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송이처럼 너에게 가고 싶다/ 머뭇거리지 말고/ 서성대지 말고/ 숨기지 말고/ 그냥 네 하얀 생애 속에 뛰어들어/ 따스한 겨울이 되고 싶다/ 천년 백설이 되고 싶다”

문정희 시인의 [겨울 사랑]이라는 시입니다.

문정희 시인 (1947. 5. 25~) 현, 국립한국문학관 관장.  1969년 ‘월간문학 신인상으로 등단, 현대문학상(1976), 소월시문학상(1996), 등 다수 수상.
문정희 시인 (1947. 5. 25~) 현, 국립한국문학관 관장. 1969년 ‘월간문학 신인상으로 등단, 현대문학상(1976), 소월시문학상(1996), 등 다수 수상.

곧 입동(立冬)입니다. 24절기 중 19번째 절기인 입동은 태양의 황경(黃經)이 225도로 기울 때이며 양력으로 올해는 11월 8일입니다.

추분(秋分)과 동지(冬至) 중간에 위치한 입동은 겨울의 시작입니다. 이제부터 내년 2월 4일 입춘(立春)까지 길고 긴 겨울입니다. 입동 후 열흘 안에 매서운 '뒤바람(북풍,北風)‘이 불어옵니다. 일본에서는 이 바람을 '고가라시'(木枯し, 입동바람)라고 합니다.

겨울이 오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의 말문을 막아놓고 그들의 침묵 사이로 겨울이 오고 있습니다.

지난날의 그 겨울은 이미 사람들의 기억 속에 희미해져 버렸지만, 발랄라이카의 흔들리는 음색을 타고 휘감아 돌던 '닥터 지바고'의 그 찬연한 겨울빛과 그들의 사랑은 우리들 겨울 이야기의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겨울은 죽음보다도 평화로운 계절입니다. 저 잔인한 4월의 약동을 꿈꿀 겨를도 없이 그저 육중한 무게만을 지탱하고 가라앉은 겨울은 차라리 인고(忍苦)를 견디고 있는 수도자의 형색입니다.

사랑을 합시다. 다가오는 겨울이 아름다울 수 있도록 스산한 늦가을의 옷자락을 붙잡고 한세상 늘어지게 사랑을 합시다.

눈물이 얼어붙어 얼음 조각으로 부서지지 않도록 가슴을 데워 놓읍시다. 억만 번 고쳐 생각해도 대안이 없는 우리들의 세월이지만 [올겨울 또 한 번의 사랑을 위하여] 준비합시다. 뜨겁게 끓어오르는 사랑만이 빙점(氷點)을 녹일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에.....

클라라 슈만(Clara Schumann)과 작곡가 브람스(Johannes Brahms)
클라라 슈만(Clara Schumann)과 작곡가 브람스(Johannes Brahms)

오늘은 ’브람스‘의 <첼로 소나타 제1번>을 소개하려 합니다.

브람스는 내성적(內省的)인 사람입니다. 그는 그 내성을 통해 자신의 음악 세계를 구축해 나갔으며, 삶의 자세 역시 매우 소극적인 모습으로 나타나곤 했습니다.

음악에 있어서 주제의 표현기법에도 그의 내성적인 성격이 잘 반영되어 있는데, 예컨대 '현악 4중주'나 '클라리넷 5중주' 그리고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등의 작품에서 각 악기마다 다투어가며 서로 주제를 표현하려고 하는 ‘슈베르트’와는 정반대로 브람스는 서로 주제 선율을 떠맡지 않으려고 몸을 사리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러한 겸양과 회피의 지속이 묘한 앙상블이 되어 아름다운 하모니를 이루고 있습니다.

또한 ’클라라‘와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스승인 ’슈만‘의 아내 '클라라'에게 연정을 품고 있었지만 그것을 쉽사리 표현하지 못했습니다. 더욱이 슈만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우정 이상의 관계로 발전시키지 않고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사랑하는 클라라의 곁을 지켰습니다.

문호 ’톨스토이(Lev Nikolayevich Tolstoy)‘가 말하기를 "사람은 사랑으로 살아간다"고 했고, 서두에 소개한 문정희 시인은 ”이 세상 모든 사랑은 무죄이다“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사랑으로 살아간다"라는 대전제 하에서 ”이 세상 모든 사랑은 무죄이다“라고 한 문정희 시인의 사랑에 대한 변론(辯論)은 브람스가 품은 지고지순(至高至純)한 사랑의 방식과는 대조(對照)를 이루지만, 이 또한 승화된 낭만의 법정에서 승소(勝訴)한 아름다운 사랑의 쾌거가 분명합니다.

인간의 가장 중심적인 주제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의 대상이 누구든, 방식이 어떻든 사랑은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그 사랑의 능력이 ’단테‘로 하여금 <신곡>을 지어내게 했고, ’모딜리아니‘의 <목이 긴 여자>를 그려냈으며 ’브람스‘로 하여금 전 인류를 감동시키는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어내게 했습니다.

14년 연상의 여인이었던 클라라를 깊히 사랑하면서도 끝내 순수한 사랑을 지켰던 브람스.

"그녀와의 만남은 나에게 가장 커다란 풍요와 가장 고귀한 만족을 가져다준 생애 최고의 아름다운 경험이었다"라고 말한 브람스는 클라라가 숨을 거두자 삶의 의욕을 잃고 11개월 후 클라라를 따라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이토록 사랑이 깊어지면 종교가 되나 봅니다. 그래서 그의 만년의 종교곡들에서는 그  깊이가 말할 수 없이 오묘함을 느끼게 해줍니다.

브람스의 <첼로 소나타>는 제1번 작품번호 38과,  제2번 작품번호 99, 두 곡밖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중 제1번은 브람스 특유의 우수에 찬 서정성이 넘치던 젊은 시절의 작품이고, 제2번은 원숙한 만년의 작품입니다. 특히 제1번은 평생 안으로 사랑의 감정을 삭이며 외롭게 살아오다 결국 쓸쓸하게 끝을 맺은 브람스의 인생을 그린 듯한, 명실공히 낭만파 시대 첼로 소나타의 대표적 걸작입니다.

이 곡은 모두 3악장의 단조로 되어있는데 제1악장의 무겁고 우수에 가득 찬 느낌과 제2악장의 어둡고 구슬픈 미뉴엣(Minuet)의 서정성에 이어 마지막 3악장에서도 밝은 기분은 나타나지 않고 종내 쓸쓸하게 끝을 맺습니다.

첼로가 피아노보다 언제나 낮은 위치에서 깊숙한 소리를 내는 이 곡은 전체적으로 북독일의 겨울 풍경 같은 황량함을 느끼게 해주고 있습니다.

요하네스 브람스의 <첼로 소나타 제1번  E단조, 작품번호 38> 중 제1악장만 들으시겠습니다. ’단일 샤프란(Daniil Shafran)‘의 첼로와 ’펠릭스 고틀리브(Felix Gottlieb)‘의 피아노 연주입니다. 

보통 샤프란의 연주는 ’로스트로포비치‘의 연주와 자주 비교되곤 합니다. 그런데 브람스의 첼로 작품 연주의 깊이를 얘기할 때는 세계적인 첼로의 대가인 로스트로포비치 보다는 샤프란의 연주에 압도적인 호의를 보입니다.

러시아의 전설적인 피아니스트 ’스비아토 슬라프 리히터‘는 "만약 당신이 로스트로포비치의 연주에 감동을 받았다면 샤프란의 연주를 들을 때까지 기다리시오"라고 했습니다.

샤프란의 브람스에 대한 깊이 있는 해석은 아무래도 샤프란과 브람스의 감성이 서로 상통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합니다.

J. Brahms, 'Sonata for Cello & Piano No.1 in E minor, Op.38' 1. 'Allegro non troppo' Daniil Shafran, Cello/ Felix Gottlieb, Piano

타오르는 가슴의 불길을 겨울의 육중한 무게와도 같은 내성(內省)으로 덮고 결국 '플라토닉(Platonic)’에 머물렀던 사랑. 이것이 브람스의 '사랑의 방식'이었습니다.

올겨울 나는 이런 사랑은 하지 않겠습니다. ”머뭇거리지 말고, 서성대지 말고, 숨기지 말고, 그냥 너의 하얀 생애 속에 뛰어들어“ 서로가 공감하는 용광로 같은 뜨거운 사랑으로 올겨울을 녹이고 싶습니다.

오늘따라 문정희 시인의 작품인 [겨울사랑]이  마음속에 깊은 공감을 불러 일으킵니다.

강인

 

예술비평가
사단법인 카프코리아 대표 
국민의힘 국가정책 자문위원(문화)

 

문화뉴스 / 강인 colin153@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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