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김상우 / 사진 : 대구문화창작소 이재봉

지난 6월 18일, 이야기춤무용단의 <무의식의 숲>(안무 박예지)이 대구 퍼팩토리소장에서 막을 올렸다.

어려운 전공 서적 같은 무용이 아니라, 동화책처럼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무용을 목표로 하는 이야기춤은 이번 공연에서 주체적인 삶과 개인의 행복을 이야기했다.

 

이야기춤 - '무의식의 숲' 안무 박예지 ⓒ이재봉
이야기춤 - '무의식의 숲' 안무 박예지 ⓒ이재봉

 

서서히 밝아지며 드러난 무대는 예상외의 모습이었다. 약간의 당혹감을 선사한 무대 위 소품의 정체는 찰흙. 찰흙으로 만든 기둥이나 그릇 등이 무대의 앞쪽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 앞에 웅크려 있다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든 무용수는 쌓여있는 찰흙 더미와 소통하기 시작했다. 어루만지고, 바라보고, 쌓아 올리고. 던지고. 무용수 자신의 몸 위에 올려두거나, 맨발로 올라서서 밟기도 했다.

그것은 춤이라기보다는 계산 없이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순수함을 몸으로 나타내는 무성 연극과도 같았다. 호기심 많고 행동에 거침이 없는 어린아이의 모습.

 

이야기춤 - '무의식의 숲' 안무 박예지 ⓒ이재봉
이야기춤 - '무의식의 숲' 안무 박예지 ⓒ이재봉

 

정신분석학의 문을 연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인간의 의식을 빙산에 빗대어 표현했다. 수면 위로 드러난 빙산은 의식, 수면 아래, 가장 하단에 있는 빙산의 뿌리는 무의식에 해당한다.

<무의식의 숲>에서는 빙하가 녹아 흙으로, 그리고 그 흙이 만들어낸 숲으로 의식과 무의식의 이미지를 나타냈다. 문자 그대로 무의식의 숲에 선 무용수가 보여준 일련의 모습들은 인간의 빙산 아래에 잠재된 것들을 꺼내는 과정이었을지도 모른다.

찰흙 퍼포먼스 중에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두 가지. 하나는 하트 모양의 찰흙을 자신의 가슴에 문지른 것. 무용수의 손에 짓눌린 찰흙은 그녀의 흰옷에 진한 흔적을 남겼다.

무의식의 더미 속에 묻어놓았던 자신의 감정을 꺼내 심장에 새긴 것처럼 보였던 그 퍼포먼스는 사회 속에서 어른이라는 이름의 무게를 짊어지기 위해 내려놓은, 혹은 포기해야 했던 소중한 감정들을 되찾는 모습 같았다.

두 번째는 하트를 담아놓았던 그릇을 가면처럼 쓰는 퍼포먼스. 아무런 표정도 없던 그 가면에 무용수 스스로가 웃는 얼굴을 그려 넣었다. 그 직후 가면을 찢으면서 드러난 그녀의 얼굴은 가면처럼, 아니 가면보다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녀가 웃음을 새겨 넣은 것은 가면이 아닌 자신의 얼굴 아니었을까.

이렇듯 전체적으로 찰흙이라는 소품을 단순히 전시처럼 보여주는 오브제의 역할로만 사용하지 않고, 찰흙의 특성을 처음부터 끝까지 잘 활용한 퍼포먼스들이 눈에 띄었다.

찰흙 외에도 여러 소품을 사용했는데, 청아한 소리가 매력적인 싱잉볼로 연주를 하기도 했고, 무대를 대각선으로 갈라놓듯 길게 늘어진 흰 천을 자유롭게 사용하기도 했다.

 

이야기춤 - '무의식의 숲' 안무 박예지 ⓒ이재봉
이야기춤 - '무의식의 숲' 안무 박예지 ⓒ이재봉

 

저 천을 어떤 식으로 사용할 것인가가 궁금해질 때쯤, 끄트머리에 서서 위아래로 천을 펄럭이는 무용수. 그 움직임에 따라 천이 일렁이며 물결을 만들어냈다. 파란 조명을 입은 채 일렁이는 모습은 푸른 호수의 윤슬처럼 보이기도 했다.

공기의 흐름이 만들어낸 물결 다음에는 무용수가 직접 물결을 만들었다. 천 아래에서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는 그녀의 실루엣만이 천 너머로 보였다. 도중에 멈춰서 흥겨움에 취한 몸짓을 보여주기도 하며 천 밖으로 나온 그녀는 본격적으로 춤을 추기 시작했다.

퍼커시브 스타일의 기타 음악에 맞춰 흥을 중시하는 즐거운 춤이었다. 빙글 돌기도 하고, 긴 천의 끝에 붙어있던 부채를 쥐고 흔들거나 천을 입는 등, 다시 천을 활용하기도 하고. 무대를 누비며 그 시간 자체를 즐기는 듯 한 모습이었다.

자유로운 춤의 순간도 잠시. 물소리와 함께 흐름이 변했다. 물속을 떠돌듯 허우적거리다가, 급류에 휩쓸리듯 어지럽게 흔들리는 무용수. 그녀의 수중 방황은 공연 초반에 쌓아 올렸던 찰흙의 탑을 스스로 무너트리면서 끝났다.

물살에서 해방되었지만, 어딘가 갈피를 잡지 못하는 느낌의 춤이 이어졌다. 바닥에 누워 뒹굴고, 헤매다가 웅크리고 앉는 그 몸짓들은 방황이거나, 혹은 싹이 움트기 전의 태동.

그 뒤로 이어지는 것은, 활짝 피어난 자유로움. 지금껏 펼쳐내고 싶었던 모든 것을 무대 위에 그려가며 축적되었던 에너지를 한 번에 발산해냈다. 빠른 물살도, 고민도, 그녀를 잡아둘 수 있는 것은 없었다.

 

9) 이야기춤 - '무의식의 숲' 안무 박예지 ⓒ이재봉
9) 이야기춤 - '무의식의 숲' 안무 박예지 ⓒ이재봉

 

격렬하게 춤을 추는 동안 힘들 법도 한데, 괴로움이 비집고 들어갈 틈도 없이 몸 안에 활력과 행복이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의 무대는 몸 안에 남아있는 것을 남김없이 태우고 난 후에야 환한 미소와 함께 마무리되었다.

우리는 늘 무언가에 얽혀있다. 그것들은 길게 이어진 도미노처럼 유기적이어서 하나라도 무너트릴까, 조바심을 내며 살고 있다. 그 도미노를 지키기 위해 참 많은 것을 포기해왔을 것이다. 하지만 포기했다고 해서 사라지지는 않는다. 단지 우리가 스스로 밀어낸 마음의 바닥에 미련이라는 이름으로 쌓일 뿐.

마음의 바닥을 들여다보는 것은 두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가끔은 무너진 도미노를 다시 세울 각오를 하고 우리 무의식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도 나를 위해서 필요한 일이라는 것을 <무의식의 숲>에서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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