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故 조광현 옹/유족 제공
사진=故 조광현 옹/유족 제공

 Q. "어제 밤 11시쯤 자고 있는데 침대가 흔들려서 깼어요"

A. "그런 경우가 더러 있어요. 알아도 모르는 척 하는 것이 피차간의 예의랍니다."(2022년 11월10일 마지막 답변 中)

'지식인 할아버지'로 널리 알려진 '녹야' 故 조광현 옹이 27일 서울의 한 병원에서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유족이 29일 전했다. 향년 87세(만).

경기도 김포에서 태어난 고인은 경복고, 서울대 치대를 졸업한 뒤 1962∼1995년 서울 종로→신촌→홍대입구에서 영진치과를 운영했다. 한겨레신문과 인터뷰에선 "내가 고집이 세서 돈을 잘 못 벌었습니다…간호사 월급 줄 돈도 없어서 나 혼자 일할 때가 많았어요. 청소도 내가 직접 하고. 그래도 아내가 돈을 벌어서 예순한살 때 치과를 아예 그만두었지요."라고 말했다.

고인은 네이버 지식인에서 2004년 첫 답변을 시작으로, '녹야'라는 닉네임으로 수많은 질문에 답변을 적어왔다. 공개된 답변만 5만 3천 개 이상. 채택된 답변 수만 2만 8천 개에 이른다. 네이버 지식인은 많은 답변을 달수록 '내공' 점수를 받아 등급이 올라가는데, 고인은 '하수-평민-시민-초수-중수-고수-영웅-지존-초인-식물신-바람신-물신-달신-별신-태양신-은하신-우주신-수호신-절대신'으로 구성된 등급 중 두번째로 높은 '수호신' 등급이었다.

고인은 1985년 제7회 치과의료문화상, 1994년 제2회 서울치과의사회 공로대상, 2008년 네이버 파워지식IN상을 받았다.

고인이 '지식인 스타'가 된 건 단지 답변 건수나 등급 때문이 아니었다. 전공인 치아 관련 지식에 대한 답변은 물론, 국민학교 입학 전에 4천자를 외웠다는 한문 실력 등 풍부한 교양을 바탕으로 다양한 질문에 여유와 위트가 넘치고, 인생의 지혜가 담긴 답변을 해서 인기를 끌었다.

사진=작년 말 지식인에 올라온 질문과 故 조광현 옹의 답변/네이버 지식IN 캡처
사진=작년 말 지식인에 올라온 질문과 故 조광현 옹의 답변/네이버 지식IN 캡처

한겨레신문과 중앙일보 인터뷰에 소개된 문답은 다음과 같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아들은 세뱃돈이나 한 달 용돈이 얼마 정도나 될까요?"→"그런 생각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자꾸 살기가 힘들어지고 싫어집니다."

"아버지 재산이 얼만지 모르겠는데, 평소에 명품가방도 선물해주고, 주위 사람들 말로는 아버지 재산이 몇백억원이래요. 이 정도면 아버지 잘 만난 건가요?"→"아버지는 잘 만나고 잘 못 만나고가 없습니다. 그냥 주어진 운명일 뿐입니다."

"산타 할아버지 나이는 몇살인가요?"→"아빠 나이와 동갑입니다"

"엄마가 브래지어 하지 말라는데 어떡하죠?"→"엄마 먼저 하나 사드리세요."

"용돈 달라고 공손히 말하는 법?"→"엄마 아빠 이런 생각 해봤어요? 사랑하는 자녀가 돈 때문에 다른 애들한테 왕따당하는 꼴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할아버지, 제가 요즘 공부도 재미없고 지루한데 조언 좀 해주세요."→"나는 공부가 재미없고 지루한 사람한테는 할 얘기가 없습니다. 내 얘기도 지루할 테니까요."

중앙일보 인터뷰에선 답을 모르는 질문을 받으면 공부해서 답변한다고 했다. "이 나이가 돼도 모르는 건 알고 싶죠. 내 공부하려고 사전도 찾아보고요. 궁금해서 스스로 알아본 건 안 잊어먹어요. 지식은 이렇게 늘려왔습니다. 내가 모르는 걸 알고 있다면 초등학생이어도 은인이죠. 내 선배라고 생각합니다."라고 했다.

이토록 열정적이었던 고인이었지만, 사실 답변을 다는 일도 쉽지 않았다. 시력이 크게 손상된 탓에 돋보기 두개를 겹쳐 보며 '독수리타법'으로 한 글자 한 글자 입력해야 했고, 손목보호대도 착용했다. 그럼에도 고인은 안방 침대 바로 옆에 컴퓨터를 놓고 자다가도 일어나서 답변을 달았다. 건강이 악화하자 2017년 2월과 2018년 10월 두차례 활동 중단을 선언했지만, 아쉬워하는 팬들의 성화로 활동을 재개했다. 팬들이 서울 마포구 자택으로 콩장 등 반찬과 간식을 보내줬다고 한겨레신문은 전했다.

사진=故 조광현 옹의 ID인 '녹야' 지식인 페이지. 2022년 11월 10일 이후로 답변이 올라오지 않았다/네이버 지식IN 캡처
사진=故 조광현 옹의 ID인 '녹야' 지식인 페이지. 2022년 11월 10일 이후로 답변이 올라오지 않았다/네이버 지식IN 캡처

지난 해 3월 배우자 故 권오실 씨가 작고한 이후로도 계속해서 활동을 이어가던 고인은 지난 11월 10일 세 개의 답변 이후로 돌연 활동을 멈췄다. 두 차례 활동 중단 때에 직접 공지를 올렸던 것과는 다른 모양새였다. 그러나 '녹야'의 답변을 기다리던 많은 팬들은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닌지 다양한 추측과 걱정의 글을 올렸다. 그러다 29일 유족의 부고가 전해졌고, 인터넷에서는 추모와 애도의 물결이 이어졌다. 배우자를 먼저 떠나보낸 지 1년이 조금 넘어, 고인의 생일인 3월 30일을 사흘 남기고서였다.

빈소는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 15호실에 마련됐다. 발인은 30일 오전 6시 1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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