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뉴스 아티스트 에디터 강해인 starskylight@mhns.co.kr 영화를 보고, 읽고, 해독하며 글을 씁니다. 좋은 영화는 많은 독자를 가진 영화라 믿고, 오늘도 영화를 읽습니다.

[문화뉴스 MHN 아띠에터 강해인] '나비효과'라는 유명한 이론이 있다. 나비의 날갯짓 한 번이 기후 변화로 이어질 수 있듯, 미세하고 작은 사건이 엄청난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걸 말한다. 다시 말해, 하나의 결과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요인이 무척 많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이론에 엉뚱한 질문을 던지자면, 그 나비의 날갯짓이 있기까지 기여한 수많은 요인도 태풍의 인과요인에 넣을 수 있을까?

'언노운 걸'은 그런 이야기다. 앞서 말한 태풍은 이름 없는 소녀의 죽음으로 대체되고. 죽음에 영향을 준 수많은 날갯짓을 비추며 개개인의 책임에 관해 묻는다.

 

 

제니의 날갯짓

갑작스러운 사고로 죽은 소녀의 공식적 사인은 과다출혈이다. 하지만 제니(아델 하이델)는 이 소녀가 쫓기고 있었다는 걸 알고는 죽음의 과정을 알고자 한다. 먼저, 왜 의사인 그녀가 이걸 조사하는지 짚고 넘어가야 한다. 소녀는 죽기 직전 제니의 병원에 벨을 눌러 도움을 청했다. 하지만 제니는 인턴에게 갑질하느라 그 벨소리를 무시했고, 여기서 강한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 그리고 이게 소녀의 죽음과 관련된 첫 번째 날갯짓이다.

여기서 제니의 행동은 두 가지 측면에서 바라볼 수 있다. 하나는 죄책감을 진범에게 전가해 마음의 짐을 덜고자 하는 과정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소녀의 도움을 무시한 일에 대한 순전히 책임감을 느끼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전자가 개인주의의 이기적 욕망이라면 후자는 인간이기에 가지는 양심적 의무감이다. 그런데 제니에게 이기적이라는 말을 해도 괜찮을까. 영화에서 가장 진실을 추구하는 그녀에게 이기적 욕망을 운운하는 건 비약, 오독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도 이를 배제하지 않는 건, 그녀가 초반부 보여준 의사로서의 권위의식이 섞인 대사에 근거한 것이다. 초반부 제니는 "의사는 환자에게 휘둘려서 안 되고, 감정적 대응을 해서도 안 된다"라며 줄리안(올리비에 보노)를 다그친다. 소녀가 죽기 전 벨을 눌렀을 때도 '의사에게도 휴식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줄리안에게 나가지 말라고 한다. '언노운 걸'의 시작엔 이런 냉정하고 개인주의적 삶을 사는 제니가 있었다. 그러기에 그녀가 소녀의 죽음을 쫓는 출발점에서 소녀보다 자신을 먼저 생각했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다.

하지만, 어떤 심정에서 출발했다 하더라도 그녀가 도달한 지점은 하나다. 제니는 그날 밤 있었던 죽음의 진실을 따라가며 타인의 아픔을 느끼고, 연민을 보일 줄 아는 의사로 성장한다. 다르덴 형제의 카메라는 제니가 소녀의 죽음에서 죄책감을 느끼고, 자신 주변을 관찰하는 과정을 담으면서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가장 빠른 방법을 제시한다. 그리고 그건 타인의 삶을 직접 '경험'하는 것이다. 초반부 환자를 대하던 제니와 영화 후반부의 제니는 다르다. 그녀는 타인의 고통에 공감할 줄 아는 인간이 되어있었다.

 

 

다른 세 번의 날갯짓

영화가 집요히 쫓는 건 다른 세 번의(혹은 그 이상의) 날갯짓이다. 그날 밤, 소녀의 죽음에 관여한 인과요인을 따져보면, 우선 캠퍼에서 오럴 섹스를 요구한 노인과 그 소녀를 부른 노인의 아들이 있다. 언뜻, 이 부자는 과다출혈이라는 소녀의 죽음과 무관해 보이나 미성년자에게 못 할 짓을 했고, 악의 구렁텅이에 있는 소녀를 목격하고서도 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 자신의 목적을 위해(성적 만족) 이용했다. 굳이 더 따지자면, 소녀에게 창녀라는 표식을 떼어주지 못해 브라이언의 아빠(제레미 레니에)의 눈에 띄게 한 것, 그리고 그날 밤 소녀의 동선에 영향을 준 게 더 직접적인 날갯짓으로 볼 수 있겠다.

다음 날갯짓은 브라이언 아빠의 성욕이 개입한 것으로, 이는 소녀의 죽음에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줬다. 앞의 부자(父子)처럼, 역시나 성을 구입한 브라이언의 아빠는 그에 만족하지 못했고, 더 많은 걸 요구했다. 그러나 이를 거부한 소녀는 도망을 가다 넘어졌고, 출혈을 일으켜 사망에 이른다. 손을 대거나 직접적인 폭력이 개입하지 않았다고 밝혔으나, 이 행위가 가장 많은 책임을 져야 할 요인이다. 그리고 영화도 브라이언의 자백으로 귀결되면서, 이 사건의 진짜 용의자이자 죄를 범한 사람, 그리고 제니가 과하게 짊어진 죄책감을 '조금'이나마 ('언노운 걸'에서 죄책감이란 완전히 떨쳐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도 안 되는 속성으로 보인다) 덜어준다.

마지막으로 언급되는 날갯짓은 죽은 소녀의 언니가 했던 일이다. 브라이언 아빠의 행동이 법적으로 가장 직접적인 원인이라 하지만, 본 글에서 인용하고 있는 '나비효과'와 가장 잘 어울리는 요인은 이번에 설명할 행위다. 소녀를 창녀로 활동하는 것을 방치, 용인한 소녀의 언니는 영화 내에서 가장 근원적인 책임을 진 존재다. 이는 영화에서 볼 수 있는 일 중에서 최초의 날갯짓이며, 덕분에 '나비효과' 이론의 날갯짓과 가장 유사한 성격을 가진다.

'언노운 걸'은 모든 요인을 따지고, 그걸 제공한 인물을 가해자의 위치에 세운다. 그리고 공동체 내의 이 사건에서 완전히 무결한 사람이 있을 수 있는지를 묻는다. 영화가 끝난 뒤, 가장 큰 공포와 찝찝함은 스크린 밖의 현실 속 무수히 많은 사건과 우리를 엮어버리는 데서 온다. 우리는 공동체에서 일어난 하나의 죽음에서 완전히 무관할 수 있는가. 책임이 없을 수 있는가. 모두를 죄인의 위치에 세우는 것, 그것이 '언노운 걸'의 파괴력이다.

 

 

죄책감의 확산

성실한 제니는 사건과 연루된 사람들을 불편하게 한다. 이름이 없고, 그래서 관심도 없는(심지어 흑인이라는 불리한 위치에 있는) 존재의 죽음에 모두 모르쇠로 일관한다. 유독 유별나게 죄책감을 느낀 제니가 공동체(날갯짓을 한 사람들) 주위를 돌며 양심을 마구 찔려댄다. 물론, 그녀가 접촉하기 전부터 이상 반응을 보인 브라이언(루카 미넬라)도 있다. 그는 제니가 방문하기 전부터 몸이 좋지 않았다. 그러다 제니를 보고서 더 불편해져 토를 하고, 그가 목격한 것도 토해 낸다. 여기서 감독의 의도를 짐작할만한 건, 죄책감은 어릴수록 사회에 때 묻지 않을수록 강하게 느낀다는 믿음이다.

제니의 오지랖, 탐정 놀이 덕에 캠퍼에 있던 노인은 (역시 죄책감에서 오는) 불안함에 자백했고, 브라이언의 아빠도 견디다 못해 자신의 잘못을 털어놓는다. 그는 마지막까지 아들의 입까지 막으려 했지만, 제니가 퍼뜨린 죄책감은 숨통을 조여오고, 그를 붕괴시켰다. 진실의 무게가 거짓보다 무거웠다. 그리고 제니는 사건의 진원지에 죄책감을 심는 데도 성공한다. 죽은 소녀의 언니는 '질투'에 눈이 멀어 자신이 '해야 했던' 일을 방치했고, 소녀의 죽음 앞에서도 침묵했다. 이런 그녀를 변화시킨 것은 제니였다. 그렇게 제니의 죄책감은 공동체 곳곳으로 번져간다.

여기서 인물들이 느끼는 모든 죄책감이 소녀의 죽음에 대한 책임감 및 연민을 뜻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브라이언의 아빠는 어떻게든 소녀의 죽음에서 자신을 분리하려 했다. 심지어 끝까지 제니에게 책임을 전가하려는 비열함도 보인다. 그는 그 죽음보다 가정에 충실하지 못한 것, 자신의 욕구를 제어하지 못한 것에 관한 후회가 더 큰 듯하다. 그 후회에 죽은 소녀의 자리가 얼마나 있는지 의문이다. 성적 서비스를 받은 노인 역시 소녀의 죽음에 관한 것보다는 부도덕한 짓을 한 것과 아들에게 갈 피해부터 걱정한다. 그는 그날 밤 서비스에 대한 비용을 냄으로써, 그날 밤 소녀의 일과는 완벽히 작별한 듯했다.

이런 부정적 관점으로 본다 해도 제니의 행위와 죄책감의 확산은 의미가 크다. 이름과 함께 그들의 흔적을 지우려 했던 인물들은 모두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걸 인지하고, 두려워했으며 고통을 받았다. 제니에게 희생자의 이름을 찾는 게 중요했듯, 잠정적 가해자들이 잊으려 했던 죄에 명확히 대가를 치르게 했다는 게 중요하다. 그렇게 '언노운 걸'에서 소녀의 이름을 찾는 건, 공동체의 정의를 찾는 과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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