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그리움 언저리를 산책하며
국화꽃 피는 언덕은 어디쯤인가
공허한 계절의 그늘 앞에 외로움처럼
가을보다 더 깊은 고독 속으로
나의 몸을 던지고 싶다
고독을 먹고 외로움을 삼키며
이렇게 아프고 슬픈 계절이 있는가
쓸쓸한 계절의 노을 앞에 그리움처럼
가을보다 더 아픈 가슴 속으로
고독의 빗장을 열고 싶다”
11월입니다.
깊어가는 가을의 차가운 입김이 서서히 번지는 요즈음, ‘법정(法頂)’의 추심(秋心)을 실감케 하는 때입니다.
".....밤 숲을 스쳐가는 소나기 소리를 잠결에 자주 듣는다/ 여름날에 못다 한 열정을 쏟는 모양이다/ 비에 씻긴 하늘이 저렇듯 높아졌다/ 이제는 두껍고 칙칙하기만 하던 여름철 구름이 아니다/ 묵은 병이 불쑥 도지려 한다/ 훌훌 털어버리고 나서고 싶은 충동이/ 어디에도 매인 데 없이/ 자유스러워지고 싶은 그 날개가 펴지려고 한다....."
가을은 내가 유난히도 좋아하는 계절입니다.
이렇게 가을이 좋아진 것은, 이맘때쯤이면 매년 도지는 [가을에 앓는 병]이 이제는 익숙해진 탓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올해도 겨울의 전령이 문 앞에 찾아와 불어대는 싸늘한 늦가을 입바람에 마음 한편이 시리도록 아프기 시작합니다. 또 지난해 앓았던 가을 열병(熱病)이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온 듯합니다.
이병은 오래 묵은 병입니다.
법정스님의 묵은 병은 "훨훨 털어버리고 나서고 싶은, 어디엔가 매인 데 없이 자유스러워지고 싶은 충동" 이지만, 나의 묵은 병은 지난여름의 뜨거운 열기를 견디며 숙성된 사랑의 끓어오름을 보듬어줄 '어느 그리움에 매이고 싶은 간절한 바람'입니다.
옛날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일곱 살 시절, 매년 찾아오던 감기를 혹독히 치르고 나면 엄마 손을 잡고 원효로 ‘용문시장’ 입구에 있는 허름한 중국집에 가서 꿀맛 같은 짜장면 한 그릇으로 죽을 만큼 고통스러웠던 날들을 송두리채 떨쳐버리던 기억이 있습니다. 마치 병치레의 보상이나 받은 듯이.....
그 엄마의 손길이 그리워 그 이듬해도, 또 그 이듬해도 죽을 만큼 고통스러웠던 병치레가 은근히 기다려졌는지 모릅니다.
고통스러운 가을, 내게는 미운 일곱 살 같은 계절
그러나 어쩌면 엄마의 손길 같은 어느 그리운 손길을 기다리며 이 고통스러운, 이 미운열병의 계절을 살아가고 있나 봅니다.
그리움이여!
이제 이 계절 끝자락에 이르면 ‘가을 열병’에 대한 보상이 있으려는지요? 그리운 그대의 손길을 기다려 봅니다.
오늘은 이탈리아 작곡가‘도니제티(Gaetano Donizetti)’의 오페라 [사랑의 묘약(L'elisir d'amore)] 중에서 <남몰래 흐르는 눈물(Una furtiva lagrima)>을 소개합니다.
전 2막으로 된 이 오페라 [사랑의 묘약]은 19세기 이탈리아 작곡가인 '벨리니', '롯시니'와 함께 벨칸토(아름답게 노래하는 가창법)오페라를 주도한 도니제티가 불과 2주 만에 완성한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입니다.
내용은 이탈리아의 작은 마을 농장주의 딸 '아디나(Adina)‘와 그녀를 사랑하는 순진한 젊은 농부 '네모리노(Nemorino)’의 사랑 이야기로서 아디나에 대한 짝사랑에 가슴앓이하는 네모리노가 돌팔이 의사인‘둘카마라(Dulcamara)’에게 엉터리 '사랑의 묘약'(싸구려 포도주)을 사서 마시고는 아디나의 사랑을 얻게 되는 코믹오페라(Comic Opera)입니다.
이 오페라 중에서 가장 사랑받는 아리아가 바로, 제2막에서 네모리노가 부르는 테너 아리아 '남몰래 흐르는 눈물' 입니다.
그러나 이 아리아는 제목이 주는느낌과, 실제로 '바순'의 서글픈 선율에 실려 나오는 노래의 애절함이그 전까지 진행된 희극적 들뜬 분위기를 갑자기 가라앉힙니다.
그래서 '사랑의 묘약'의 대본을 쓴 '펠리체 로마니(Felice Romani)’는 이 아리아를 뺄 것을 적극 권했으나 도니제티의 고집에 의해 그대로 불려지게 됐지만 걱정한 대로 초연 때 관객들은 이 아리아를 혹평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며 관객들은 차츰 이 소박하면서도 우아한 선율에 매료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남몰래 흐르는 눈물>을 듣기 위해 [사랑의 묘약]을 찾을 정도로 가장 인기있는 최고의 아리아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아디나는 네모리노가 자기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뒤늦게 깨닫고 남몰래 눈물을 흘립니다. 이때이를 지켜보던 네모리노가 그녀를 위해 이렇게 노래 부릅니다.
“남몰래 흐르는 눈물/ 그녀의 두 눈에 비치네/ 내 곁의 아가씨들/ 부러워하고 있네/ 더 이상 무었을 원하리오/ 진정 그녀는 날 사랑하고 있네
단 한 순간만이라도/ 두근거리는 그녀의 가슴을 느끼고 싶소/ 그녀와 나의 갈망 하나 되니/ 나 이제 죽어도 좋겠네/ 내 모든 소원 이루었네”
도니제티의 오페라 [사랑의 묘약] 중에서 <남몰래 흐르는 눈물>
테너 ‘롤란도 비야존 (Rolando Villazon)’의 노래로 들으시겠습니다.
2000년도까지의 세계적인 테너를 말하라면 ‘루치아노 파바로티’, ‘플라시도 도밍고’, ‘호세 카레라스’를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후 세대교체가 이루어져, 작고한 파바로티의 자리를 대신한 테너가 바로 롤란도 비야존입니다.
2005년 짤츠부르크에서 공연된 오페라 [사랑의 묘약]에서 주인공 네모리노로 출연하여 세계인의 주목을 받은 멕시코 출신의 테너 롤란도 비야존의 <남몰래 흐르는 눈물>이 명연주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도니제티의 오페라 [사랑의 묘약] 중에서 네모리노의 아리아 <남몰래 흐르는 눈물>.
테너 롤란도 비야존이 불러 드립니다.
소프라노 네트레브코(Anna Netrebko) 와 함께 출연하여 호평을 받았던 2005년 찰츠부르크 오페라 공연 실황으로 들으시겠습니다.
이 동영상은관객들의 환호에 의해 한 번 더 부르는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Gaetano Donizetti Opera [L'elisir d'amore], Una furtiva lagrima Tenor, Rolando Villazon.
<남몰래 흐르는 눈물>은 더 이상 슬픔의 눈물이 아닙니다. '사랑의 묘약'을 통해 간절히 원하던 아디나의 사랑을 얻게 된 네모리노가 흘리는 기쁨의 눈물입니다.
나도 이 가을 열병을 앓고 난 후 '사랑의 묘약'으로 그리운 이의 손길을 붙들고기쁨의 눈물을 흘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강인
예술비평가
사단법인 카프코리아 대표
국민의힘 국가정책 자문위원(문화)
문화뉴스 / 강인 colin153@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