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와이댄스 주최, 2022년 10월 3일 대구예술발전소 수창홀
세 무용수가 그리는 여성의 삶과 죽음에 관한 원초적 기록

글 : 서경혜

사진 : 대구문화창작소 이재봉

 

지난 103일 자비로바냐 댄스 시어터의 <REAL LOVE> 내한공연이 대구예술발전소 수창홀에서 열렸다. 자비로바냐 댄스 시어터는 폴란드 국립 오페라단의 전 수석 무용수인 엘비라 피오룬(Elwira Piorun) 등이 주축이 되어 2005년에 설립된 바르샤바 주재 무용단이다.

이번 공연은 제2회 대구댄스그라운드에 초청되어 열린 것이다. 대구댄스그라운드(DAEGU DANCE GROUND)는 대구 경북 지역 아티스트들과 해외 무용단 간의 국제적 무용 교류를 지향하고자 피와이댄스(PYDANCE)가 주최하는 연중행사로, 올해 2회를 맞이했다.

자비로바냐댄스시어터 'Real Love' ⓒ대구문화창작소 이재봉
자비로바냐댄스시어터 'Real Love' ⓒ대구문화창작소 이재봉

 

'사랑(LOVE)'이라고 하면 당신은 무엇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가? 사랑에는 여러 종류가 있을 테지만 가족애, 이성애 등과 함께 쉽게 떠올릴 수 있는 것이 모성애일 것이다.

모성이 본능이라 믿었던 과거와 달리, 오늘날에는 그것이 학습된 감정이라 말한다. 모성을 본능이라고 하는 것은, 육아를 여성에게 전담시키기 위한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에 의한 요구일 뿐이라고 말이다.

한편, 그러한 이데올로기적인 측면을 차치하고라도, 장장 10개월의 시간 동안 아이와 한 몸이 되는 경험을 한다는 것은 확실히 남성이 겪을 수 없는, 여성적인 어떤 힘의 원천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바로 자비로바냐 댄스 시어터의 <REAL LOVE>가 이러한 점에 동의하는 것 같다. 그렇기에, ‘여성의 삶에서 '사랑'이라는 개념을 분리해서 생각할 수 있을까?’하고 이 작품은 화두를 던진다.

우리네 삶에는 기쁨과 고통이 끊임없이 교차하지만 그러한 기쁨과 고통을 야기하는 것은 결국 사랑이라는 심상(心相)이며, 특히 자녀를 향한 엄마의 사랑, 모녀지간의 애증의 관계가 여성의 삶과 죽음 전반에 걸쳐있음을 이 작품은 주목한다.

 여기, 세 무용수가 그리는 여성의 삶과 죽음에 관한 원초적 기록이 있다.

자비로바냐댄스시어터 'Real Love' ⓒ대구문화창작소 이재봉
자비로바냐댄스시어터 'Real Love' ⓒ대구문화창작소 이재봉

REAL LOVE - 자비로바냐 댄스 시어터 / 안무 다니엘 아브레우

그리스 신화 속 여신을 연상시키는 황금색 드레스를 입은 노년의 무용수가 나무 테이블을 짚고 섰다. 황금색 드레스는 마치 수고로운 생()의 의무를 다한 여인에게 내려진 트로피를 의미하는 듯이 영광스러워 보인다.

곧 딸처럼 보이는 젊은 무용수가 나오더니 테이블 위로 올라가 엄마의 몸에 매달려서 바닥으로 내려온다. 그러나 엄마는 바닥에 엎드린 딸의 등을 밟고 넘어간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아기가 죽은 걸까? 어쩌면 엄마의 뱃속에서 사산이 된 걸까? 결국 그 딸은 이 세상에서 제대로 발자국을 남기지 못했기에, 발이 아닌 무릎으로 기어서 무대 뒤로 들어간다. 동시에 징소리 같은 음악이 비로소 시작되고 두 번째 아이가 세상에 나온다.

그녀들의 춤은 상당히 형이상학적인 느낌을 주었다. 배로 등으로, 온몸이 바닥에 찌부러지고 몸속엣 것을 까발리기에 여념이 없는 몸짓, 그것은 바닥에 표류하거나 공간에 부유하면서 이 땅에서 존재하기 위해 애쓰는 하나의 생물체의 모습과도 같아 보였다. 특히, 경직된 발가락을 겨우 꼼지락거리는 딸의 몸부림을 볼 때면, 가느다란 시신경을 통해 전해지는 말초적인 감각에 온몸이 휩싸여, 보지도 못한 태아의 움직임을 마주한 것마냥 경이로움이 느껴졌다.

자비로바냐댄스시어터 'Real Love' ⓒ대구문화창작소 이재봉
자비로바냐댄스시어터 'Real Love' ⓒ대구문화창작소 이재봉

 

황금빛 드레스 차림이었던 엄마의 복장은 어느덧 딸들과 같은 스키니진에 셔츠 차림이다. 엄마는 딸의 몸에, 딸들은 엄마의 몸에 온전히 달라붙어 셋이 한 덩어리를 이룬다. 그러나 바닥에 지탱하는 발은 한 사람의 발일 뿐이다. 그리고 셋이 일시에 하늘을 훔쳐보는, 그 어떤 본능적 두려움이 서린 듯한 눈빛. 그 찰나의 눈빛 속에는, 이 세상에 주어진 피조물의 하나로, 거스를 수 없는 여인의 운명, 모녀의 운명에 기꺼워하기만은 어려운 원망스러움 같은 것이 엿보이기도 했다.

 

어두운 무대, 번쩍이는 조명 아래 그녀들의 움직임은 알 수 없는 마음의 형태처럼 혼란스럽고 복잡하다.

 

잠시 후 딸은 테이블에 앉아있고 엄마 혼자서 춤을 춘다. 아기가 뱃속에 있을 때부터, 공생의 관계 이면에는 본능적으로 태아와 생존경쟁을 벌이는 모체,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몸을 갉아먹는 자식을 사랑할 수 있는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이 불완전하지만 신비로운 존재의 의문이 많은 움직임, 엄마의 춤은 혼돈 그 자체처럼 보였다. 어쩌면 자녀의 성장에 자신의 삶을 온전히 희생해야 했던 엄마의 고통을 표현한 것이기도 했다.

 

자비로바냐댄스시어터 'Real Love' ⓒ대구문화창작소 이재봉
자비로바냐댄스시어터 'Real Love' ⓒ대구문화창작소 이재봉

 

반면, 딸은 매우 느리게 테이블 형태로 정돈된 모양새의 도형적인 춤을 춘다. 테이블, 그것과 바닥이 이루는 모양은 직육면체로, 가장 안정적인 형태의 입체 도형이다. 딸은 그렇게 안정된 큐브 모양의 자궁에서 철저하게 보호를 받으며 자라고 노니는, 고즈넉한 생명체를 연기해 보인다. 엄마와 딸의 춤은 그렇게 대비가 되었다.

 

장면은 전환되어 이번엔 두 딸이 함께 춤을 춘다. 둘은 비슷한 몸짓으로 바닥에 엎드려 허리를 들썩이며 몸을 마구 떨고 있다. 탄생의 순간에 겪게 되는 본능적인 고통의 몸짓일까?

 

동시에 백스크린에 흰 비둘기가 화려한 날갯짓으로 날다가 사라진다. 그에 비해, 딸들은 날개를 펴지 못하고 숨을 헉헉거리며 엎드린 채 몸을 떨고 있다. 어쩌면 이 모든 움직임이 세상에 나오기 두려운 태아의 불안한 몸부림처럼 느껴질 때, 우리는 누구나 자기가 살아온 시간 만큼의 감성에 따라 잠시 숙연해진다. 그러는 동안 엄마는 테이블 위에서 머릴 괴고 누워 내레이션을 한다. 과거의 특별한 한때를 회상하는 듯한 그 모습은 그저 덤덤하다.

 

자비로바냐댄스시어터 'Real Love' ⓒ대구문화창작소 이재봉
자비로바냐댄스시어터 'Real Love' ⓒ대구문화창작소 이재봉

 

두 딸은 서로 끌어주고 서로의 등에서 등으로 넘는다. 하나가 쓰러지면 같이 쓰러진다. 그것은 ''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줄 알았던 세상이 ''를 점점 변방으로 밀어내는 듯한 성장의 과정에서 진통하는 딸들의 몸짓일 수도 있었지만, 모녀의 몸짓일 수도 있었다. 서로의 불완전한 삶이, 서로의 존재로 인하여 좀 더 완전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모양.

 

둘이 테이블 밑으로 들어가자, 그 위에 있던 엄마가 테이블을 지탱한 채 잠시 춤을 추다가 딸들을 테이블 밖으로 내보낸다. 그러자 백스크린에는 다시 흰 비둘기가 나타난다. 새의 날갯짓은 힘차고 도전적이어서 딸에게는 또 한 사람의 성숙한 여성으로서의 새 출발이 되고, 엄마에게는 비로소 찾아온 자기 삶에 대한 희망, 자유를 의미하는 듯 보인다.

 

자비로바냐댄스시어터 'Real Love' ⓒ대구문화창작소 이재봉
자비로바냐댄스시어터 'Real Love' ⓒ대구문화창작소 이재봉

 

이렇게 작품은 거시적 관점에서, 여성의 희생을 사랑의 범주에서 생각하고, 그 사랑이라는 대전제 하에 이 땅 위에 인류의 삶이 영위되고 있음을 담담한 호흡으로 춤춘다.

 

라스트 신, 두 딸은 상의를 탈의하고, 테이블의 위치도 대각선 방향으로 바뀌었다. 자매는 무언가 큰 슬픔 또는 공포감에 휩싸인 듯이 엎드려 떨거나, 허공에 헛발질을 하기도 한다. 엄마는 벌거벗은 채 나뭇가지에 엎드린다. 세상에서 소멸하여 자연으로 돌아가는 듯이, 죽은 나뭇가지와 한 몸이 된다. 자매는 큰 슬픔에 빠지고, 세상에 태어나 한 시대를 살았고 엄마가 되었고 또 다른 삶을 있게 한 한 여성의 위대한 삶을 찬양하듯 나뭇가지를 치켜들고 배회한다.

 

 

자비로바냐댄스시어터 'Real Love' ⓒ대구문화창작소 이재봉
자비로바냐댄스시어터 'Real Love' ⓒ대구문화창작소 이재봉

 

<REAL LOVE>는 인간 굴레 인생 일면의 상징적인 이미지들, 이를테면 탄생, , 사랑, 고통, 죽음 등을 마치 소멸 직전에 마주하게 되는 주마등처럼 몸으로 기억하고 상상해 보였다. 그 과정에서 사람의 몸을 테이블, 나뭇가지와 같은 소품들과 더불어 공간 안에서 움직이는 하나의 오브젝트(object)화 시키면서, 사람 역시 자연의 일부로 인식하고 겸손해지는 마음을 작품 전반에 드러냈다. 아울러 몸이 온전히 까발려지는 듯한 직관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몸짓을 통해 그것과 닿아있는 바닥, 허공까지도 하나의 오브젝트로 삼는 듯한 느낌이 상당히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엄마가 폴리시(Polish)로 어떤 고백과도 같은 내레이션을 할 때, 백스크린에 자막 한 줄 넣어주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었던 것.

 

이 세상에 하나의 피조물로서 두려움을 갖는 자연적인 존재이면서, 삶의 순간순간이 사랑과 고통으로 점철되는 여성의 삶의 본질에 대한 본능적 탐구와도 같은 이 작품, 50분이라는 시간감을 잊게 한다.

 

주요기사

 
저작권자 © 문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