) <조국은 외롭지 않다>(1986) <처용무>(1987) <길 떠나는 가족>(1991) <팔만대장경>(1999) <나비찬가>(2004) 등을 발표 공연했다.

저서로는 희곡집 <남한산성>(한국연극사.1977) 번역서로는 <세계 신경향 희곡선>(성문각.1976) <연극론 12장-아더 밀러 연극론집>(문학사상사.1978) <스즈키 연극론>(현대미학사.1993) <경극과 매란방>(지성의샘.1993) 등이 있다.

오후 5시가 넘어 연극인 선영 순회참배를 마친 일행은 한 시간이 지난 여섯시 30분 쯤 최초에 출발했던 마로니에 광장에 도착해 저녁식사를 함께 한 후 2018년에는 차범석 선생의 묘역이 있는 목포에를 참배하러 가기로 예정하고 각자 귀가 길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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