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OECD 회원국 여성 자살률 1위…이 가을 '페시미즘'의 치유를 기원하며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그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서진다.....“

가을이면 생각나는 박인환 시인의 시 [목마와 숙녀]의 첫 구절이다.

가을이 돌아왔다.

어느덧 가을의 시작을 알리는 입추(立秋)를 지나 처서(處暑)를 맞은 지도 달포에 가깝고, 가을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는 백로(白露)가 지난 지도 한 주간이나 된 오늘, 온 세상에 서정적 추심(秋心)이 가득하다.

밤이면 귀뚜라미 우는 소리가 들린다. 슬픈 귀뚜라미, 외로운 귀뚜라미, 헐벗은 귀뚜라미, 병든 귀뚜라미..... 이 녀석들은 지난가을 이후 무얼 하고, 무얼 먹고 살았는지 궁금하다. 그동안 어디서 죽은 듯이 엎드려 지내다가 이 땅에 온통 풍요로움을 구가(謳歌)하는 축제가 벌어지는 이 가을밤, 슬그머니 내 곁에 와서 이다지도 구슬프게 울고 있는지..... 내가 무엇으로 이들의 울음을 멈춰 줄 수 있을까.

밤에만 우는 귀뚜라미가 정겹다. 밤에만 운다고 표현하는 우리네 정감이 적이 촉촉하다.

가을이 정녕 깊어지고 있나 보다.

가을이면 낙엽처럼 떨어져 뒹구는 여인들의 가냘픈 페시미즘 (Pessimism)을 줍고 싶다. 그리고는 향기로운 손수건으로 거두어 옷장 속에 한 계절 넣어 두어야겠다. 사랑이 그리울 때 가끔 옷장을 열어볼 수 있도록 잠궈 두지도 않으려 한다.

라흐마니노프(Sergei Rachmaninov)
라흐마니노프(Sergei Rachmaninov)

오늘은 ‘라흐마니노프(Sergei Rachmaninov)’의 [보칼리제‘Vocalise’]를 소개하고자 한다

라흐마니노프는 러시아 혁명으로 인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미국 망명길에 오르기 2년 전인 1915년(42세) 때 13곡의 가곡을 작곡했다. 그중에서 마지막 곡은 가사가 없는 '허밍(Humming)‘곡으로 작곡했는데 이 곡이 바로 ’보칼리제‘이다.

보칼리제란 '가사가 없는 노래' 즉, ’무언가(無言歌)‘를 말한다. 이 보칼리제는 라흐마니노프 외에 라벨, 포레, 레스피기 등의 작곡가들도 남겼지만 그 중에서도 라흐마니노프의 보칼리제가 가장 유명하다.

보칼리제는 원래 소프라노와 피아노를 위한 곡으로 작곡 되었지만 그 선율이 워낙 아름답다 보니 성악 외에도 첼로, 바이올린, 피아노, 플륫, 관현악, 심지어는 신디사이저로까지 편곡, 연주되는 명곡이다.

지금까지 녹음된 음반 중에 소프라노 ‘안나 모포(Anna Moffo)’가 ‘유진 오먼디(Eugene Ormandy)’의 지휘로 내놓은 음반이 가장 유명하지만, 소프라노 ‘키리 테 카나와(Kiri Te Kanawa)’가 부른 음반도 이에 못지않다. 

세계 정상의 소프라노 키리 테 카나와는 참으로 재능이 뛰어난 가수이다. 모차르트의 연주회용 아리아에서부터 오페라 아리아, 독일 리트, 프랑스의 샹송, 이탈리아 칸초네에 이르기까지 모두 능란하게 소화해내는 금세기 최고의 소프라노이다.

그의 아버지는 뉴질랜드 원주민인 '마오리((Maori) 부족'의 전사이고, 어머니는 영국인이다. 그러고 보면 그녀는 어쩌면 원시와 문명이 만나 잉태한 운명적 생명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의미에서 이 여인의 뜨거운 피는 저 시원(始原)의 신선한 약동감을 그의 예술에서 느끼게 한다. 그저 79세라는 세월의 흐름이 아쉬울 뿐이다.

지난 2007년 3월 이순(耳順)이 넘는 나이로 내한,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에서 공연을 갖기도 했는데 그의 나이를 감안하면 아무래도 마지막 내한 공연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그때 앙콜 곡으로 뉴질랜드 ‘마오리(Māori)족’의 민요 ‘포카레카레 아나(Pōkarekare ana)’를 불러 관객을 즐겁게 했는데, 이 곡은 지난 1972년 혼성 듀엣 ‘버블 검(Bubble Gum, 이규대-조연구)’이 '연가(비바람이 치는 바다 잔잔해져 오면...)’로 번안해 불러 우리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 마오리족은 과거 6.25 전쟁 발발 당시 참전하여 우리나라를 도와준 고마운 민족이기도 하다. 그때 그들은 창과 활을 들고 와서 싸웠다고 한다. 앞서 ‘연가’도 그 당시 참전 용사들에 의해 전해진 노래이다.

키리 테 카나와는 1981년 영국 '찰스 황태자'와 '다이애나 비'의 결혼식에서 헨델의 [빛나는 세라핌(‘Seraphim’ 천사)]"을 불러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시키므로 1982년 영국 왕실로부터 대영제국 훈장과 함께 '데임(Dame)‘이라는 작위를 받았다.

‘가을의 노래’ - 라흐마니노프의 [보칼리제]

오늘은 소프라노 키리 테 카나와의 음성으로 들어보고자 한다.

Sergei Rachmaninov [Vocalise Op.34, No14] / Kiri Te Kanawa, Soprano Stephen Barlow, cond./ Royal Opera House Orchestra

이 곡은 라흐마니노프의 짙은 로맨티시즘이 낳은 러시아의 '마지막 사랑의 노래'이다.

키리 테 카나와의 목소리에 담아낸 가슴 시리도록 아름다운 사랑의 노래가 안나 모포의 흐느끼는 듯한 서글픔을 넘어 마오리 전사의 딸답게, 처절함 속에 희망을 발(發)하는 절규(絶叫)로 다가와, 듣는 이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 듯하다.

현재 OECD 회원국 가운데 여성 자살률 1위인 대한민국에, 이 아름다운 사랑과 희망의 선율을 통해 [가을의 페시미즘]이 치유되기를 기도한다.

 

강인

 

예술비평가
사단법인 카프코리아 대표 
국민의힘 국가정책 자문위원(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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