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가 있는 날·예술이 있는 삶을 빛냅니다…문화뉴스] "나는 카메라다. 셔터를 열어놓고, 생각하지 않으며, 수동적으로, 기록만 하는." - '베를린이여 안녕' 中

20세기 영미문학에서 중요한 작가 중 한 명인 크리스토퍼 이셔우드의 대표작 '노리스 씨 기차를 갈아타다'와 '베를린이여 안녕'이 창비세계문학 45, 46번으로 국내 초역됐다. 2000년대 들어서도 일기와 서간집, 관련 다큐멘터리 등이 꾸준히 나오며 관심을 받아온 이셔우드는 영화 '싱글 맨'의 개봉으로 한국 독자들에게도 소개된 바 있다.

'노리스 아서'라는 의뭉스러운 인물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사건들을 그린 장편소설 '노리스 씨 기차를 갈아타다'와 '나'가 만난 각양각색의 인물들을 섬세하게 그려낸 중단편선 '베를린이여 안녕'은 각기 독립적인 작품이기도 하지만, '베를린 이야기'라는 하나의 연작으로, 서로 맞물리는 시공간과 등장인물, 연속되는 이야기들이 하나의 큰 그림을 이루며 1930년대 베를린 사회를 생동감 있게 재현해낸다.

이셔우드는 자전적 체험을 바탕으로, 국제도시 베를린의 독특한 활기와 매력, 바이마르 말기의 음울한 사회 분위기, 나치의 부상이라는 혼란스러운 시대 상황을 외지인의 담담한 시선으로 포착하며 그곳을 살아가는 다양한 인간 군상을 우스꽝스럽고도 사랑스럽게, 씁쓸하면서도 다정하게 하나하나 곱씹어 그려낸다. 이 두 권의 '베를린 이야기'는 '타임'지 선정 '100대 영문 소설'로 꼽히는 등 현대의 고전으로 자리매김하였으며, 할리우드 고전 뮤지컬 '까바레', 영화 '까바레', '나는 카메라다'의 원작 소설로 대중적으로도 널리 사랑받아왔다.

무엇보다 '베를린 이야기'는 영국인 청년 '나'의 시선으로 바이마르 공화국 말기를 정밀하고 생생하게 보여주며 다큐멘터리적 재미를 선사한다. 작품은 정치적 신념, 우정, 모든 면에서 수상쩍은 노리스 씨, '나'가 영어를 가르쳐주는 독일 상류층 사람들, 귀족이자 은폐된 동성애자인 프레그니츠, 유대인 갑부 란다우어 집안, 예술적 재능이나 성적 서비스를 팔며 살아가는 쌜리 볼스와 마이어 같은 젊은 여성들, 사회 밑바닥을 헤매며 절도와 성매매로 연명하는 노동계급 청년들과 그 가족들을 세밀하게 들여다보고 묘사한다. 이셔우드는 짧은 기간 머물며 지켜본 베를린의 모습을 바탕으로 이들 인물을 마치 살아 있는 사람들처럼 인상적으로 만들어내는데, 이렇듯 실감 나는 군상의 창조는 화자가 시종일관 '카메라'의 역할을 자처하며 유지하는 독특한 거리감과 시야에서 비롯하는 것이기도 하다.

   
▲ 크리스토퍼 이셔우드

'노리스 씨'의 '윌리엄'이나 '베를린이여 안녕'의 '이셔우드'는 모두 작가의 분신으로, 이들 화자는 냉정한 관찰자의 위치에서 벗어나지 않고 생각하지 않으며, 수동적으로 기록하는 데 집중하며 어떤 상황에도 결정적으로 휘말리지 않는다. 베를린에 거주하는 외국인이라는 특수한 신분 덕에 바이마르 말기의 치열한 정치적 격동에서도 한 발짝 비켜서고, 외국어 개인교사로써 근근이 먹고살며 금전적으로 궁지에 몰려 일련의 사건들에 휩쓸리는 일도 없이, 화자는 냉담하지만 내밀한 관찰자의 자리를 지키며 그저 가만히 주변을 관찰하고 생각과 느낌을 서술해나간다.

이러한 화자의 독특한 거리감은 비단 외국인이라는 데서만 오는 것은 아니다. 일찌감치 동성애자임을 자각한 뒤 중상류층이자 엘리트 계층에 속한 자신의 특권을 포기하고 당시 '동성애자들의 도시'였던 베를린으로 떠나온 이셔우드의 성 정체성 역시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베를린 이야기'의 서술자는 동성애자로 명시되지는 않으나, 어설프나마 야릇한 기류가 흐르는 프레그니츠 남작과의 일화들이나 오토와 피터 커플과의 관계, 베를린 밤 문화들을 탐사하는 장면에서 암묵적으로 드러난다. 특히 쌜리 볼스나 나탈리아 같은 여성 인물들과의 관계에서 친밀하지만 사랑하진 않는 미묘한 거리를 형성하며, 남성 이성애자들의 관습적인 시선에서 벗어나 좀 더 섬세하고 냉정하면서도 공감을 잃지 않는 태도를 가능하게 해준다.

이처럼 성 정체성을 공공연히 천명하지는 않으나 굳이 숨기지도 않는 서술자 혹은 작가의 태도는 당시 바이마르 체제하의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가능한 것이었는데, 작품에서도 드러나듯 나치가 부상하고, 타민족, 성 소수자, 사회주의자로 탄압이 확대되고 사회적 위협이 거세지기 시작하면서 상황은 급변한다. 이런 격동 속에서 이셔우드는 동성애자임을 적극적으로 부정하지는 않지만, 조심스럽게 묻어두는 방식으로 자신의 분신인 화자를 설정하게 되고, 이는 오히려 '베를린 이야기'에 폭넓은 의미의 국외자, 소수자의 감성과 서술상의 긴장을 부여함으로써 외연을 확장하는 결과를 낳는다. 작품에서는 자유분방한 베를린이 내어준 공간과 나치의 등장으로 조심스레 감추어진 부분들이 묘하게 엇갈리는데, 이런 모호성은 도리어 동시대를 기록한 많은 작품 중에서도 이 작품이 지닌 독특함과 매력을 설명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셔우드는 '저자 서문'에서 원래 '베를린 이야기'는 더 방대한 규모로 구상했으며, '없어진 사람들'이라는 제목을 붙이려 했다고 밝히며, 여기서 '없어진 사람들'은 나치즘과 2차대전의 격랑 속에 사라진 사람들을 이르기도 하지만 점잖은 사회가 기겁하면서 피하는 사람들을 의미하기도 하다고 설명한다. 그리하여 작가는 격동기를 장식한 중요하고 비범한 인물들을 다루는 대신, 슈뢰더 부인의 천태만상 하숙인들과 노리스나 쌜리 볼스 같은 범속한 사람들, 하다못해 상류층인 프레그니츠 남작이나 부유한 란다우어가 사람들마저도, 하나같이 기겁할 만한 인물에 눈길을 돌려 베를린을 구성하는 대다수 삶, 우리의 시야에서 없어진 인물들을 포착한다.

   
 

경박하고 가벼운 쌜리 볼스, 배신과 충정을 아무 거리낌 없이 넘나드는 노리스 같은 인물들, 그리고 그들과 뒤엉켜 유치하고 어리석은 실수들을 저지르는 '나'는 결함과 모순으로 가득하고 대개는 어디에도 딱히 쓸모가 없는 인물들이다. 그리고 화자는 이 모든 잘못들과 유치하고 때때로 비열하기까지 한 행동들을 변명해주는 법도 없이 특유의 냉담함으로 고스란히 기록해나가지만, 부박한 인간 존재에 대한 차가운 조롱과 자조로 그치지 않고, 있는 그대로 관찰하고,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속 깊은 애정을 드러낸다. 제 이익을 챙기려고 주변 사람들을 위험에 빠뜨리는 노리스든 어처구니없는 행동을 하고 마는 쌜리든 대책 없는 오토든, 이셔우드는 번번이 "아직도 나 좋아하는 거지?"하고 우물쭈물 물어오는 이들에게 몇 번이고 화자의 입을 빌려 말해준다. "응, 나 아직도 당신 좋아해."

생계는 물론, 생사마저도 위중한 사회에서 그 속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애틋하고 씁쓸하게 지켜보는 것, 그리고 국외자로서 거리를 두고 바라보되 섣불리 판단하지 않으며, 거의 모든 이들의 삶에 내재한 비속함과 항상성에 마땅한 존중을 표함으로써 '베를린 이야기'는 단순한 다큐멘터리나 자전적 기록을 뛰어넘는다. 이셔우드는 역사의 한순간을 생생하게 포착해내는 한편으로, 실망하고 자책하고 웃고 떠들고 한바탕 인생이 소용돌이친대도, 결국 "이렇든 저렇든,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삶은 계속된다"고 담담하게, 위로하듯 말해주고 있다.

문화뉴스 양미르 기자 mir@mhn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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