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론 복고적(復古的)이라는 낭만적인 단어를 머리에 떠올려 본다. 역사는 거대한 수레바퀴를 굴리며 마냥 나아가기만 하는데 사람의 낭만적인 경향은 문득 뒤를 돌아보게 하는 여유를 가져다주곤 한다.

언젠가 '실크로드'를 TV에서 보았을 때 '돈황'이니 '미란' 그리고 '누란' 등의 나라에서 발견된 벽화를 보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느꼈던 적이 있다. 그것은 현재의 척박한 삶과 맞바꾸어도 좋을 만큼 정겨운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가 고고학자들이 발굴한 옛적의 유물을 바라보며 잠시 과거에 대한 추상에 잠기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가구(家具)는 묵을수록 유기물화하고 인간은 묵을수록 무기물화한다는 말이 있다. 목재(木材)에 손때가 묻고 거기에 시간이란 매개물이 개입되면 유기물 즉, 가구 이상의 새로운 가치를 지니게 되지만 인간은 나이를 먹을수록 어린아이처럼 사고력도 줄게 되고 인간으로서의 능력이 퇴화된다는 말이다.

이렇듯 모든 사물에게 있어서 세월의 흐름이란 소중한 것이다.

과거의 옛 유물이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그것이 값비싼 금붙이로 만들어진 것이라서가 아니라 유물 그 자체가 소중한 역사를 지녔으며 그 역사는 인간에게 낭만적 상상력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일 것이다.

선인(先人)들의 유품에서 묻어 나는 그 동경과 신비의 조각(彫刻)들은, 오늘날 첨단 과학 시대에 사는 우리에게 커다란 공간을 만들어 주고 그 속에서 치열한 경쟁도 없이 그저 자유롭게 살고, 사랑하며, 노래할 수 있도록 해준다고 믿게 하는 실체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오래전 낯선 이방(異邦)의 선율을 대할 때마다 쉽사리 흥감(興感)을 일으키곤 하는 것이리라.

아랑후에즈 궁전 전경(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지정) 
아랑후에즈 궁전 전경(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지정) 

스페인 '마드리드' 외각에 위치한 '그라나다'라는 도시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알함브라(Alhambra)' 궁전과 '아랑후에즈(Aranjuez)' 궁전이 자리잡고 있다. 참으로 볼수록 아릅다운 문화경관이다.

이 아랑후에즈 궁전은 1554년~1598년까지 44년간 왕으로 군림했던 '필립 2세'에 의해 건축되기 시작하여 '페르디난드 6세(1746년~1759년)'에 이르러 완성된 건축물로서 건물 자체도 웅장하고 아름답지만 고원의 아름다운 자연에 둘러싸여 있는 스페인 굴지(屈指)의 유명한 정원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래서 2001년에는 유네스코에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아랑후에즈 궁전이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것은 궁전의 아름다움보다는 스페인이 자랑하는 작곡가 '호아킨 로드리고(Joaquín Rodrigo, 1901~1999)‘의 [아랑후에즈 협주곡’Concierto de Aranjuez’] 때문일 것이다.

호아킨 로드리고 (Joaquín Rodrigo)
호아킨 로드리고 (Joaquín Rodrigo)

스페인에는 옛날 '무어(Moor)인'들이 남긴 유적이 많이 있는데 이 무어인은 중세 이베리아 반도에 거주하던 무슬림(Muslim, 이슬람교도)을 가리키는 말이다.

세계사에서 보면 유럽 국가들은 무슬림의 침입을 많이 당했는데 십자군 전쟁은 그들을 격퇴하기 위해 일어난 성전(聖戰)이었다. 그중 스페인만 유독 그들의 손아귀에 넘어간 때가 있었기 때문에 지금도 그들의 유적이 많이 남아 있는 것이다.

이제는 비바람과 햇볕에 풍화된 성터의 쓸쓸함과 외래 민족의 이미지가 가져다주는 이국정서, 그리고 스페인의 열정과 민속 선율이 함께 녹아있는 추억의 선율이 바로 이 로드리고의 ‘아랑후에즈 협주곡’일 것이다.

어쩌면 이 곡은 그 아득한 옛날 이슬람교도인 '무어인'들이 아랑후에즈 궁전을 만들 때부터 애잔하게 흘러내려온 전설을 담은 선율처럼 느껴진다.

불행히도 세살 때 '디프테리아'로 인해 시력을 잃어버린 로드리고는 파리에서 음악 공부를 하며 그곳에서 인생의 중요한 두 사람을 만나게 된다.

한 사람은 스페인의 위대한 작곡가인 '마누엘 드 파야(Manuel de Falla)‘이고 또 한 사람은 후에 아내가 된 터키 출신 피아니스트 '빅토리아 카미(Victoria Kamhi)’이다.
  

아내 ‘카미’와 ‘로드리고’의 신혼시절 모습
아내 ‘카미’와 ‘로드리고’의 신혼시절 모습

그런데 결혼 후 1939년에는 첫 아이를 부득이 유산 시키면서 아내가 사경을 헤매는 가슴 아픈 시간들을 보내야 했다. 바로 이때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인 ‘아랑후에즈 협주곡’을 작곡했는데 제2악장 ‘아다지오(Adagio)’는 당시 그 아픔과, 아내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고스란히 쏟아부은 곡이라고 한다.

이 작품은 스페인 내전을 피해 파리에 머무는 동안 작곡하기 시작하여 마드리드에서 완성, 당시 최고의 기타리스트인 ‘산츠(Regino Sainz)’에게 헌정했다. 

이렇게 해서 태어난 세기의 명곡 ‘아랑후에즈 협주곡’은 혼 파이프와 기타의 조화가 환상적이라고 할 만큼 빼어난 곡으로, 역사상 가장 많은 편곡과 가장 많이 연주된 작품으로 기록되고 있다.

특히 제2악장(아다지오)은 샹송, 팝, 경음악뿐 아니라 기타, 트럼펫, 바이올린, 첼로 등 다양한 악기의 독주곡과 '사랑의 아랑후에즈'라는 제목으로 가사를 붙여 테너 '호세 카레라스' 나 '플라시도 도밍고',  '안드레아 보첼리' 등 세계적인 성악가와 여러 유명 대중음악 가수의 독창곡으로도 편곡되어 불려지고 있는데 세계 음반 시장에 나와 있는 버전(Version)만 해도 50가지가 넘을 정도이다. 특히 안드레아 보첼리의 노래는 작곡자 '로드리고'와 같은 시각 장애자 라는 점에서 또 다른 감흥을 느낄 수 있다.

1997년 아내 빅토리아 카미가 먼저 세상을 떠난 뒤 2년 후인 1999년 호아킨 로드리고도 아내의 뒤를 따라 세상을 떠나 두 사람은 아랑후에즈 묘지에 함께 뭍혔다.

호아킨 로드리고가 남긴 아랑후에즈 협주곡은 모두 3악장으로 되어있다.

제1악장 : Allegro con Spirito(빠르고 활기차게)
제2악장 : Adagio(매우 느리게)
제3악장 : Allegro Gentile(빠르고 상냥하게)

오늘은 이 중에서 제2악장 아다지오(Adagio)만 듣고자 한다. 제2악장의 느리고 슬픈 선율을 앞뒤에서 1, 3악장의 빠른 패시지(Passage)가 감싸고 있는듯한 느낌을 준다.

우리에게 이 제2악장은 과거 1980년부터 2007년까지 매주 토요일 밤에 TV로 방영되었던 ‘토요명화’의 오프닝 시그널로 널리 알려진 추억의 음악이기도 하다. 

이 음악을 스페인의 기타연주자로 '안드레스 세고비아' 의 뒤를 잇는 현대 클래식 기타의 거장 나르시소 예페스(Narciso Yepes)의 협연 실황으로 감상하고자 한다.

이 연주자가 연주하는 악기는 조금 독특하다. 본인이 직접 개량한 것인데 보통 기타는 6현으로 되어있으나 저음부에 4현을 추가하여 10현으로 된 클래식 기타를 사용하고 있다. 아마도 배음의 효과를 높이기 위한 것으로 여겨진다.

Joaquín Rodrigo/ [Concierto de Aranjuez] Ⅱ Adagio / Narciso Yepes, Guitar/ Rafael Frübeck de Burgos, Cond./ Frankfurt Radio Sinfonie Orchestra

[아랑후에즈 협주곡]

'호아킨 로드리고'가 80여 년 전 남긴 음악의 유물이 어찌 이다지도 향기로울 수가 있을까? 지금 감상한 제2악장은 마치 구슬피 우는듯한 느낌을 전해주고 있다.

필자는 이 제2악장이 주는 쓸쓸함과 외로움과 슬픔의 향기에 마음껏 취하고 싶어서 전 악장 듣기를 많이 망설이다 결국 1악장, 3악장은 포기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잉글리쉬 혼(English Horn)의 애수 띤 향수에 젖은 테마를 들으며 아랑후에즈 협주곡 제 2악장은 역시 가을의 음악 임을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특히 스페인 작곡가의 작품을 스페인의 거장 '나르시소 예페스'의 연주로 들으니 이 가을이 더욱 그윽하게 느껴진다.

 

강인

 

예술비평가
사단법인 카프코리아 대표 
국민의힘 국가정책 자문위원(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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