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년 전오늘인 2012년 8월 7일은 필자에게 퍽 우울한 날로 기억된다. 그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갑작스럽게 받은 전화 한 통 때문이다.

필자에게는 고등학생 시절 교회에서 가르침을 받은 잊을 수 없는 여선생님이 한 분 계신다. 서울음대에서 피아노를 전공한 분으로 비교적 뚱뚱한 체격에 걸맞게 웃음소리도 크고, 화도 잘 내고, 눈물도 많은 즉흥적이고 정적(情的)인 특별한 성격의 소유자다. 또한 늘 민낯이지만 하얀 피부에 연지를 바른 것 같은 발그스레한 양 볼이 마치 활짝 핀 빨간 장미꽃을 연상케 하는 고운 여인이었다. 나는 그런 그분이 참 좋았고 학창 시절 내내 그분을 따르며 가깝게 지냈다.

그 후 필자는 대학에 진학하고 거처도 옮기면서 서로 연락이 끊겼으나 20여 년이라는 긴 세월이 지난 후 아내와 함께 미국에 이민 갔을 때 L.A에서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때, 그분이 여러 해 전에 혼자가 되었고, 외아들이 결혼해서 한국에 떨어져 살고 있으며, 지금은 L.A.의 어느 한인교회에서 음악 전도사로 시무하며 교회 소유의 자그마한 원룸(One-room) 아파트에서 혼자 외롭게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았고, 특히 그분이 한국 기독교 역사의 중요한 인물인 ‘조만식’ 장로의 외손녀라는 것 또한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그 후 우리 가족은 그분과 서로 의지하며 10년 가까이 지냈지만 사정상 아틀란타, 뉴욕 등지에 거주하며 연락이 끊긴 후로는 행방을 찾을 길이 없었다.

그러던 중 오늘 오전 어느 지인으로부터 전화 연락을 받게 되었다. 그 전화의 내용은 그렇게도 찾고 있던 그분의 부음(訃音) 소식이었다. 그것도 며칠 전 이웃 사람에 의해 침상에 누운 채 주검으로 발견되었는데 이미 3일 전쯤 혼자 숨을 거둔 것으로 예상되며 지난주에 장례를 치뤘다는 것이다.

죽음이란 누구나 한번은 맞이해야 할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그분의 죽음은 너무나 외롭고 쓸쓸해 보여 심히 안타까웠다. 가족들은, 특히 아들은 어디서 무얼 하기에 머나먼 이국땅에서 이렇듯 홀로 외롭게 유명(幽明)을 달리했단 말인가..... 그래서 하루종일 우울한 마음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또 하나는, 딸의 진로(進路)에 관한 문제 때문이다.

그날 해질녘, 필자는 여러 날 떠나있던 큰딸의 집을 찾았다. 현관 옆 화단에 이르니 지난봄에 심어놓은 장미 나무들이 이젠 키가 훌쩍 자란 채로 나를 반기는 듯했다. 그런데 초여름 만개했던 장미꽃들이 모두 져버리고 한 송이만 홀로 남아 외롭게 피어있었다.

지난봄, 현관 옆 화단에 심어놓은 장미 나무의 모습
지난봄, 현관 옆 화단에 심어놓은 장미 나무의 모습

미국 이민 초기인 1992년, 한국에서 초등학생 시절부터 바이올리니스트를 꿈꾸던 14살의 어린 소녀인 큰딸의 책상 앞에는 일본 출신의 미국 바이올리니스트 '미도리 고토(五嶋みどり, Midori Goto)'의 연주 장면을 찍은 사진이 10여 장 나란히 붙어 있었다. 아마도 딸은 미도리와 같은 바이올리니스트가 되고 싶었나 보다.

아비라서가 아니라 음악 비평가로서 객관적으로 평가해 볼 때 남달리 절대음감과 재능을 타고난 것 같아 딸이 바이올리니스트가 되겠다는 결심에 내심 기대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도움을 주지못한 것에 대해 늘 미안한 생각을 떨칠 수 없다.

1980년대 중반 필자는 우리나라 최초의 예술기획사인 ’아트코리아‘를 설립, 제1세대 아트 매니지먼트 분야의 개척자로 활약하고 있을 때였다. 그런데 당시 국내에서 가장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인 ’ㄱ‘ 교수가 필자의 딸을 아무 조건없이 가르치겠다는 호의를 보였다. 당시 ’ㄱ‘ 교수의 실력이 출중해서인지, 아니면 대통령 아들에게 바이올린을 가르치던 때라서 그런지 그 교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특별한 관계가 아니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필자는 그 호의를 단호히 거절했다. 이유는 그가 ’아트코리아‘의 소속 연주자였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융통성 없는 아비의 괴팍한(?) 성격 때문에 자식이 호기를 놓친 것이다.

그런데 미국에 온 후 어느 날부터인지 어린 딸은 바이올린을 손에서 놓았다. 바이올리니스트가 되는 것을 포기한 것이다. 아비의 융통성 없는 성격이나 경제적 측면 등등, 미도리와 같은 바이올리니스트를 꿈꾸는 것은 현실적으로 가능성이 없음을 스스로 판단한 듯하다.

그날 나는 딸의 책상 앞에 붙어 있던 미도리의 사진들이 떨어진 것을 발견한 순간 두 가지 떨어짐을 체험했다. 낙화(落花)와 낙심(落心)이다. 딸은 피워보지도 못한 채 조락(凋落)한 '낙화'이고 아비인 나는 딸에 대한 기대가 땅에 떨어진 '낙심'이었다.

떨어진다는 것은 모두 슬픈 것이다. 그것이 ’낙화‘이든 ’낙심‘이든, 또 다른 그 무었이든..... 아무튼 그날의 아픈 기억이 되살아난 2012년 8월 7일은 참으로 우울한 날이었다.

이렇듯 앞서 홀로 외롭게 삶을 마감한 선생님의 모습과, 바이올리니스트로의 진로를 포기한 딸의 모습을 보는 순간 '토마스 무어(Thomas Moor)'의 [여름날의 마지막 장미꽃 'The Last Rose of Summer']이라는 노래가 기억 속에 오버랩(Overlap)되며, 곧 마저 떨어질 남은 한 송이 장미의 낙화를 미리 볼 수 있었다.

필자의 입에서는 어느새 [여름날의 마지막 장미꽃]이 읊조려지고 있었다.

[여름날의 마지막 장미꽃]은 아일랜드의 위대한 국민시인 ‘토마스 무어’가 먼저 세상을 떠난 친구를 그리워하며 쓴 시에 직접 곡을 붙여 만든 가곡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한 떨기 장미꽃'으로 번역됨)

이 가곡은 시와 선율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플로토브(F. v. Flotow)’가 오페라 '마르타(Martha)‘ 2막에 이 멜로디를 소프라노 아리아로 삽입하여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멘델스죤(F. Mendelssohn)’은 피아노 환상곡 E장조에, ’베토벤(L. v. Beethoven)‘은 아일랜드 가곡 제6번에 이 멜로디를 넣어 작곡했고 ‘에른스트(H. W. Ernst)’는 [’여름날의 마지막 장미꽃‘의 주제에 의한 연주회용 변주곡]을 작곡하기도 했다.

오늘은 그중에서 두 곡을 소개하고자 한다.

먼저 들으실 곡은 플로토브의 오페라 ’마르타‘ 제2막의 소프라노 아리아 [여름날의 마지막 장미꽃]이다.

플로토브의 오페라 ’마르타‘ 제2막의 소프라노 아리아 [여름날의 마지막 장미꽃] Soprano, Renee Fleming 

이어서 들으실 곡은 에른스트의 [’여름날의 마지막 장미꽃‘의 주제에 의한 연주회용 변주곡]이다. 서주와 변주 그리고 피날레로 구성된 이 곡은 파가니니의 기교를 그대로 사용했기 때문에 연주하기가 극히 까다로운 곡이다. 그러나 듣는 사람에게는 매우 낭만적인 곡으로 쉽게 친근감을 느낄 수 있다.

하인리히 빌헬름 에른스트 ['여름날의 마지막 장미꽃'의 주제에 의한 연주회용 변주곡] Violin, Midori Goto

딸이 어린 시절 한때 음악적 목표로 삼고 번민하며 가슴 아파하던 대상인 바이올리니스트 ’미도리 고토‘. 그러나 그녀를 오늘 활짝 핀 음악의 꽃으로 만나게 되어 퍽 반가운 마음이다.

[여름날의 마지막 장미꽃]

친구가 잠든 화단에 마지막 장미 꽃잎을 뿌리며 이별을 고한다는 '토마스 무어'의 시상(詩想)이 '플로토브', '에른스트'의 악상을 통해 우울했던 필자의 가슴에 깊히 젖어든다.

강인
예술비평가 
사단법인 카프코리아 대표
국민의힘 국가정책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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