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급구조를 뒤바꾸는 루벤 외스틀룬드 감독

사진=영화 '슬픔의 삼각형' 포스터
사진=영화 '슬픔의 삼각형' 포스터

[문화뉴스 장성은 기자] 제75회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거머쥔 ‘슬픔의 삼각형’이 블랙코미디로서 어느 정도의 성공을 거뒀는지 의문이 든다. 계급구조와 자본주의를 전복하는 설정과 노골적인 이미지가 과연 쓴웃음을 자아내는지 말이다.

‘슬픔의 삼각형’은 침몰한 호화 크루즈에서 살아남은 8명의 승객이 섬에서 적응하는 블랙코미디다. 인플루언서 모델 커플 ‘칼’과 ‘야야’는 협찬으로 떠난 크루즈 여행에서 각계각층의 부자들과 함께 휴가를 즐긴다. 선장과의 만찬 날, 폭풍우에 급격히 흔들리던 배가 해적이 던진 수류탄에 그만 침몰해 버린다. 오직 모델 커플과 선박 총괄 매니저 ‘폴라’, 엔진실 직원 ‘넬슨’, 언어장애를 가진 ‘테레제’, 비료 회사 사업가 ‘드미트리’, 화장실 담당 청소부 ‘애비게일’, 홀로 여행에 나선 부자 등 8명만이 외딴섬에 떨어져 새로운 계급 사회를 이룬다. 

‘칼과 야야’ ‘요트’ ‘섬’ 3부로 구성된 영화는 계급의 질서가 번번이 뒤집힌다. 1부에서는 칼과 야야가 지닌 사회적 지위를 보여준다. 칼은 여성 모델의 수입 1/3에 달하는 남성 모델로, 패션쇼에서 영향력 있는 사람에게 앉은 자리를 양보해야 하는 사회적 위치에 놓여 있다. 이와 달리 야야는 패션쇼 오프닝을 여는 첫 모델이면서 연인인 칼보다 경제적으로 여유롭다. 간극이 있는 ‘칼과 야야’의 계급은 2부에 넘어 들어 동등해지고 3부에서 끝내 전복된다. 

사진=영화 '슬픔의 삼각형' 스틸컷
사진=영화 '슬픔의 삼각형' 스틸컷

전복의 이미지는 2부 ‘요트’에서 부르주아를 망가뜨리며 확연히 드러난다. 호화스러운 선박은 부자의 말이 곧 명령이 돼버리는 수직 구조의 세계이며, 이들의 위상이 뒤틀려 추락하면서 계급 지위가 또다시 뒤집힌다. 심한 폭풍우 치는 날, 영화는 흔들리는 배에서 부자들이 멀미로 구역질하고 음식물을 토하는 장면을 노골적으로 담아낸다. 승무원은 빈속에 멀미가 더 심해진다며 음식을 권유하고 승객은 꾸역꾸역 먹고 토한다. 이 장면은 인물을 폭력적으로 대한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게 만든다. 그리고 같은 공간에 있는 사람치고 승무원은 지나치게 멀쩡하다. 부르주아는 오물과 토사물 속에서 몸부림치는 존재로 전락하며 승무원은 그 잔해를 일사천리로 해치우는 해결사로 분한다. 승객과 승무원의 수직적인 계급구조는 고통 앞에서 쉽게 뒤집힌 것이다.

심지어 화장실 변기에 앉아 고통에 시달리는 인물과 변기에서 오물이 폭포처럼 범람해 복도까지 흘러넘치는 이미지는 부르주아의 위상을 나락으로 떨어뜨린다. 비단 이 장면뿐 아니라 전복의 조짐은 여러 군데서 드러난다. 줄지어 선 남성 모델들이 인터뷰어의 요청에 따라 브랜드 ‘발렌시아가’와 ‘H&M’을 상반된 표정으로 드러낸 도입부는 전복 이미지의 첫머리로 여겨진다. 요동치는 배에서 수류탄 사업가 부부와 모델 커플 얼굴에서 초점이 여러 번 바뀌는 연출도 한몫 더한다. 

사진=영화 '슬픔의 삼각형' 스틸컷
사진=영화 '슬픔의 삼각형' 스틸컷

2부 ‘요트’가 계급주의의 전복이라면 3부 ‘섬’은 자본주의의 전복이다. 생존자 8명은 살아남기 위해 섬 생활을 버티면서 또다시 새로운 계급 사회를 형성하는데, 그 모습이 흡사 원시시대인 양 그려진다. 배에서 화장실 담당 청소부였던 애비게일은 뛰어난 사냥 솜씨와 생활력으로 ‘선장’의 지위를 얻어 모계사회를 이룬다. 다른 사람들의 생계까지 책임지는 동시에 야야의 연인 칼에게 음식을 주는 대가로 밤을 함께 보내는 권력을 얻기도 한다. 3부는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의 ‘신들의 깊은 욕망’이 불현듯 떠오를 정도로 원시성을 띤다. 특히 애비게일이 나오는 장면에선 유독 도덕과 윤리가 배제된 채 권력이 작동하는 듯하다.

원시적 성격은 영화 막바지에서 야야가 발견한 리조트 엘리베이터라는 문명 앞에서 다시 한번 전복을 맞이한다. 무인도인 줄 알았던 섬이 리조트가 세워진 휴양지로 공간 개념이 뒤집히는 순간 애비게일도 이성을 잃고 만다. 지금까지 영화가 뒤집은 자본주의와 계급구조가 본래 상태로 돌아간다는 걸 직감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거듭된 뒤집힘이 유희를 끌어내는지는 다른 문제로 읽힌다. 

망가질 대로 망가져 버린 부르주아의 모습이 지나치게 노골적이어서 가학적이라는 인상 탓인지 이 영화가 내겐 블랙코미디로서 제대로 기능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뒷간의 깊이만큼 더러워진 부자들의 모습에 통렬함을 느낄 수도 없다. 선장과 자칭 똥팔이 드미트리가 주고받는 정치 명언은 긴급 조난 상황에서 힘을 얻지 못한 채 나뒹군다. 사회 체제가 무너지고 뒤집힌다는 뜻의 ‘전복’이라는 단어가 이미지로 거듭돼 부조리를 표현함에도 ‘슬픔의 삼각형’은 유머와 동석하지 않는다. 잇따른 뒤집힘에는 균열과 틈새를 비집고 들어와 세계를 초탈하는 거리감이 없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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