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endipity가 사라진, 문화를 잃어버린 삶의 말로

   
[글] 문화뉴스 아띠에터 조형근 kareljay@mhns.co.kr Temporary title : My dreams.

'헬조선, 지옥불반도, N포세대'

요즘의 대한민국은 뜨겁다. 청년들 사이에서 유행처럼 쓰이는 저 단어들은 한국이 뜨겁게 타오르고 있는 나라임을 여실 없이 보여주고 있다.

대학교를 들어가기 위해 하루의 절반 이상을 공부하는 것에 투자하는 것도 모자라서 대학교 입학 후에는 취업하기 위해 하루의 절반 이상을 스펙 쌓기에 투자하는 청년들. 조금이라도 남는 시간이 생기면 깜깜한 취업난에 '뭐 하고 살지'라는 생각으로 한숨을 내뱉기 일쑤고, 설령 취업이 된다 한들 학교에서는 배울 수 없었던 암묵적인 사회의 규칙, 이른바 '어른의 사정'에 부딪쳐 '내가 이러려고 공부한 게 아닌데'라고 생각하며 지친 몸을 이끌고 버스와 지하철에 카드를 찍고 내리는 건 주변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일상이 되었다.

   
 

그리고 청년들은 이제 입을 모아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헬조선은 이 맛에 사는 겁니다'

'기회만 있으면 이민 가서 떠나서 살고 싶다'

'기성세대가 우리에게 해준 건 무엇이냐'라고.

세계 30위권 이내의 경제 규모 국가를 이끌어갈 청년들이 자국에 대한 비하를 넘어서 혐오 수준의 비난을 보내고 있다.

어려운 현실에 연애를 포기하고, 결혼을 포기하고, 출산을 포기한다는 신조어가 나올 정도로 젊은이들이 국가에 보내는 시선은 차갑기 그지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면서도 수도권 출퇴근길은 아침에 정체되지 않는 적이 없고 유명 프랜차이즈 커피숍엔 항상 사람들이 북적거리며 인천공항은 성수기와 비수기를 막론하고 어디론가 떠나려는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는 것도 현실이다.

힘든 것일까, 아니면 힘들지 않은 것일까. 상기에 서술했던 자국 비하의 세태는 몇 년 전에는 그렇게 크게 대두되지 않았던 표현들이다. 그 당시에도 88만 원 세대 등 사회적으로 문제를 지적하는 표현은 있었지만 그것은 비하와 비난보다는 비판에 가까웠다. 그렇다면, 한국은 언제서부터 헬조선이 되기 시작했던 걸까.

필자는 이런 문화가 발생한 배경을 2가지 측면에서 바라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첫째는 SNS고, 둘째는 일정 부분 기성세대의 교육방식에 큰 책임이 있다.

트위터와 페이스북, 그리고 최근의 인스타그램으로 대변될 수 있는 SNS 안의 세상은 매우 극단적이다. 최고로 행복하거나, 아니면 최고로 불행하거나. 아름다운 경치에서 찍은 '#힐링여행' 이라든지, 유명 맛집에서의 '#먹스타그램' 등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반면에 사고를 당한 사람의 사진과 함께 '1 like = 1 $', 대나무숲 등지에서 '꼭 퍼뜨려주세요' 등 또한 흔하게 볼 수 있는 SNS 풍경이다. 무척이나 강력하고, 손쉽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방법이다.

이는 언론매체의 문제점과도 맥을 잇는 부분인데, 중요한 점은 '사실과 무관한' 내용을 입맛대로 가공하여 퍼뜨릴 수 있다. 내가 실제로 행복하고 행복하지 않고는 중요하지 않다. 단지 부러움을 살 만한 멋진 사진 한 장이면 나는 행복하게 보이는 것이다.

   
 박.탈.감…

행복을 자주 접하다 보니 나에게선 상대적 박탈감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상대적이라는 말은 말 그대로 상대적이기에, 매일 삼겹살을 먹는 사람이 꽃등심을 먹는 사람을 보고 나는 저렇게 살지 못하겠지, 라는 생각으로 불행하다고 여기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말과 같다.

   
 

그 밑에 뒷다리 살을 먹기도 힘든 사람이 자기를 부러워할 수 있다는 건 중요하지 않다. 그리고 필자 또한 그런 예를 들어서 자신을 알고 행복을 억지로 느끼라는 말을 하고 싶지는 않다. 그런 논리라면 결국 세상은 최상위 1명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불행함을 느끼며 살아가야 한다는 말과도 같기 때문이다. 인터넷상에서 유명한 말이 있지 않은가.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라고.

이는 다시 말해 청년 세대가 갖고 있는 기아감에서 오는 '욕망'으로 해석될 수 있다. 욕망이란 어떤 측면에서 볼 때는 매우 긍정적인 면으로 사용될 수 있다. 현재의 상황이 만족스럽지 않기 때문에 더 낫게 살고자 하는 삶의 원동력이 될 수 있다.

다시 말해 희망을 줄 수 있는 장치가 된다. 반면 욕망은 지나치게 되면 그를 성취할 수 없음을 깨닫고 절망으로 바뀌어 포기하고, 비난하는 포도 밑의 여우가 되는 경우로도 이어질 수 있다. 그렇게 변하고 난 후에는 만족이란 말을 모르게 된다. 그리고 이는 우리가 받아온 교육에서 일정 부분 이유를 찾을 수 있다…(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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