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타르스탄(따따르스탄)의 문화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투르크학(Turkology, 튀르크학)이다. 카잔연방대학교는 상트페테르부크르국립대학과 더불어 세계적인 투르크학 중심 기관 중 하나로, 특히 20세기 초 투르크학 타타르-카잔 학파의 학문적 투쟁과 발전을 이룩한 투르크 민족 학문의 중심대 역할을 했던 학술 기관이다. 카잔연방대학교의 대표적인 학문인 투르크학과 투르크학의 카잔-타타르학파에 대해 이야기 해본다.

 타타르스탄공화국 수도 카잔 // 출처: 강경민 촬영
 타타르스탄공화국 수도 카잔 // 출처: 강경민 촬영

 


 

19세기 말, 제국주의와 함께 발전한 투르크학

투르크학의 개념을 정립한 <소비예트언어학연구소>(ИНСТИТУТ ЯЗЫКОЗНАНИЯ АН СССР)의 ‘소비예트 백과사전 과학 및 편집위원회’에서 1926년부터 1990년까지 출판한 <소비예트 백과사전>(СОВЕТСКАЯ ЭНЦИКЛОПЕДИЯ, МОСКВА, 1990)에 따르면 ‘투르크어를 사용하는 민족의 언어, 역사, 문화, 문학, 민속’을 연구하는 인문사회과학의 복합학문을 말한다.

독립적인 연구는 러시아 제국 말기 19세기 후반부터 문헌학을 중심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는데, 당시의 문헌학(PHİLOLOGY)이란 現중앙아시아 국가와 신장위구르지역 그리고 러시아를 포함한 중앙 유라시아 지역내에서 발굴 및 수집한 역사적인 유형 문헌 자료를 의미한다. 당시 러시아 제국이 주도적으로 수집한 각종 사료 대다수는 현재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러시아 국립 에르미타시 박물관(ГОСУДАРСТВЕННЫЙ ЭРМИТАЖ)을 포함한 상트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 카잔 등에 집중적으로 분포한다. 19세기 말은 러시아제국, 독일, 스웨덴, 프랑스, 일본 등이 경쟁적으로 지역내의 역사적 문헌 자료를 탐험, 발굴, 보전이라는 이유로 약탈하던 시기이기도 하는데, 일본이 신장위구르(XİNJİAN, 新疆維吾爾自治區)의 서역남도와 셔역북도내 투루판(TURPAN, 吐鲁番)의 베제클리크(BEZEKLİK THOUSAND BUDDHA CAVES, 柏孜克里千佛洞) 천불동과 아스타나(ASTANA CEMETERY, 阿斯塔那古墓) 고분군, 누란(KRORAİNA, 樓蘭), 로프노르(LOP-NOR, 羅布泊) 등 지역에서 수집한 일부 자료는 오늘날 서울의 국립중앙박물관 중앙아시아실에 전시되어 있다. 

소비예트백과사전, 오늘 날에는 일부 내용을 전자로 볼 수 있다. // 출처: 얀덱스 YANDEX
소비예트백과사전, 오늘 날에는 일부 내용을 전자로 볼 수 있다. // 출처: 얀덱스 YANDEX

 

카잔제국대학의 투르크학

카잔연방대학교의 전신인 카잔제국대학(Императорский Казанский университет)은 1828년과 1829년에 아랍어와 페르시아어, 터키어와 타타르어 독립학과가 설립되었고, 이후 언어 지역 민족학 중심으로 발전한다. 1826년에 카잔제국대학교에서 터키어와 타타르어를 연구 및 지도했던 미라즈 무하메트 알리 카젬벡 (Мухаммед Али Мирза - Казем-бек Александр Касимович / 1802-1870)이 초기 학과장으로 활동했다. 무하메트 알리 카젬벡 교수가 상트페테르부르크제국대학(Императорский Санкт-Петербургский университет, 現상트페테르부르크국립대학교) 동방학부로 전임된 후 잠시 학문적 연구가 침체되었으나 1893년, 투르크학 大학자인 니콜라이 표도로비치 카다로프 (Николай Фёдорович Катанов, 1862-1922)가 부임하여 동방학 중심의 카잔 투르크학을 꽃피운다.  

                                            니콜라이 표도로비치 카다로프 // 출처: 구글
                                            니콜라이 표도로비치 카다로프 // 출처: 구글
           미라즈 무하메트 알리 카젬벡 // 출처: 상트페테르부르크국립대학교
           미라즈 무하메트 알리 카젬벡 // 출처: 상트페테르부르크국립대학교

 


 

소비예트시기 투르크학 박해


1944년 8월 9일, 소련중앙위원회에서는 투르크학의 역사 민족 중심 연구를 금지하는 내용의 당내 규정을 발표했다. 절대적인 소비예트 규정으로 발표 후 투르크학을 연구하는 연구원, 지식인들이 투옥되고 실종, 일부는 이스탄불로 망명하는 등 학문발전에 침체기를 겪는다. 대부분 문서화된 출판물이 근거가 되어 학문적 탄압을 받았는데, 1930-1940년대 스탈린시기에 집중되었다.

물론 대다수가 1956년 이후 공식적으로 직위가 복권된다. 학문 박해 당시 Turk(투르크)란 단어 사용이 금지되었기에 이를 대처할만한 민족, 타타르민족, 타타르인, 알타이 민족, 알타이인’ 등 다양한 방향으로 투르크라는 단어가 다채롭게 사용되어 과학 연구 저널과 출판물이 일부 발간되기도 했다.

이스탄불대학교 (소비예트시기 투르크학 탄압 당시 일부 학자들은 이스탄불로 망명했다) // 출처: 강경민 촬영
이스탄불대학교 (소비예트시기 투르크학 탄압 당시 일부 학자들은 이스탄불로 망명했다) // 출처: 강경민 촬영

 


 

소비예트 시기의 투르크학 ‘타타르-카잔학파’

 

수많은 러시아 및 CIS 지역내 투르크학자 중에서도 1900년대 초반~중반 소비예트 시기에 활동했던 투르크학의 타타르-카잔학파 학자를 간략하게 소개한다. 단, 탄압을 피해 이스탄불 등 튀르키예(터키)로  방명한 투르크학자는 제외했다. (ㄱ, ㄴ, ㄷ 순으로 작성함)

 

니그마툴라 기니야툴로비치 하키모프 (Нигматулла Гиниятуллович Хакимов, 1889 – 1938)

타타르-바쉬키르 언어 교육자이며 언어학자이다. 1938년 사망하기 전까지 레닌그라드(現상트페테르부르크국립대학교)와 카잔대학에서 타타르어 문법 및 언어학적인 기초 분석 연구를 했다. 7권이 넘는 전문 연구지를 출판했다. 1937년 (또는 1938년) 실종됬다.

라힘 알리 가브드라히모프 무하메츠하키로비치 (Габдрахимов Гали Мухамметшакирович, 1892 – 1943)

타타르계 작가, 문학평론가, 언어학자이다. 카잔과 모스크바에서 공부했던 그는 1917년부터 타타르문학, 타타르 민속사 등을 연구 및 가르쳤고 여러 권의 저서를 남겼다. 1931년, 1934년, 1938년, 1940년 여러 차례 탄압 및 노역교화형을 선고받았다. 사후 복권된다.

만수로프 가심 가티예비치 (Мансуров Гасим Гатиевич, 1894 – 1955)

타타르 역사 학자이며 언론인으로 모스크바와 카잔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1929년 12월 체포, 사형과 재산몰수형 대신 노역교화형 10년형을 선고받았다. 기적적으로 생존했으며 1990년 5월에 복권되었다. 

미르사이드 술탄 가리예프 (Мирсәет Хәйдәргали улы Солтангалиев, 1892 – 1940)

민족학자이자 이슬람 전통주의를 주장했던 사회운동가이다. 특히 마르크스주의에 이슬람의 조화를 강조하며 소비예트내 무슬림사회가 억압받고 있다고 주장했다. 1940년 모스크바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  

미하일 게오르기예비치 쿠디야코프 (Михаил Георгиевич Худяков, 1894 – 1936)

카잔 고고학, 볼가 지역 민족사와 문화 연구가이다. 특히 타타르민족언어사, 카잔고고학을 집중적으로 연구했다. 타타르인민박물관과 카잔대학에서 근무했으며 1929년부터는 레닌그라드에서 연구했다. 1936년, 반혁명적 트로츠키주의-지노비예프 테러 조직에 가담’을 이유로 체포, 사형 선고를 받았다. 1957년 복권되었다.

베키르 바이포비치 초반자데 (Чобан-заде Бекир Вагап оглы. 1893 – 1937)

크림타타르계 시인이자 투르크언어학자이다. 크림반도와 이스탄불에서 학업을 마친 후 크림반도 돌아와 투르크-타타르문헌학 연구를 진행했다. 이후 아제르바이잔 바쿠, 부하라, 타슈켄트 지역 등에서 활동, 아제르바이잔국립대학 학장으로 연구를 지속하며 크림타타르어 방언, 타타르어-터키어 방언 연구, 타타르-투르크 언어학 개론, 문법 연구 등의 업적을 남겼으나 1937년 사형 선고를 받고 처형되었다.

보리스 알렉산드로비치 라티인 (Латынина Борис Александрович, 1899 – 1967)

고고학자며 역사과학학자이다. 코카서스, 중앙아시아, 볼가지역 중심의 중앙유라시아 지역 연구를 중심으로 활동했으나 1935년부터 탄압받기 시작, 일부 기간 수용소에서 지냈다. 1953년부터 사망 전까지 원시문화사에 대한 연구 및 과학논문을 저술했다. 

세르게이 이바노비치 루덴코 (Сергей Иванович Руденко, 1885 – 1969)

스키타이, 알타이지역을 연구한 인류학자 겸 고고학자다. 레닌그라드대학(現상트페테르부르크국립대학교)에서 강의하며 알타이산맥 쿠르간 지역을 연구, 기원전 3-4세기에 만들어진 스키타이 매장 유적와 미라를 다수 발굴했다. 1931년 체포, 1934년부터 강제 노역을 했다.

아가판겔 에피모비치 크림스키이 (Агафангел Ефимович Крымский, 1871 – 1942)

우르크라이나-크림 타타르켸 출신의 타타르-투르크학자다. 민속학, 문학, 쌍방언어학을 연구했으며 특히 러시아내 투르크민족, 카잔 타타르, 크림 타타르에 관한 많은 저술을 남겼다. 투르크학 탄압 당시 투옥되어 1941년 옥사했다.

아산 사브리 아이바조프 (Асан Сабри Айвазов, 1878 – 1938)

크림타타르계 작가, 문학평론가, 교육자이다. 십대 기간을 이스탄불에서 보냈고, 이후 크림지역으로 돌아와서 학자, 언론인, 문학평론가로 활동했다. 진보적 성향이 언어 교육소를 만들어 무슬림 여성에게도 크림 타타르어를 교육하기도 했다. 1937년 체포되었으나 1938년 석방되었다.

아이불라 압둘레시도비치 오다바쉬 (Одабаш Абибулла Абдурешид, 1891 – 1937)

크림타타르 작가, 문헌학자, 교육자이다. 크림반도와 이스탄불에서 학업을 마친 후 1921년부터 1928년까지 크림국립대학(現타우리다국립대학교)에서 크림타타르 언어 문학을 지도 및 교과서를 출판했다. 1925년부터는 교육학, 문화, 문학 중심의 잡지를 출판했다. 1928년 체포, 10년 노역형을 선고받다. 1937년 사망했다. 

알렉세이 빅토로비치 슈미트 (Алексей Викторович Шмидт, 1894 - 1935)

볼가강 유역의 카마 고고학의 창시자이자 우랄 고고학를 연구했던 투르크학다. 우랄 민족의 고대 예술과 종교 기원을 연구, 고고학 문화 분류 방법론을 만들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제국대학 동방학과 소속으로 활동하던 1933년 체포, 1935년 상트페테르부르크(레닌그라드)에서 수사 중 사망했다.

오스만 누리 아산노비치 (Осман Нури-Асанович, 1879 – 1938)

크림비역에서 활동한 크림타타르계 언론인, 작가, 역사 고고학자, 동방학자, 언어학자이다. 어릴 적 이스탄불에서 공부했고, 이후 상트페테르부르크 동방학부에서 재직했다. 크림타타르어 고전 작품을 러시아어로 번역 출판뿐만 아니라 크림 타타르어 신문을 발간하는 등 민족 언어를 보급하는데 기여했다. 1926년 바쿠에서 열린 제1차 전연합투르크회의에 참가하기도 했으나 1937년 ‘민족주의 반혁명조직에 가담’과 ‘범투르크주의’혐의로 체포되었다.

자비로프 압두라크만 (Забиров Абдурахман, 1895 – 1938)

타타르인 과학자이자 상트페테르부르크제국대학 동방학과 전임교수였으나 1937년 총살되었다.

체르니셰프 예브게니 이바노비치 (Чернышев Евгений Иванович, 1894 - 미상)

카잔제국대학교에서 활동 및 교수로 재직했던 타타르 역사학자다. 16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볼가 및 우랄 지역내 타타르민족의 역사 문화에 심도 깊은 연구 및 지필을 했다. 1936년 체포 후 행방불명 됐다.

쿠다야로프 가랴우틴 가이눌티노비치 (Кудояров Галяутдин Гайнутдинович, 1891 – 1966)                                  

우파 지역 중심으로 활동한 투르크민족학자 겸 교육자이다. 1917년 우파 지역내 무슬림 학생 위원회를 조직했고, 1924년부터는 타타르소비예트의 경제위원, 교육인민위원 등을 역임했다. 1920년 역사 출판물 저자 겸 번역활동에 참여했으나 1932년 체포되었다. 1956년 복권된다.

파벨 세르게예비치 리코프 (Павел Сергеевич Рыков, 1884 – 1942)

소비예트국립아카데미 소속의 고고학자로 볼가 지역을 집중적으로 연구했다. 사라토프대학교를 중심으로 활동, 칼미키야국립박물관을 1931년 설립했으나 사라포트에서 1937년 체포, 사망했다. 1956년 복권되었다.

파티흐 사이피 카잔르 (Фатих Сайфи-Казанлы, 1888 – 1937)

투르크역사학자이며 강사, 작가, 언론인이다. 1931년부터 1933년까지 타타르사회주의대학(現카잔연방대학교)에서 타타르사회사상사를 집중적으로 강의하였고, 이를 사유로 추후 해고당했다. 1936년 ‘반혁명적 트로츠키주의-민족주의 영토조직’에 가담하고 ‘문화 전선에서 활동 파괴’ 협의로 체포, 1937년 카잔에서 총살당했다. 1958년 무죄 입증으로 복권된다.

카잔연방대학교. // 출처: 강경민 촬영
카잔연방대학교. // 출처: 강경민 촬영

 


 

과거의 기록, 현재와 미래

20세기 중반이 되면 투르크학의 타타르-카잔학파는 카잔대학(現카잔연방대학)을 중심으로 카잔 동방학 부흥을 위해 변화한다. 1989년에는 타타르어-문헌학부를 기반으로 역사, 동양학이 신설되었고, 투르크 문헌학자인 딜랴라 가리포브나 투마쉐바(Тумашева Диляра Гарифовна, 1926 – 2006)가 초대 학장으로 취임한다.  2002년에는 투르크어 단독 연구학과가 개설되었고, 2011년에는 투르크문헌학과로 명칭이 변경, 학문연구의 폭이 확대되었다. 특히 러시아 및 유라시아지역내 다양한 투르크 민족언어, 오스만어와 터키어, 몽골어와 투르크 민족사 교육 및 연구를 확대시켜 나가는 중이다. 

과거는 현재와 미래를 존재하게 만드는 근거다. 과거가 존재하기에 현재가 될 수 있는 것이고, 지금의 현재는 미래를 만들어낼 것이다. 과거의 '그들'이 존재했기 때문에 지금의 '학문적 발전을 위한 세대'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러시아연방에 속해있으나 자신들만의 과거를 바탕으로 대학, 연구소를 통해 민족적 뿌리인 투르크학 발전을 위해 나가는 타타르 민족에게 존경을 표한다.   

타타르스탄 카잔 전경 // 출처: 강경민
타타르스탄 카잔 전경 // 출처: 강경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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