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뉴스 MHN 석재현 기자] 지난 9일에 개봉한 '러빙 빈센트'는 불세출의 화가이자 미술계에서 독보적인 한 획을 그은 빈센트 반 고흐 사후 이야기를 담아냄과 동시에 그의 작품으로 애니메이션을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명화는 명화다'는 평에 걸맞게, 영화 또한 수작으로 평가받으며 전문가들과 관객들에게 호평받으며 다양성영화 부문 박스오피스 1위에 올라서는 기염까지 토했다.

또한 '러빙 빈센트' 덕분에, 빈센트 반 고흐가 남긴 수많은 작품과 극 중 등장하는 인물들이 재조명되고 있다. 실제로 '러빙 빈센트'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상당수가 실존 인물이자, 실제 반 고흐의 작품으로도 남아있기에 놀라움을 안겨다 주고 있다. 그래서 이번 편은 '러빙 빈센트'의 여운을 잊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극 중 인물들의 발자취를 따라가고자 한다.

 

조셉 & 아르망 룰랭 부자

빈센트 반 고흐의 죽음을 뒤따라가는 '러빙 빈센트'의 주인공인 아르망 룰랭과 그의 아버지이자 반 고흐의 편지를 전하려고 했던 조셉 룰랭. 룰랭 부자와 반 고흐의 인연은 188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888년, 반 고흐는 프랑스 남부지역인 아를로 이사하였다. 그는 아를에서 '해바라기'와 '밤의 카페 테라스' 등을 그렸고, 룰랭 가족의 초상화도 그렸다. 또한, 아를 생활은 반 고흐의 삶 중 가장 행복한 시간이자, 그가 자신감이 넘쳤던 시기였다. 그리고 폴 고갱과 함께 작업했던 시기로도 알려져 있다.

▲ ⓒ 반 고흐 갤러리, Museum Folkwang / 조셉 룰랭의 초상화(좌), 아르망 룰랭의 초상화(우)

1841년생인 조셉 룰랭은 1868년 자신의 부인인 오귀스틴과 결혼하였고, 기차역에서 근무했다. 그러다 1888년 아를로 이사 온 반 고흐와 절친한 친구가 되었고, 반 고흐는 조셉을 수차례 소크라테스와 비교하면서 그를 "좋은 영혼을 가졌고, 현명하며 기분 좋게 만들며 믿을만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또한, 조셉은 반 고흐의 가장 좋았던 시절과 동시에 그가 아를 병원에서 지냈던 어려운 시기를 함께 보냈다.

조셉 룰랭의 세 아들 중 첫째인 아르망 룰랭은 1871년에 태어났고, 반 고흐는 아르망이 17살이었던 당시 그를 만나 그의 초상화를 그렸다. 당시 아르망은 집을 떠나 대장장이 수습생으로 있었던 시기였다. 반 고흐는 아르망의 초상화를 두 점 남겼는데, 두 작품의 모습이 상당히 대조적이다.

▲ ⓒ 오르셰 미술관, Kunstmuseum Basel / 폴 가셰의 초상화(좌), 피아노를 치는 마르가르트(우)

폴 & 마르그리트 가셰 부녀

'러빙 빈센트'에서 빈센트 반 고흐의 죽음과 가장 연관된 부녀로 등장하는 폴 가셰와 그의 딸 마르그리트 가셰 또한 실존 인물이다. 폴 가셰는 반 고흐가 사망하기 직전까지 주치의를 맡은 것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반 고흐 이외에도 카미유 피사로와 폴 세잔, 오귀스트 르누아르, 에두아르 마네 등 다른 화가들을 환자로 두고 있었다.

1828년생인 폴 가셰가 빈센트 반 고흐와 처음 만나게 된 건 1890년이다. 그는 반 고흐를 "근심으로 경직된 얼굴의 소유자로서 노이로제를 앓고 있고, 나보다 더 아프거나 최소한 나와 비슷하게 아픈 사람으로 보인다"고 묘사했고, 그의 치료를 전담했다.

 

그 후 1주일에 한 번 반 고흐는 폴 가셰의 집에 찾아와 그의 딸인 마르그리트 가셰를 그림으로 그렸다. 그리고 폴은 답례 차 빈센트의 집에 찾아가 그의 그림을 칭찬하며 관계를 유지해왔다. 반 고흐는 폴 가셰를 "또 다른 형제 같은 사람"이라고 표현하기까지 했다.

반 고흐가 그린 마르그리트 가셰의 두 점의 초상화는 당시 마르그리트가 19~20세 나이였을 때 그린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일부는 빈센트와 마르그리트가 숨겨진 연인이 아니냐고 제기했지만, 근거 없는 소문이다. 다만, 마르그리트는 44세가 될 때까지 자신의 침실에 빈센트가 그려준 초상화를 걸어놓았다고 알려져 있을 뿐이다.

 

줄리앙 프랑수와 탕기

일명 '탕기 아저씨'로 불리던 줄리앙 프랑수와 탕기는 1873년 파리 몽마르트 클로젤 거리에서 화방을 연 이후, 많은 화가와 교류를 가져왔던 물감 상인이었다. 특히, 탕기는 가난한 화가에게 물감을 외상으로 주기도 하고, 화구값 대신에 화가들의 그림을 받기도 하는 등 배고픈 화가들에게는 고마운 존재였다.

1886년 빈센트 반 고흐는 자신의 동생 테오 반 고흐를 통해 탕기를 알게 되었고, 탕기 덕분에 반 고흐는 에밀 베르나르, 존 러셀, 앙리 드 툴루즈-로트레크 등과 교류를 쌓을 수 있었다. 탕기는 당시 제값을 못 받는 반 고흐의 작품을 기꺼이 받았고, 그의 친절함에 반 고흐는 그의 초상화를 무려 3점이나 그려주는 것으로 답례하였다.

그 후 반 고흐가 생레미에 있는 생폴 드 무솔 요양원에 들어가면서부터 인지도를 쌓게 되자, 탕기는 그의 작품을 가장 먼저 자신의 화방에 전시하기도 했고, 이후 그가 죽던 날 빈센트의 동생인 테오를 비롯해 베르나르, 가셰 등과 함께 그의 묘지를 지키는 등 의리를 지켰다.

 

아들린 라부

1890년 7월 27일, 빈센트 반 고흐가 피를 흘리고 오는 모습을 가장 먼저 목격한 이가 있었으니, 바로 그가 묵었던 오베르의 '라부' 숙소의 딸인 아들린 라부였다. 아들린은 사건이 발생하기 2달 전, 반 고흐가 처음 숙소로 찾아왔을 때부터 가장 먼저 친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들린은 이틀 뒤인 7월 29일, 빈센트 반 고흐가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옆에서 지켜본 사람 중 한 명이었고, 빈센트의 동생인 테오가 자신의 형의 마지막 말을 듣고 있을 때도 있었다. 아들린은 당시 반 고흐가 뭔가 더 말을 하려고 했으나 끝내 하지 못한 채 죽었다고 증언했으며,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자신은 알고 있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그 내용에 대해선 끝까지 언급하지 않았다.

빈센트 반 고흐는 아들린의 초상화 또한 세 점이나 그렸다. 그만큼 아들린과 그의 가족과 친하게 지냈다는 의미였기도 했다. 이를 바탕으로 '러빙 빈센트'에서 아들린은 상당히 중요한 인물로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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