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뉴스] 우리는 영어 단어 either와 neither의 쓰임새를 안다. 문맥에 따라 두 낱말은 서로 반대되는 뜻으로 해석된다. <패션해체>는 두 가지 상황을 모두 적용해도 각각 말이 된다. 이 전시는 패션디자인을 선보이는 자리이면서, 미디어아트 전시이기도 하다. 한 편으로는 패션 전시도 아니고 미술 전시도 아닐 수도 있다. <패션해체>가 긍정적인 견해로는 두 영역을 혼융한 시도일 수 있고, 부정적인 관점에서는 그냥 하나라도 집중하는 게 나았다고 볼 수도 있다. 아무튼 여기서 패션과 동시대 미술이 함께 공진화해 온 역사라던가 의미를 써 내려가는 일은 큰 효용이 없다. 독자들 대부분은 <패션해체>에서도 재현된 두 장르 간 시도에 관해서 이미 정보와 감각이 훈련된 이해공동체 속에 있기 때문이다.

우선 패션디자인 관계자들은 이 이벤트의 제목만 봐도 형식을 짐작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모두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관객 입장에 있는 내가 얻지 못한 사전 정보 중 한 가지가 전시의 영어 제목이다. 예술 체계 속에서 해체는 자크 데리다나 폴 드만의 이론 가운데 등장하는 deconstruction이란 뉘앙스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예컨대 그 말은 패션을 둘러싼 제도와 행위와 언술이 품은 시니피앙과 시니피에를 따로 떼어 해석의 새로운 진입을 시도하는 것처럼 읽힐 여지가 있다. 그러나 <패션해체>에 참여한 당사자들은 다른 야심의 주체들이다. 이 경우에는 dissection이 더 어울린다. 이 전시의 목적은 패션디자인의 완성체 개념을 해체한다기보다는 요소별로 분절하거나 분해하는 실험이기 때문이다.

<패션해체>에서 옷은 그리 큰 부분을 차지하지 않는다. 굉장한 시각적 체험을 만들어주는 명분 정도라고 할까. 이미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 시선과 박수를 받은 바 있는 그 작품들은 이곳 연남장의 지하 전시공간에서도 여전히 주인공이지만, 조명의 중심에서는 비켜나 있다. 그렇다. 조명과 빛의 이야기다. 공간 속에서 의류는 파사드를 포함한 구조물들과 함께, 형형색색으로 발산하는 빛의 세례를 받는다. 공평하지만 한 편으론 소외이기도 하다. 해체라는 말이 이 전시에서 사리에 알맞게 쓰인다면, 칸트식으로 그것은 패션에서 물자체(thing in itself)인 옷이 가지는 지위(status)의 해체다.

<패션해체>는 상당히 교과서적인 구성을 두는데, 그건 좋으면서도 나쁘다. 별다른 정보 없이 전시를 찾은 관객은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관우처럼 오관 돌파를 하면서 저마다 다른 상황을 맞는다. 1관 ‘선’, 2관 ‘색채’, 3관 ‘실루엣’, 4관 ‘재질’, 5관 ‘통합’으로 이루어진 구획과 동선 배치는 내 생각에, 의류학계에서는 널리 알려진 마릴린 혼(Marilyn Horn)과 루이스 구렐(Lois Gurel)이 <The Second Skin>(1981)에서 정리한 패션디자인의 요소를 레퍼런스로 삼은 듯한 인상을 준다. 1관이 보여주는 선의 요소는 끊어지거나 이어진 선의 형태를 통해 공간 요소의 출발인 1차원의 시각적 체험을 보여준다. 2관은 인지적으로 유도하는 색의 공간이다. 내가 보기에 2관의 테마는 ‘색채’ 뿐만 아니라 선에 이어 조형성의 2차원 단계인 ‘면’을 부각했어도 좋았을 것 같다. 여기서는 기술의 영역에서 구현되는 색채 계를 의류나 지류를 벗어나 공간 속에 나열하는데, 여기에 쓰이는 매체는 엘이디 패널은 저마다 작은 구획을 이루는 벽면 기능을 겸한다.     

공간 안에서 반환점을 돌아 진입하게 되는 3관 ‘실루엣’은 옷을 입는 인체에 근거하는 형태(shape)와 움직임을 표현한다. 이것은 직접적인 외곽선을 서로 다른 세 개의 상태로 재현한 동작감응체계가 관객의 흥미를 유도한다. 미디어아트의 순수 미술 영역에서는 10년 전부터 보급된 프로그램과 아이디어가 여기에도 적용되었다. 4관에 해당하는 ‘재질’의 방은 우리의 촉각에 호소한다. 뭔가 하면, 눈으로만 보지 말고 만져봐도 된다는 것이다. 옷의 원단은 다양한 질료로 구성되며, 그 말은 다양한 촉감을 가진다는 뜻이다. 이런 사실에 대하여 관람자가 직접 작품을 만지고 확인할 수 있다는 설정은 유쾌하면서도 허탈한 농담처럼 기능한다. 왜냐하면 작품은 손대지 말아야 하는 원칙이 몸에 익은 관객들이 본 전시의 끄트머리에 와서 맞닿은 상황 앞에서, “그럼 앞선 방에서는?”이라는 의문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에, 5관이자 어쩌면 0관이 되어도 말이 되는 “통합”의 방은 전시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관람자들에게 분절된 요소를 인지시켜준 네 개의 패션 요소를 다시 결합하는 방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다시 1관으로 들어가서 한 바퀴를 돌며 다른 관람 방법을 시도하는 인식의 재진입(re-entry)을 꾀하는 방법도 있다. 말하자면 정보의 되먹임(feedback)을 겸하여 한정된 공간 개념을 인지적 확장하는 셈이다. 하지만 나는 이 전시의 큐레이터가 아니라 한 명의 관객이므로, 도슨트 프로그램에 이런 방식을 제안할 처지는 아니다.

각 방은 공간 구분이 선명하며 주제 전달에 충실하다. 애당초 빛의 통제가 쉬운 지하 공간에서 벌인 기획은 영리했다. 하지만 전시는 몇 가지 숙제도 남겼다. 한 곳에서 수용한 시각 정보는 마치 서로 다른 생선 초밥을 먹을 때 생강이나 마실 거리로 미각을 환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방과 방 사이에 인지의 자극을 비우는 게 필요하다. 가령 공간 사이에 텅 빈 통로가 그런 여백의 구실을 하는데, 한 군데를 빼고는 암막이 그 기능을 대체한다. 또 앞서 밝힌 것처럼, 이 전시에는 광원과 미디어콘텐츠를 통한 빛이 극적인 역할을 맡았는데, 이 모든 장치의 착안과 구현에 어떤 예술가가 관여했는지 짐작하기는 어렵다. 홍익대 대학원 패션디자인 학도들과 협업한 VERS는 창작집단이 아닌 기업 개념이므로, 거기에 여러 조건으로 체결된 예술가와 기술자들이 있음은 당연하다. 이 글을 쓰는 필자인 나에게는 이 전시를 통해 떠올리는 작가 목록이 있다. 그들 미디어 아티스트들은 예술가이며 개발자이고, 더러는 그 중 어느 한쪽의 전문가다. 그들 중 누가 <패션해체>를 지원한 아티스트 X가 아닐까 추측하는 게 개인적으로는 재미있다.

<패션해체>는 선과 색채 또는 면과 형태의 실루엣과 재질로의 해체다. 그리고 패션디자인과 산업에서 지위의 해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하지만 여기에 빠진 게 있으니, 그것은 시공간의 해체다. 창작자들에 의하여 완성된 패션 의류가 런웨이와 스트리트 혹은 숍 디스플레이가 아닌 복합문화공간에서 다시 공개되며, 새로운 해석의 여지를 시도했다는 점이야말로 이 전시가 남길 가장 큰 의미다.

글 : 윤규홍, (미술평론/예술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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