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뉴스 MHN 서정준 기자] 매년 그렇지만 유독 '다사다난하다'는 표현이 잘 들어맞는 한 해가 아니었을까.

관객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함께 울고 웃어야 할 공연계는 올해 유독 관객과 불협화음을 냈다. 업계를 선도해야할 위치의 제작사, 기획사들은 눈길을 끄는 신작보다는 라이선스 작품, 과거 인기작을 되살려 안정을 택했고, 임금 체불 및 다양한 이유로 조기 종연되는 작품들이 생겨나 '지속가능한 공연'의 필요성이 대두됐다. 오픈런 연극의 상징과도 같은 '라이어'가 대형 뮤지컬 제작사에게 판매되는 등 대학로는 점점 더 추워졌다.

그 와중에도 작은 희망의 씨앗들도 있었다. 정권 교체와 함께 블랙리스트 사태가 진전을 보였고, '꾿빠이, 이상', '더 헬멧' 등 관객에게 새로운 경험을 선사하는 신선한 작품들이 있었으며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한 멋진 인물들이 관객을 위로했다. 올해 공연계 어떤 일이 있었는지 돌아보자.

   
▲ 이윤택 연출

1.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실체가 밝혀지다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절 꾸준히 제기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가 사실로 밝혀졌다. 이어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 조사 및 제도개선위원회가 밝힌 바에 의하면 피해 현황은 문화·예술인 1012명, 문화·예술단체 320곳, 총 피해 건수 2670건에 달했다.

'누구 이름이 들어가면 지원 받을 수 없다더라.' 같은 이야기가 계속 존재했지만 그것이 실제로 밝혀진 것은 새로운 충격이었다. 또 블랙리스트의 반대에 서는 '화이트 리스트'의 존재가 밝혀지는 등 진상 조사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

다행히 현재는 이런 블랙리스트에 의한 피해가 속속 사라지고 있다. 이윤택 연출을 비롯해 극단 하땅세, 백수광부 등 그간 지원에서 배제됐던 인물, 단체 등이 다시금 창작에 힘을 쏟을 수 있는 상황이 만들어지고 있다. 다만 이 과정에서 이전의 보상 차원이 아닌 정당한 절차가 이뤄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예술인들은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기'를 바란 것일 뿐이다.

   
▲ 뮤지컬 '햄릿'

2. 시작도 어려운 적폐청산, '임금 체불'

공연계의 '적폐'는 청산되지 않았다. 고질적인 문제로 지적되던 배우, 스태프들의 임금체불, 돌려막기(공연된 작품의 적자를 다음 공연의 수익금으로 메꾸는 행위) 등은 올해에도 계속해서 문제를 야기시켰다. 3월에는 뮤지컬 '넌센스2'가 작년 공연 과정에서 임금 체불이 있었던 것이 밝혀졌다. 그러나 '넌센스2'는 제작사가 교체된 뒤 조혜련, 박슬기, 이미쉘 등 유명 연예인이 대거 참여하며 공연을 이어 올렸다.

다음은 역시 아이돌이 대거 투입된 10주년 기념 '햄릿'이었다. '햄릿'은 6월 15일과 17일 사전 공지 없이 현장에서 일방적으로 공연을 취소하는 사건이 벌어지며 임금 체불 과정이 밝혀졌다.

이런 과정에서 안타까운 사건도 이어졌다. '김수로프로젝트'를 진행하며 대학로의 주목받는 제작자였던 아시아브릿지컨텐츠의 최진 대표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에게는 공연의 흥행 실패, 사업 확장 등으로 인해 90억 가량의 빚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그 빚 중 일부는 공연에 출연한 배우들의 출연료였고 2, 3개 작품을 공연하면서도 출연료를 제대로 받지 못했던 배우들도 있었다. 제작사 입장에서는 면밀한 시장 조사를 통해 합리적인 수준의 표준화된 계약 체결이, 배우들 입장에선 무조건적인 몸값 높이기보단 러닝개런티 등을 통해서 배우와 제작사 모두가 '윈-윈' 할 수 있는 제작 시스템의 필요성이 요구된다.

   
▲ 뮤지컬 '시카고'

3. 라이선스-투어 공연 활발 '모험보단 안정'

올해는 '시카고', '캣츠', '시스터액트', '드림걸즈', '지킬앤하이드 월드투어' 등 외국 캐스트의 공연이 눈에 띈 한 해였다. 이들은 대부분 명성만큼 높은 프러덕션 퀄리티를 통해 '역시 오리지날'이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지만, '드림걸즈'의 경우 배우들의 컨디션 관리 등에 문제가 생기며 공연 취소 등으로 홍역을 치르기도 했다.

또 공연 퀄리티와 별개로 대부분 시장을 선도해야할 대형 제작사의 작품이라는 점에서 아쉬움을 남기기도 했다. '마타하리', '벤허', '서편제', '영웅' 등 좋은 성과를 거둔 창작 작품이 없진 않았으나 이들 역시 대부분 인기 레퍼토리의 재공연이 주를 이루는 등 전반적인 제작 방향이 장기적인 비전보다 당장의 안정을 추구하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대학로에서도 '어쩌면 해피엔딩' 등 창작 초연 작품들이 새롭게 등장하며 관객의 호평을 받았으나 '사의찬미', '여신님이 보고 계셔', '미스터 마우스' 등 검증된 작품들이 주류를 이뤘다.

   
▲ 연극 '라이어' 연출 겸 배우 권혁준.

4. 연극 '라이어' EMK뮤지컬컴퍼니에 판매

과거와 달리 공연 하나 잘 만들어서 '돈방석'에 앉는 일은 사라지고 있다. 악어컴퍼니의 연극 '옥탑방 고양이'와 함께 대학로 최고의 흥행보증수표로 불리던 연극 '라이어'가 국내 최대 뮤지컬 제작사 EMK뮤지컬컴퍼니에게 판매됐다.

이는 연극, 뮤지컬계에서도 자본과 규모가 중요해짐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EMK뮤지컬컴퍼니는 '팬텀', '모차르트!' 등을 공연하며 국내 관객에게 '대극장 뮤지컬의 정석'으로 자리매김한 회사다. 이를 바탕으로 제작비 100억 이상이 투입된 것으로 알려진 '마타하리' 등을 만들었고 '라이어' 역시 판권 구입에 10억원 이상의 비용을 지불한 것으로 알려졌다.

'배고픈 예술가'론이 구시대적 담론이 됐듯, 좋은 자본을 통해 더 나은 공연예술을 만들어내는 좋은 사례가 되지 않으리란 법은 없다. 오히려 자본은 공연에 있어 중요하고 필요한 요소기도 하다. 하지만 국내의 좁은 문화예술계 시장을 볼 때 독과점 논란, 다양성 부족을 불러온 멀티플렉스가 점령한 영화계처럼 되지 않으리란 법도 없다. 앞선 사례들을 통해 현명한 대응을 모색할 때다.

   
▲ 뮤지컬 '타이타닉'에 출연 중인 빅스 켄.

5. 아이돌과 배우의 자리 바꾸기

배우 김소진과 진선규가 대학로가 아닌 영화판을 휩쓸었고, 현역 아이돌 가수들이 대거 공연장을 찾았다. 기존에도 아이돌은 늘 공연에 한 두명씩 참여하며 대중의 관심과 투자를 부르는 역할을 담당했지만, 이젠 그런 시기를 넘어서서 당당히 한 명의 배우로서 작품에 참여하게 됐다.

보이그룹 빅스의 레오(정택운)는 두 번의 '마타하리' 공연과 '더 라스트 키스' 등에 출연하며 그 자리를 확고히 했고, 같은 그룹의 켄 역시 올 한해에만 '꽃보다 남자', '햄릿', '타이타닉'에 출연하고 있다. 이외에도 BTOB의 서은광은 대학로 뮤지컬 '여신님이 보고 계셔'에 출연하고, B1A4의 신우와 산들 역시 다양한 작품에서 활약하고 있다. 또 '서른즈음에'를 통해서는 러블리즈의 케이가 성공적인 데뷔를 치뤘다.

지금도 여전히 연기력이나 가창력에 관해서 아이돌 출신 배우들에 대한 편견은 자리하고 있다. 일부는 사실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들은 더이상 반짝 출연으로 눈길을 끌기보단 꾸준히 작품에 참여하며 젊은 나이대의 배우들로서 무대에 익숙하고 퍼포먼스 면에서 빼어나다는 장점을 바탕으로 성장 가능성을 지녔다는 점에서 눈여겨봐야할 재목들임은 분명하다. 누가 알았겠는가. 옥주현이 최고의 뮤지컬 배우가 되리라고.

   
▲ PMC프로덕션 송승환 대표.

6. 한한령 후폭풍으로 몸살 앓은 공연계

정치권에서 촉발된 외교적 긴장으로 인해 가장 타격받은 곳은 다름 아닌 문화예술계였다. 중국의 한한령으로 인해 한류 문화, 단체 관광 등이 제한됐고 이로 인해 막 새로운 교류를 만들기 시작한 공연계는 큰 타격을 받았다.

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DIMF)이 만든 뮤지컬 '투란도트'의 경우에도 꾸준한 교류를 통해 중국 진출을 눈 앞에 뒀지만 기약 없는 일이 됐다. 또 중국 관광객이 감소하며 중국 단체관광객 위주로 공연을 올리던 충정로 난타전용극장이 문을 닫게 됐다.

하지만 이렇게 주저 앉고 있지만은 않았다. '투란도트'는 현재 유럽 진출을 추진 중이며 PMC프로덕션 측은 또 다른 해외 루트를 개척하겠다고 발표했으며 최근 문재인 대통령의 중국 방문 등으로 한중관계가 회복세에 접어들었다. 이에 '마이 버킷리스트', '빨래', '빈센트 반 고흐' 등이 중국 라이선스 공연 소식을 전했으며 최근 베이징에서는 한국의 작가, 연출, 중국의 음악감독, 배우가 함께 모여 만드는 창작뮤지컬 '쉼없는 애수' 리딩워크샵이 열리기도 했다.

   
▲ 서울예술단 창작가무극 '꾿빠이, 이상'

7. 무대와 객석의 결합 시도하는 공연들

올 한해는 관객들이 객석에 앉아 무대를 바라보는 전통적인 형태를 벗어난 공연들이 많이 제작돼 좋은 평가를 얻었다. 서울예술단의 창작가무극 '꾿빠이, 이상'은 객석과 무대를 결합한 파격적인 시도에 독특한 분위기, 높은 완성도로 전회 매진을 달성해 긴급히 추가 공연을 열기도 했고, '씨어터 RPG'를 표방한 '내일 공연인데 어떡하지', 건물 하나를 넘어서 대학로 전체를 돌아다니며 체험하는 '로드씨어터2 대학로' 등이 공연됐다.

여기에 지난 19일부터 공연 중인 연극 '더 헬멧'의 경우 관객이 객석에 앉아서 보는 형태긴 하지만, 무대를 양분한 뒤 반대쪽의 정보를 제공하지 않음으로 관객이 느끼는 현장감을 극도로 살렸다. 창작 분위기가 위축된 대학로에서도 이렇게 새로운 형태의 공연들이 계속해서 만들어지며 관객에게 희망을 건넸다.

some@mhnew.com

주요기사

 
저작권자 © 문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