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세계대전 막바지 다룬 영화 '퓨리'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연합군 동진 가속
2차대전 말의 기갑전 구도 '물량 대 기술'

사진 = 영화 '퓨리' 포스터 / 왓챠
사진 = 영화 '퓨리' 포스터 / 왓챠

[문화뉴스 우현빈 기자]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영국의 대배우, 희극인 찰리 채플린의 말이다. 모든 인생은 고난과 풍파를 거쳐 가지만, 그 아픔은 그 순간 그 당사자의 것으로 끝난다. 결국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타인의 시선, 그리고 과거를 돌이켜 보는 자기 자신의 시선이다.

전쟁 또한 마찬가지다. 전쟁을 현실로 살아내는 당사자에게 전쟁은 그저 폭력이고 고통이다. 하지만 그 모든 '당사자'들의 전쟁이 얽히고설킨 뒤에는, 전쟁은 결과론이 되고 예술이 된다. 그렇게 우리에게는 역사가 남고, 작품이 남는다.

그러나 우리가 언제까지고 그 '작품'의 제삼자이리라는 법은 없다. 문명이 꽃피우기 전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전쟁 없는 역사는 존재한 적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과거, 지난 전쟁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전쟁이 피상적으로 이해될 때 비극은 더 쉽게 반복되기 때문이다.

이번 '영화 너머 전쟁' 기획에서는 전쟁을 다룬 영화의 이야기를 따라가며, 그 안에 담긴 전쟁의 기억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 첫 번째 순서는 2차 세계대전의 막바지를 다룬 영화, '퓨리'다.

'퓨리' 속의 전황: 2차 세계대전 말 유럽전쟁의 구도

2014년 개봉작인 '퓨리'는 2차 세계대전 말, 얼마 남지 않은 병사를 데리고 독일군의 진군 저지를 명령받은 전차부대와 그 대장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배경이 되는 시기는 1945년 4월로, 나치 독일의 패망을 불과 몇 달 남긴 시점이다. 당시 연합군은 유럽 전선 대부분에서 추축국 군대를 밀어내고, 독일 영내로 진격하고 있었다.

사진 = 신병 노먼을 위로하는 분대원들. 이날 노먼은 처음으로 독일군 병사를 사살했다 / 영화 '퓨리' 中 / Netflix
사진 = 신병 노먼을 위로하는 분대원들. 이날 노먼은 처음으로 독일군 병사를 사살했다 / 영화 '퓨리' 中 / Netflix

주인공인 컬리어 하사는 베테랑 군인으로, 부하들의 인정을 받는 유능한 상관이다. 그와 오랜 기간 함께한 분대원들은 영화 초반부 처음으로 적군을 죽이게 된 신입 분대원 '머신' 노먼 엘리슨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며 그들이 컬리어와 '아프리카에서부터 함께 싸웠'고, '가장 생환률이 높은 분대'라고 증언한다.

실제로 미군은 1942년 아프리카에서도 전투를 벌였다. 당시 북아프리카 전선에 투입된 미군은 영국군과 함께 비시 프랑스(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 지역을 통치한 세력. 독립국으로 보기도 하고, 나치독일의 괴뢰국으로 보기도 한다), 이탈리아, 독일 등 추축국을 몰아냈다.

브래몰은 실제로 '그들 가운데 많은 병사들이 실전 경험이 풍부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가 이끄는 제60소총연대는 북아프리카 사막 작전에도 참여했다.

(디데이 제6장 中)

이후 시칠리아 등지에서 전선을 펴고 추축국을 공격하던 미군과 연합군은 1944년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통해 새로운 전선을 형성하며 독일을 압박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노르망디로 투입된 미군의 상당수는 아프리카에 투입됐던 인원들이었다.

이미 1943년 이탈리아를 항복시킨 연합군은 노르망디 1944년 프랑스 지역까지 되찾았고, 그해 9월에는 전쟁 발발 이래 처음으로 독일 본토에 진입했다. 이후 '퓨리'의 배경이 되는 베를린 공방전이 시작되기까지는 7개월이 걸렸다. 그로부터 한 달도 안 되어, 연합군은 독일의 무조건 항복을 받아내며 유럽전쟁에서 승리했다.

사실 퓨리의 싸움은 없었다

사진 = 독일군의 진군을 저지하기 위해 이동하는 컬리어 소대 / 영화 '퓨리' 中 / Netflix
사진 = 독일군의 진군을 저지하기 위해 이동하는 컬리어 소대 / 영화 '퓨리' 中 / Netflix

영화의 이름이자 주인공 컬리어 분대의 전차 '퓨리'와 그 소대는 동진하는 연합군 본대를 지원하기 위해 독일군의 진군을 저지하는 역할을 맡고, 그 과정에서 처절한 전투를 벌인다.

하지만 사실 영화 '퓨리'처럼 처절한 전투는 적어도 4월 말 서방 연합군의 동진에서는 일어나지 않았고, 심지어 '전투다운 전투를 겪지도 않았다'는 평가도 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전선 확대와 독일군의 반격으로 부담이 커진 서방 연합군은 1945년 1월, 소련의 스탈린에게 전선을 밀어줄 것을 요청했다. 당시 독일군은 서부전선 반격에 실패하면서 국력을 크게 소모했는데, 특히 핵심 병력이 궤멸당하면서 동부 방어 능력까지도 저하된 상태였다. 이에 즉각 반응한 스탈린은 그달 20일로 예정되어있던 소련군의 공세를 12일로 앞당겼다.

소련군의 본격적인 공세가 시작되자 서방 연합군은 이탈리아와 프랑스 지역 정리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소련의 공세에 대응하느라 서부전선에 있던 독일군의 상당수가 동부전선으로 이동한 덕에 서방 연합군은 이미 점령한 지역의 안정화, 특히 이탈리아 빨치산 정리에 힘을 쓸 수 있게 됐다.

그렇다고 동방 연합군만 진격한 것은 아니었다. 그해 3월에는 미군의 라인강 도하를 시작으로 서방 연합군의 동진도 본격화됐다. 하지만 동부전선이 이미 베를린 코앞까지 밀려난 상황이라 독일군은 동부전선에 더 많은 힘을 투자할 수밖에 없었다.

독일군은 서부전선에서 20개 사단을 빼내 동부전선으로 급히 보냈다. 연합군을 공포에 떨게 했던 티거 전차도 모두 서부전선의 베를린 방어전에 투입됐다. 이미 핵심 병력이 사라진 상태에서 남아있던 병력마저 대거 빼냈으니, 서부전선은 사실상 비어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러한 상황 덕에 서부 연합군의 동진은 비교적 쉽게 이루어졌다.

그러니까 사실 컬리어 분대가 만날 티거는 이미 서부전선에는 남아있지 않았고, 독일 역시 당장 코앞에 들이닥친 동부 연합군을 놔두고, 그것도 무장친위대를 서부전선으로 보낼 만큼의 여유가 없었다. 영화 퓨리 속 상황은 실제 전쟁의 흐름과는 다소 차이가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퓨리'에는 살펴볼 만한 지점이 여럿 있다. 당시 전차전의 구도, 독일의 처절한 항전, 연합군에게 트라우마를 남긴 의외의 사건이 퓨리에 잘 묘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전차전: 기술과 물량의 싸움

사진 = 독일군의 티거 전차와의 전투 후, 완파당한 아군 소대 전차를 바라보는 컬리어. 이 전투로 컬리어 소대는 전차 셋을 잃고 컬리어 분대 혼자 남게 된다 / 영화 '퓨리' 中 / Netflix
사진 = 독일군의 티거 전차와의 전투 후, 완파당한 아군 소대 전차를 바라보는 컬리어. 이 전투로 컬리어 소대는 전차 셋을 잃고 컬리어 분대 혼자 남게 된다 / 영화 '퓨리' 中 / Netflix

작중 등장하는 전차전에서, 컬리어의 전차소대는 4대만 남은 상태로 독일의 티거를 맞닥뜨린다. 처절한 노력 끝에 티거를 잡아내는 데에 성공하지만, 그 과정에서 3대의 아군 전차를 잃고 컬리어 분대만 남게 된다.

2차대전은 그야말로 기갑전이었다. 고작 몇 미터 너머 참호를 점령하기 위해 셀 수 없는 병사가 갈려 나갔던 1차대전의 참호전 양상과 달리, 2차대전에서는 전차가 장애물과 참호를 무력화하고 보병에게 엄폐와 화력 지원을 제공했다. 심지어 완파된 전차의 파편조차 보병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은·엄폐 지형지물이 되어주었다. 이러한 2차대전을 겪으며 기갑 장비는 명실상부한 지상전의 지배자가 되었다.

이 기갑 장비의 이점을 가장 크게 누린 것은 독일이었다. 당시 독일의 전차 기술력은 명실상부한 최강이었는데, 중형 전차인 5호 전차 '판터'와 중전차인 6호 전차 '티거'는 연합군에게 그야말로 공포의 대상이었다. 연합군의 기존 전차로 정면에서 맞붙는 건 어림도 없었고, 1944년 도입된 파이어플라이(셔먼 IC), 76mm 주포 도입형 셔먼(M4A1) 정도가 그나마 정면에서도 취약점을 잘 노리면 상대해볼 만한 수준이었다.

이러한 기술력 차이로 인해 연합군은 독일 전차, 특히 중전차를 상대할 때 상대보다 훨씬 큰 손실을 감내해야 했다. 미 육군 중령 크리스토퍼 윌벡의 저서 'Sledge Hammer'에 따르면, 티거 전차와 기준 전차전 교환비는 12:1 이상이었다.

실제로 당시 연합군은 티거 하나를 상대하기 위해 최소 4대의 셔먼을 투입해야 3:1의 교환비를 기대할 수 있었다. 그것도 근거리까지 접근한 상태에서 전투가 벌어졌을 때의 이야기였다. 

당시 미국은 전차의 일반적 전투 거리를 8~900미터로 보고 있었다. 하지만 소련의 실험에 의하면, 75mm 주포의 연합군 셔먼 전차로는 650m까지는 접근해야 티거의 측면 장갑을 관통할 수 있었다.

사진 = 셔먼 전차가 쏜 철갑탄이 티거 전차에 맞고 도탄되는 장면. 실제로 셔먼 전차로 티거 전차를 상대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 영화 '퓨리' 中 / Netflix
사진 = 셔먼 전차가 쏜 철갑탄이 티거 전차에 맞고 도탄되는 장면. 실제로 셔먼 전차로 티거 전차를 상대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 영화 '퓨리' 中 / Netflix

그마저도 실험 상황에서나 그랬고, 미군 전차병들의 보고에 따르면 76mm로 주포가 교체된 이후에도 셔먼 전차는 500m, 심지어 300m 거리에서도 판터나 티거 전차를 격파하기 어려웠다. 반면 티거 전차는 1km 이상 거리에서, 그것도 각도와 무관하게 연합군 전차를 손쉽게 격파했다. 심지어 티거Ⅱ는 2km 이상 거리에서 연합군 전차의 정면 장갑을 관통할 수 있었다. 연합군은 교전수칙에서 되도록 티거와의 전투를 피할 것을 권하기까지 했다.

다만 실 교환비는 집계에 따라 5:1에서 3:1까지 내려갔는데, 그 이유는 기동 불능에 빠진 티거 전차의 노획을 막고자 독일군이 전선이 밀려날 때 그 티거를 자폭시켰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기술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독일이 밀려난 것은, 연합군이 그 이상으로 물량적 우위를 점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독일은 한정된 인적·물적 자원으로 인해 전차와 그 부품의 생산 속도가 제한적이었던 반면, 연합군은 높은 생산력으로 전차를 양산해냈다.

특히 미국이 생산 면에서 큰 강점을 보였다. 독일이 적은 수의 다목적 생산설비로 전차 부품을 만들 때, 미국은 압도적인 자본을 투입해 훨씬 많은 수의 특수목적 생산설비로 전차 부품을 '찍어낼' 수 있었다. 1940년 말 현대적 전차를 고작 365대 보유하고 있던 미국은, 2차대전이 끝났을 때 셔먼 전차만 5만여 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 생산력의 차이로 인해 독일군의 장비는 점점 줄어드는 반면 연합군의 장비는 오히려 늘어만 갔다. 마치 한국전쟁에서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남한군과 UN군이 밀려났듯, 독일은 전차의 압도적 수적 우위를 이기지 못하고 밀려나야 했다. 만약 독일의 기술력이 이 수적 우위를 압도할 수준이었거나 연합군의 생산력이 떨어졌다면, 전쟁의 구도는 완전히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②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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