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진의 문화살롱] 타인의 삶에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시선, 피란델로의 '뜻대로 생각하세요'

우리는 어떠한 시선으로 타인의 삶을 바라보고 있는가?

2017-06-23     송수진
[글] 문화뉴스 아띠에터 송수진 artietor@mhns.co.kr
사람이 살아가는 힘은 사람에게서 나온다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연극인, 연출 송수진입니다. 극단 묘화 대표.

[문화뉴스 MHN 아띠에터 송수진] 초등학교 4학년 쯤이었을까? 그때 봤던 어떤 사람의 모습은 매우 충격적이었다. 이유인즉슨 친구 집에서 놀다가 라면을 먹으려고 준비 중이었는데 그 친구의 아버지가 들어오시는 것이었다. 순간 매우 긴장했다. 왜냐하면 친구에게 들어 익히 알고 있는 친구의 아버지는 타인에게는 더 없이 친절한 분이시지만 집에서는 전혀 다른 행동으로 가족을 대하는 분이었다. 

흔히 끝장 드라마에 막장 드라마에 나오는 나쁜 어른의 표본이랄까? 외도와 폭력, 폭언… 친구의 아버지에 대한 비밀을 들었을 때 그 나이에 보듬어 주기엔 너무 거대한 슬픔과 아픔이기에 도무지 위로해줄 수 있는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하여튼 그 무시무시한 어른과의 라면 먹는 자리라니… 라면이 코로 들어가는지 귓구멍으로 들어가는지 알 수 없었다. 어서 이것을 해치우고 밖으로 나가고 싶었으니 말이다. 

그러다 TV에서 드라마가 방영되기 시작했다. 불륜을 다루고 있었던 드라마로 기억된다. 조강지처와 자식에게 못 할 짓을 하며 새로 생긴 여자에게 가는 남자의 모습이었다. 갑작스럽게 젓가락을 상 위에 탁! 하니 놓으시더니 일장 연설이 시작되었다. 저런 나쁜 새끼들은 다 잡아다가 교도소에 처넣어야 한다며 저런 것들은 절대정신 못 차린다며… 사람이 저러면 안 된다고 이야기하시는데 친구의 어머니는 초점을 놓은 공허한 눈빛으로 그냥 라면을 들고 계셨고 너무나도 같은 표정으로 친구도 라면을 먹고 있었다. 

그 뒤로 얼마 전에 아버님이 잘라놓았다는 전기선이 절연테이프에 돌돌 말려 벽 콘센트에 연결되어 있었고 부엌 싱크대 찬장은 한쪽이 떨어져 덜렁거리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하하하' 하고 웃어버렸지만 내 표정은 이미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것 같다. 거기 있던 친구의 가족들이 다 나를 이상하게 바라봤으니 말이다. 

'이게 뭘까? 난 대체 여기서 무얼 하고 있나… 라면은 우리 집에도 있다… 그만 웃어야 하는데…' 

처음으로 타인이 바라보는 또 다른 타인의 삶에 대한 평가를 극단적으로 경험했다. 내가 바라보는 타인의 삶에 대한 시선은 언제나 찾아볼 수 있는 책장의 책 같은 것이었지만 타인이 바라보는 또 다른 타인의 삶에 대한 평가는 그 어린 나이에 굉장한 충격이었다. 

"생각건대 인생은 매우 슬픈 익살이다. 왜, 무엇을 위해 그러는지, 그 욕망이 어디서 오는지는 알 도리가 없지만, 우리는 이따금 이 현실이 헛되고 실체가 없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내 예술은 자신을 속이는 모든 사람에 대한 쓰라린 연민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이 연민 뒤에는 반드시 인간을 자기기만으로 몰아넣는 운명의 잔인한 비웃음이 따라오게 마련이다."

 

작가 루이지 피란델로

이탈리아 극작가 루이지 피란델로 자신의 예술에 대한 평가이다. 서두가 이렇게 장황했던 것은 피란델로의 작품 중 하나인 '뜻대로 생각하세요'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이렇게도 장황한 경험담을 적어보았다. 

마을로 이사 온 새로운 가족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과도한 관심이 서로 생각하는 관점에서의 언어로서 표현되어 어찌 보면 아무 말 대잔치에 초대받은 듯 느껴지기도 한다. 새로 이사 온 사람들의 사생활에 대해 과도한 관심을 두고 서로 음모론을 펼치며 설전을 벌이는 것을 보면 피란델로가 자신의 예술에 대한 평가를 왜 그렇게 했는지 이해가 된다. 그리고 요즘 SNS에 떠도는 이야기를 가지고 과도한 감정표현을 해대는 사람들의 모습도 겹쳐지기 시작했다. 

'인생은 매우 슬픈 익살이다…' 어째서 그들은 타인의 삶에 그리도 집착하는 것일까? 나 역시도 너무나도 쉽게 타인의 삶을 이야기하는 것 아닐까? 우리는 넘쳐나는 정보들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또한, 그 정보들은 하루를 멀다고 늙어가고 있다. 오늘의 정보는 내일의 지루함이 되어버리고, 그 정보들 속 타인의 삶들은 오늘의 내가 또 다른 타인과 나누는 씹기 좋은 오징어가 되어 잘근잘근 씹힌다. 

그 사이 우리의 턱은 점점 강인해져 가고 두 개의 콧구멍은 그 턱의 욕망에 순응해 또 다른 오징어를 찾아 계속해서 타인의 삶을 찾아낸다. 그 주제는 결코 행복하거나 즐거운 주제들은 아니다 이것들은 싱겁고 부드러워 씹는 맛이 안 나기 때문이다.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가장 좋은 안줏거리는 누군가의 불행이고 슬픔이며 번지기 쉬운 우울함이다.  누구도 그 행태에 대해 쉽게 지적하지 못한다.  어느 순간 그 두 개의 콧구멍이 지적하는 손가락 끝을 향해 킁킁거릴 테니 말이다. 

'뜻대로 생각하시라'는 희곡은 대중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물론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대부분의 피란델로 작품이 타인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한 또 다른 입장에서의 '지적'이라는 느낌이 강해서이지 않을까? 내가 타인의 삶에 대해 과도하게 평가하며 판단하고 또 다른 타인과 나와 너의 이야기가 아닌 또 다른 삶에 대해 아무런 목적 없이, 무작정, 과도하게 이야기하는 것은 어쩌면 학습되지 않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피란델로의 경계의 메시지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나 자신이 타인의 삶을 대할 때의 태도를 돌아보게 만드는 피란델로의 글은 어쩌면 앞으로도 많은 주목을 받지 못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하나 한 번쯤은 꼭 무대에서 만나보고, 책으로 접해보는 것을 권해본다. 

'현실이 헛되고 실체가 없다는 사실을 발견한다'라는 피란델로의 말처럼 어느 순간 내 삶이 보이지 않고 타인의 시선들로 이뤄져 있는 듯하여 모든 것이 허무해지며 감정적으로 되었을 때 나와 타인의 삶에 대한 감성적 시선들을 이성적이고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꿔줄 힘이 생기기 때문이다. 

너무나도 당연한 말이겠지만 우리는 타인의 삶에 대한 목적 없는 눈먼 관심보다 현실의 나에게 삶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