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코뮤지컬과 고전 셰익스피어의 만남

   

[문화뉴스]

"여기 덮인 흙을 파헤치지 마시오.
이 돌을 건드리지 않는 사람에게는 축복이
이 뼈를 옮기는 자에게는 저주가 있으리라."

1616년 4월 23일에 52세를 일기로 사망한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묘비명이다. 올해로 세계적 대문호 셰익스피어가 서거한 지 400주년이 된다. 이를 기념하여 7일부터 2월 28일까지 대학로 JH아트홀에서 그의 명작 희극 '끝이 좋으면 다 좋아'가 공연한다.

정통 극만 27년을 해온 연출 김국희는 시연에 앞서서 "조금은 말초적이고 허술할 수 있지만 재미있는 로맨스를 한 번쯤 해보고 싶었다"며 이 작품에 대한 애정을 보여주었다. 그는 문학적으로 해석할 가치가 있는 고전 작품에 뮤지컬이라는 장르를 결합해서, 재미와 깊이 두 마리 토끼를 잡고자 했다. 연출의 말은 어쩌면 이 작품 전체를 요약한다고 할 수 있겠다. 로맨스 물에 뮤지컬이라니. 이 작품은 재미있고, 웃기다. 작품이 끝나고 나올 때, 극 중 노래를 부르며 나오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동시에 이 작품은 우리를 생각하게 한다. 400년이 지났지만 해결되지 않는 남녀관계를 어떻게 읽어야 할 것이며, 인간 내면에 작용하는 깊숙한 기제는 무엇인가. 오늘날 우리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 볼 만한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1351년 보카치오에 의해 쓰인 '데카메론'제3일째의 제9화 '나르보나의 길레타 이야기'가 원전으로 알려졌다. 셰익스피어는 이 작품을 직접 읽었다가 보다는 윌리엄 페인터가 '데카메론'일부를 번역한 '쾌락의 궁전'(The Palace of Pleasure)과 프랑스의 번역서들을 참고하여 약 1601년과 1603년에 사이에 저술했다. 그러면 실제로 700년 전의 이야기인 것이다.

   
▲ 김국희 연출이 소감을 말하고 있다.

연출가 김국희는 이를 우리나라 근대 경성을 배경으로 재탄생시켰다. 신구와 동서양의 문화가 혼재되어 있던 경성이라는 배경은 흥미롭다. 조선 시대를 종결하는 과정에서 황제와 그의 대신이 나오는 동시에, 기존의 신분과 남녀의 벽을 파괴하는 신여성 층도 등장한다. 700년 전의 상황이 400년 전 다시 쓰였고, 약 110년 전의 상황으로 오늘날 재연된다. 시간의 흐름이 무색하게도 '끝이 좋으면 다 좋아'는 오늘날 우리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있게 한다.

세미 뮤지컬. 뮤지컬이지만 세미(Semi)라는 말이 앞에 붙어있다. 라틴어에서 유래한 수사접두어 세미는 절반을 의미한다. 이 작품은 형식적으로 절반만 뮤지컬이고, 나머지는 일반 대사로 진행되는 연극이다. 전체가 노래와 춤으로 진행되기를 기대하는 사람이라면 조금 흥을 잠재우고 가길 바란다. 그러나 셰익스피어의 희극답게 유쾌한 대사도 많아 보는 내내 웃음이 끊이지 않는다. 오히려, 음악은 극의 분위기를 전환하고, 우리를 그들에게 더욱 가까이 가게 하는 감초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겠다.

아쉬운 점은 극장의 여건상 음악이 녹음된 반주로 나오는 부분이다. 종종 배우들의 노래와 녹음된 부분이 달라서 당황할 수 있다. 그러나 대학로 공연 이후, 더 큰 공연장에서 제대로 된 장비로 공연을 선보인다고 하니 기대를 해본다. 그런데도 관객들을 위해 나름의 과감한 시도를 한 연출께 감사한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추가하자면 배우들은 뮤지컬 배우 못지않게 노래를 잘한다. 개인적으로는 황제 역을 맡은 장은철 배우와 봉길 역을 맡은 백효성 배우의 노래가 인상적이었다.

앞서 연출이 말한 바와 같이, 이 극은 공감하기 쉽고 재미있는 로맨틱 코미디다. 또한, 제목에서 볼 수 있듯 행복한 결말의 희극이다. 하지만 셰익스피어가 주로 4대 비극을 쓴 시기에 이 희극을 쓴 점은 그냥 넘어가기 어렵다. '끝이 좋으면 다 좋아'는 좋은 게 좋은 거지라며 표면적으로 강한 긍정을 보이지만, 강한 긍정은 부정이기 마련이다. 이 작품은 실제로 정통 희극과는 달리 전체적인 분위기가 어둡고, '잠자리 바꿔치기' 트릭이 사용되며 심각한 풍자를 담고 있는 문제극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이 작품은 희극적 요소들로 성욕, 배반, 금기, 차별 등 인간의 악한 본성들을 무마하며 행복한 결말을 맺는다. 특히나 이 연극에서 음악과 춤을 통해 강조되는 희극적 요소들은 관객들에게 강한 긍정의 분위기를 준다. 이러한 연출은 오히려 관객들이 미화된 이야기와 엔딩에 의구심을 가지게 하고, 극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지 못하게 한다. 그래서 이 작품을 세미뮤지컬에 로맨틱 코미디로서 단순히 대중적인 상업 극으로 분류하고 넘어가기에는 내포하는 바가 많다.

근대라는 배경이 문화계에 많이 등장하고 있다. 영화 '암살', '대호'가 그러하고, 영화 '도산 안창호'와 '덕혜옹주'가 제작 중이다. 근대는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던 조선 말기, 대한제국 시기, 일제강점기를 아우르는 우리의 역사다. 이 작품의 시대적 배경은 왕이 한복과 황제 복을 동시에 입는 것을 통해 대한제국 시기라고 볼 수 있고, 시간이 흘러 봉길이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고 완용이 배신을 하는 모습을 통해 일제강점기까지 포함한다고 할 수 있겠다.

남자 주인공의 이름은 독립투사 윤봉길을 연상시키는 '봉길'이고, 그의 친구이자 배신자로 나오는 인물은 나라를 팔아먹은 친일파 '이완용'을 상기시킨다. 이상하지만 두 친구는 자유연애를 지지하고 콧대가 높은 경성 여자 대신에, 순진하다는 만주 여자들을 꼬시러 만주로 향한다. 이 부분은 극 중 인물 봉길의 여자 관을 읽는 정도로 볼 수 있겠다. 이름에 맞혀 봉길은 만주에서 독립투사로서 공을 세운다.

반면에, 완용은 일본군들에게 독립군들의 기밀을 다 실토할 준비가 된 배신자 역할을 한다. 캐릭터가 인물의 직업적 성향을 대변하는 점은 읽기 쉬웠지만, 극의 초점이 남녀관계에 있으므로 독립운동을 하러 갈 때, 갈등하는 인간적인 모습이나 배신을 하는 인간의 깊은 내면을 너무 단순하게 그린 것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든다.

   
 

우리나라 근대에는 많은 영역에서 대립각을 세울 수 있다. 신구. 시골과 경성. 왕과 신하. 대장과 부하. 남자와 여자. 신분. 동양과 서양. 이러한 무수한 갈등을 이 작품은 남녀관계로 가져온다. 원작에서 급진적인 여자 주인공 헬레나는 '유정'으로, 고귀한 혈통의 남자지만 헬레나를 거부했다가 결국 그녀에게 가게 되는 버트램은 '봉길'로 옮겨온다. 봉길은 아버지의 벼슬로 인해서 기존 제도에 따라 본인도 높은 신분을 가지게 된다. 봉길의 아버지를 치료하던 의사의 딸 유정은 아버지가 죽자, 봉길의 어머니 신 씨가 거두어준다. 당시 의사는 별 볼 일 없는 신분이었기 때문에 유정의 신분은 봉길보다 낮다. 따라서 유정은 봉길을 사모하지만, 봉길은 신분 차이 때문에 그를 거부한다.

이 작품에서 여성의 캐릭터가 인상적인데, 오래된 스타일의 한복을 입고 있는 높은 집 마나님 신 씨 역시 신분을 넘어서는 유정의 자유연애를 지지한다. '내 남자 만들기 프로젝트!'로 홍보되고 있는 유정의 계획들을 살펴보겠다. 먼저 그녀는 '남자가 여자를 더 좋아해야 남녀관계가 잘 유지된다'라는 일반적인 연애 편견을 깨뜨리고, '여자가 남자를 더 좋아해도 남녀관계가 잘 유지된다'라는 새로운 명제를 만들어낸다.

원작 당시에는 획기적일 수 있었겠지만, 오늘날에는 크게 급진적인 생각은 아니다. 그녀는 봉길을 남편으로 얻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며 왕의 병을 고친다. 원작에서는 헬레나가 왕의 병을 고칠 때 '일어섰다'라는 표현을 쓰는데, 왕의 성적 기능을 회복시켰다는 성적 기제로도 읽을 수 있다고 평가된다. 이 연극 초반에 처녀성에 대한 유정과 완용의 논쟁에서 볼 수 있듯, 성적 기제로 극 전체를 분석해 볼 수도 있겠다. 왕에게 신임을 얻은 유정은 봉길과의 첫 번째 갈등인 신분과 부의 문제를 해결한다. 앞서 평가된 바로 보면 유정이 왕에게 한 매춘을 통해 부와 신분을 얻은 경우로도 볼 수 있으며, 실질적으로 여성의 갖춘 능력을 성에 한정해서 보는 시선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봉길이 그녀에게 준 편지에 의하면, 그와 잠자리를 가지고 그의 아이를 가지면 유정은 아내가 될 수 있다. 따라서 유정은 죽은 척하고, 비구니 행세를 하며 만주로 간다. 유정이 변한 모습은 성적 활동이 금기시되는 스님이다. 스님이 되어 봉길이 하룻밤 자기 위해 꼬시고 있는 심덕에게 접근하여 자신의 계획을 털어놓는다. 그렇게 얼렁뚱땅 봉길과 유정의 하룻밤은 성사된다. 그 이후에도 봉길은 자신이 유정과 정사를 치렀다는 사실을 모른다. 성적 욕망을 갈망하는 봉길의 모습은 말초적인 우리 인간 본성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녀는 약조한 대로 그의 아이를 가지게 되고, 봉길은 이를 인정하며 그녀를 정식 부인으로 받아들인다. 극을 볼 때나 이 글을 쓸 때나 이 둘의 관계가 이루어지는 과정에 많은 물음표가 생긴다.

이 글은 물음표마다 생각난 나의 부족한 생각에 지나지 않는다. 관객 각자가 그 물음표를 자신의 방식으로 채우고, 연애하고 사랑하면서 그 답을 채워가야 하지 않을까. 저 두 관계에는 많은 모순이 존재했지만, 끝이 좋으면 다 좋았다. 그러나 우리들의 인생에서는 끝이 좋다고 다 좋지는 않으므로 매 과정에 물음표를 찍어보길.

아쉬운 점은 있다. 먼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극장 환경상 뮤지컬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이 어려운 부분이다. 현재 배우들의 노래를 녹음해서 현실적 여건을 감추려 했지만, 오히려 정면 돌파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다음에 더 큰 공연장과 계약을 했다니, 기대해보겠다. 어쩌면 대형뮤지컬 공연에 익숙해진 우리에게 미니멀한 공연이 필요한 순간일지도 모르겠다.

   
 

다음으로는 이 극의 결말이다. 제목과 장르에 맞추어 이 극은 행복한 결말이다. 그러나 보수적인 시대에 남녀관계의 주도권을 역전시키고, 자주적인 여성으로서 유정은 극 내내 당돌한 여주인공을 맡았다. 그러나 결국은 결혼해서 안정적으로 살아가는 평범한 여인이 된다. 결혼하고, 아이를 가져서 가정을 이루는 것이 단순히 행복한 결말로 비추어지는 부분을 더욱 경계해야 한다. 아니, 결혼 그 이후 적극적인 아내상이 될 수 있겠다.

그러나 이러한 결말은 익숙하다. 셰익스피어의 다른 희극 '말괄량이 길들이기'에서도 제일 강한 여성 캐릭터 캐서린은 제일 유순하고 남편의 말을 잘 듣는 여성이 되어 행복한 결실을 본다. 작가가 기존 여성의 역할에 자주성을 부여했다고 하더라도, 일정한 범위를 미리 정해둔 것이 아닐까 하는 비판을 할 수 있겠다. 물론, 원작이 그러한 점은 알겠지만, 각색의 과정에서 경성으로 시대를 옮긴 것처럼 더욱 획기적인 결말도 가져올 수 있지 않았을까. 결혼 이후, 우리의 신여성 유정의 모습은 관객들 각자의 생각에 맡기기로 하겠다. 다만, 그녀가 '인형의 집'에 가지는 않길 바란다.

대학로에서 공연하는 세미 뮤지컬과 로맨틱 코미디의 만남이 인상적이었고, 특히 그 작품이 오늘날에도 가치 있는 고전 셰익스피어의 작이라서 꼭 보아야 한다고 생각이 든다. 특히나 오늘날 로맨틱 코미디 형식으로 수많은 연애 물들이 쏟아지고 있는데, 생각할 여지가 많은 이러한 작품을 보고 자신의 남녀 관과 연애관을 돌이켜보면 어떨까. 날이 상당히 추워진다. 경성에 가서 재미있는 유정과 봉길의 사랑을 봐보자. '끝이 좋으면 다 좋아'처럼 이 겨울의 끝을 잘 마무리하길 바란다.

[글] 문화뉴스 김진영 기자 cindy@mhns.co.kr
[사진] 문화뉴스 양미르 기자 mir@mhn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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