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한 건 발음이 아닌 발화량이다

 
[글] 문화뉴스 아티스트에디터 조형근kareljay@mhns.co.kr. 글을 쓰고 싶은 음탕한 욕망이 가득하나, 스스로를 일단은 억눌러야 하는 현실.답은 유명해지는 것 뿐일지도 모른다.

필자는 외국계 제조업 회사에서 근무하고 있다. 본사는 미국에 있고, 전 세계에 법인이 설립되어 있는 회사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영어를 사용해야 하는 환경에 놓여 있다.

아침에 오면 미주 지역과 연락하고, 저녁이 되면 유럽 지역과 연락하는 시차에 따른 업무 집중 시간 또한 정형화되어 있다. 그러나 필자는 영어를 그렇게 썩 잘하지는 못한다. 아마도 세상 사람들이 외국계 회사원에게 기대하는 수준에는 정말 못 미칠 거라고 생각한다.

발음이 좋은 편도 아니고, 원어민처럼 발화량이 많지도 않다. 결정적으로, 어학연수는 단 한 번도 나가본 적이 없다. '미국, 어디까지 가봤니?'란 질문에 미국 쪽으로는 게이트도 못 가봤다고 얘기한다. 그렇게 문득 퇴근하던 도중, 우리나라의 영어 상황에 대한 몇 가지 생각이 들어 오늘은 그를 주제로 얘기하려 한다.

사실, 한국 사람이라면 영어를 굉장히 잘해야 정상이다.

그동안 쏟은 공부량을 생각한다면 영어를 정말 잘해야 한다. 우린 어릴 때부터 ABC를 한글만큼이나 쓰고 읽고, 초중고 과정 동안 무려 12년 동안 모국어인 국어 시수와 비슷하게 영어 시수가 편성되어 있다. 그리고 실제로, 한국 사람들은 객관적으로 봐도 영어 잘한다. 길거리에 웬만한 사람 붙잡고 물어보면 청취는 정말 잘 될 거다. 회화는 차치하고서라도 그만큼 공부해 왔기 때문에 적어도 완전 말을 못 알아들을 정도의 사람은 고등교육을 정상적으로 이수한 사람이라면 많지 않을 거다.

그런데 왜 우리는 항상 영어를 어려워할까? 왜 토익 만점자도 회화에 쩔쩔매고, OPIC이나 토익 스피킹 고득점자들도 외국 사람 앞에 가면 작아질까? 사람들은 말한다. 한국식 영어 교육은 회화에 치중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실용성이 없기 때문이라고, 주입식 교육에 대한 폐해라고. 그리고 유투브 등에 한국말을 잘하는 원어민이 생활영어 동영상 등을 올려두면 '학교에서 안 배운 말 여기서 배워가네요' 라거나, '학교에서도 이런 말을 가르쳐줘야 할 텐데'라거나 라는 말을 하곤 한다.

   
 

사실 학교에서 왜 생활영어를 가르쳐주지 않냐고 불평하는 건 정말 본질을 잊은 불평과도 같다. 학교는 표준을 가르쳐야 하기 때문이다.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라는 질문에 어떤 식으로 교과서에서 교육받았는지를 생각해 보자. '저는 oo살 입니다'라고 교과서에 나와 있을 테고 우리 모두 그런 식으로 국어를 배웠다. 그리고 실생활에선 상황에 따라 'oo살이요' 정도로 축약해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물론 필자도 수능 영어나 토익 영어같이 일상생활에 안 쓰는 단어까지 억지로 꿰맞춰 문제를 만드는 등 하는 건 지적하고 싶지만, 본질적으로 학교에서는 표준 영어를 가르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물론 한국의 주입식 교육에는 문제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필자는 그와 별개로 한국인들이 영어를 지나치게 완벽하게 구사하기 위해 영어를 어렵게 받아들이는 것이 더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저번에도 얘기했지만 필자는 현 직장에 다니기 전, 체코에 진출된 국내 대기업 공장에서 약 4년여 간 근무했다. 필자는 체코어를 전공했기에, 보통의 의사소통은 체코어로 진행했고, 체코인과 한국인이 섞여 있을 경우에는 전원이 이해해야 하기 때문에 영어를 사용했다.

물론, 필자는 영어를 잘하는 사람이 아니고, 그건 체코인도 마찬가지였고, 대기업 출신 주재원들이라고 별반 다르지 않았다. 쩔쩔매고, 단어가 생각나지 않아 머리를 긁적이며, 그림을 그려가며 때로는 설명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우리는 업무를 별문제 없이 진행한다. 물론 의사소통이 모국어만큼 원활하지 않기 때문에 문제는 조금씩 있으나 절대로 업무를 '완전히 못 할' 정도로의 문제는 생기지 않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유난히 발음을 중시하는 편이 있는데, 필자의 해외생활 및 외국계 회사 근무 중에서 발음이 문제가 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유럽 대륙식 영어와 인도식 영어, 일본식 영어와 미국 영어가 섞인 회의를 참석해 본 적이 있는가? 그리고 그곳에서 미국 영어를 쓰는 화자가, 발음이 안 좋아서 못 알아듣겠다는 말을 할까?

중요한 건 발음이 아닌 발화량이다!

하고 싶은 말을 표현하는 표현력이 중요한 것이지 발음은 같은 미국이나 같은 영국 내에서도 제각기 다르다. 우리나라도 부산 억양 서울 억양이 다른데 어찌 표준 억양을 구사해야 언어를 잘한다고 얘기할 수 있을까?

하지만, 이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과연 왜, 한국인들이 영어를 유창하게 사용해야 하느냐에 대한 질문일 것이다. 영어를 12년 동안 배우는 것도 모자라 대학교 졸업, 기업 입사, 승진 시험에까지 영어점수가 필요하다. 해외 업무를 주로 수행해야 하는 사람이라면 응당 요구될 수 있는 사항이겠지만, 국내 영업직이라거나, 주민센터 공무원 같이 영어를 쓸 일이 거의 없는 사람은 왜 영어를 해야 할까? 본인이 잘하고 싶어서, 본인이 여행이나 친구를 사귀려고 배우는 게 아닌데도 강압적으로 영어를 밀어붙이는 이 상황은 내 생각에 영어공부를 정말로 비효율적으로 만드는 원인이라고 본다. 말로는 영어를 잘해야 한다고 하는데 '왜' 잘해야 되는 지를 설명을 못 하는 것이다. 일찍 배워두면 좋다? 나중에 언젠가 쓸 일이 있다? 그런 논리라면 영어뿐만이 아닌 모든 분야에 만능인 인간이 되어야 하고, 이는 지극히 비현실적인 논리다. 편의점 아르바이트도 혹시 외국인 손님이 올지 모르기 때문에 회화능력이 필요하다고 할 기세다.

정리하자면, 우리나라의 영어는 '왜' 해야 하는지는 모르지만 '모국어'만큼이나 중요시되는 언어고, 그에 따라 '불필요한 사람도 누구나' 열심히 영어공부를 하기 때문에 영어를 일정 수준 이상 구사할 수 있으면서도 너무 완벽하게 하려 한 나머지 갖고 있는 실력의 반도 못 내는 기형적인 상황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안타까운 현실이지만, 기왕 할 거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영어 쓸 일 있으면 틀릴 거 생각하지 말고 당당하게 얘기하자. 기왕 배운 시간이 아깝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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