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죽어가나보다/ 차마 다 감을 수 없는 눈/ 반만 뜬 채/ 이 저녁/ 누가 죽어 가는가 보다

살을 저미는 이 세상 외롬 속에서/ 물같이 흘러간 그 나날 속에서/ 오직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면서/  애 터지게 부르면서 살아온/ 그 누가 죽어 가는가 보다

풀과 나무 그리고 산과 언덕/ 온 누리 위에 스며 번진/ 가을의 저 슬픈 눈을 보아라

정녕코 오늘 저녁은/ 비길 수 없이 정한 목숨이 하나/ 어디로 물같이 흘러가 버리는가 보다”

김춘수 시인 <가을 저녁의 시>

아, 이 가을에 "누가 죽어 가는가 보다"라고 한 김춘수 시인의 시구(詩句)처럼 가을이 깊어가면 마음의 병도 깊어 어쩌면 이 덧없는 생명들이 조락(凋落)할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래서인지 이미 잎새를 떨구어버린 앙상한 가지에 매달린 백과(百果)의 형색이 어쩐지 처연해 보이기조차 합니다.

단풍이 화려하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어쩌면 시들어 가는 생명의 마감을 마지막 찬연한 빛깔로 불 싸지르는 소란한 함성처럼 들려 차라리 두 귀를 꼭 막고 싶어집니다.

늦가을을 지나 겨울의 초입에 들어섰지만 아직도 산과 계곡에는 몇 잎 남지 않은 단풍이 생명의 마감을 앞두고 붉은 빛깔로 타오르는 마지막 몸부림을 즐기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습니다. 참으로 잔인한 모습입니다.

만일 인간에게 조락되어가는 빛깔이 있다면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모여들어 잔치 분위기로 떠들어대며 즐길 수 있을까요? 빨갛게, 노랗게 물든 나뭇잎의 의미는 생명의 마지막이 다가왔음을 보여주는 것인데 무턱대고 환호를 질러대는 사람들이 그저 무심하게만 보입니다. 정말이지 이 가을엔 누군가 죽어가고 있을지도 모를텐데.....

오늘은 ‘자크 오펜바흐(Jacques Offenbach)’의 <재클린의 눈물 'Jacqueline's Tears'>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이 곡은 오펜바흐가 천재적 첼리스트 '재클린 뒤 프레(Jacqueline du Pre)‘의 죽음을 애도하며 헌정한 곡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 곡은 재클린 뒤 프레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세상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무명의 작품입니다.

첼리스트/재클린 뒤 프레
첼리스트/재클린 뒤 프레

자크 오펜바흐(1819~1880)와 재클린 뒤 프레(1945~1987)는 동시대 인물이 아닙니다. 오펜바흐는 재클린 뒤 프레보다 무려 126년 전에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러니 오펜바흐가 재클린 뒤 프레를 위해 곡을 썼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알려지기로는 '베르너 토마스 미푸네(Werner Thomas Mifune, 1951~)’라는 독일 첼리스트가, 재클린 뒤 프레가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인 1986년 우연히 오펜바흐의 미발표 악보 하나를 찾아내게 되었고 이 곡을 그가 흠모하던 재클린 뒤 프레의 죽음을 애도하며 <재클린의 눈물>이라는 표제를 붙여 세상에 알리게 된 것입니다.

비운의 첼리스트 재클린 뒤 프레를 기리는 음악, 바로 오펜바흐의 <재클린의 눈물>입니다. 참으로 가슴을 후벼 파는 듯 슬프도록 아름다운 곡입니다.

영국의 첼리스트 재클린 뒤프레는 여섯 살 때 이미 첼로의 신동이라는 소리를 들었으며 열일곱 살 때 '에드워드 엘가(Edward Elgar)‘의 <첼로협주곡>을 연주하므로 세상에 명성을 떨쳤습니다.

그로부터 십여 년간 열정적 연주 활동으로 그의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나 27세 되던 해 '다발성 경화증'이라는 희귀한 병으로 첼로를 켤 수 없다는 진단을 받고 일찍 은퇴하게 됩니다. 그 후 15년 세월을 가혹한 고통과 절망 속에서 병마와 싸우다 42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재클린 뒤 프레는 참으로 불행한 여인입니다. 그러나 그녀의 진정 불행한 삶의 모습은 질병으로 인한 고통이나 일찍 그 삶을 마감한 것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지극히 사랑했던 남편인 지휘자 '다니엘 바렌보임(Daniel Barenboim, 1942~)'의 배신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신혼시절 '재클린 뒤 프레'와 '바렌보임'
신혼시절 '재클린 뒤 프레'와 '바렌보임'

거슬러 올라가 재클린 뒤 프레는 그의 나이 21세 때인 1966년 크리스마스의 한 파티 장소에서 무명의 피아니스트인 다니엘 바렌보임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곧 깊은 사랑에 빠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가족과 주변 사람들의 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혼을 결심하기에 이릅니다. 

당시 영국 언론들은 "영국산(産) 장미와 이스라엘산(産) 선인장의 어울리지 않는 결합"이라고 우려의 보도를 내놓았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며 1967년 다니엘 바렌보임과 결혼을 하게 됩니다.

그 후 다니엘 바렌보임은 지휘자로 데뷔했고 초기의 경력을 쌓는데 있어서 이미 세계적 명성을 얻은 아내 재클린 뒤 프레의 결정적 도움을 받았습니다. 아니, 자신의 지휘자로서의 성공을 위해 아내를 협연자로 혹사시켰던 것입니다. 심지어 병으로 괘로운 증상을 호소했지만 자신의 출세를 위한 욕심에 오히려 짜증을 내며 더 혹독하게 아내를 몰아붙였습니다.

결국 재클린 뒤 프레는 결혼한 지 5년 후 '다발성 경화증'이라는 희귀병을 진단받고 27세에 은퇴, 투병 생활을 시작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남편 다니엘 바렌보임은 가출을 하고 맙니다.

손가락 마비 증세로 스스로 전화 다이얼도 돌리지 못해 연락이 오기만을 기다리는 아내를 홀로 남겨두고 다니엘 바렌보임은 러시아 출신 피아니스트 '엘레나 바시키로바(Elena Bashkirova)’와 동거생활을 시작했고 그들 사이에서 아들을 둘이나 낳았습니다. 그리고 병상의 아내에게는 그 사실을 숨긴 채계속 이혼을 요구했습니다.

아내 때문에 출세한 바렌보임. 그러나 그는 아내가 병으로 고통당하며 죽어갈 때 다른 여성과 함께 젊음을 만끽했습니다.

재클린 뒤 프레는 병으로 인한 육신의 고통보다 외로움과 싸우는 것이 더 힘들었습니다. 견딜 수 없는 육신의 고통이지만 얼굴을 일그러뜨리지 않고 잘 견디다가도 외로움에 휩싸이면 주변 사람들에게 절규하듯 이렇게 말했답니다.

"어떻게 하면 이 삶을 견딜 수 있죠?"

장미의 가시는 앙증스럽지만 선인장의 가시는 치명적입니다. 재클린 뒤 프레는 그 선인장 가시에 찔려 조락한 측은한 여인입니다.

재클린 뒤 프레는 세상에 태어난 지 21년 만에 다니엘 바렌보임을 만났고 만난 지 21년 만에 사랑했던 남편 다니엘 바렌보임의 잔인한 가시에 찔린 채 속절없이 지고 말았습니다.

그녀가 진 날도 오늘과 같은 어느 깊은 가을날이었던가요? 

지휘자/다니엘 바렌보임
지휘자/다니엘 바렌보임

지금은 세계 정상의 지휘자로 명성을 날리는 남편 다니엘 바렌보임. 민족 간 화합과 세계 평화를 역설하며 분주히 세계를 돌아다니는 다니엘 바렌보임.

그러나 자신에게 오늘이 있게 해 준 아내를 배신한 패륜아 다니엘 바렌보임에게 재클린 뒤 프레는 영원한 아킬레스건(Achilles Tendon)이 될 것입니다.

오늘날 이런 패륜아가 어찌 다니엘 바렌보임 한사람 뿐이겠습니까? 내가 아는 이런 부류의 정치인, 경제인, 예술인 등 수많은 이지러진 인간들의 모습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칩니다.

이들은 순수한 사랑의 결실보다는 단순한 욕정을 위해, 더욱이 자신의 출세를 위해 바렌보임과 같이 아내의 명성과 재물을 필요로 배우자를 선택하는가 하면, 심지어는 사회적 지위가 높은 장인(丈人)의 후광(後光)을 필요로, 혼인이라는 관계를 통해 그 가로등 밑에 머물다 그 빛이 쇠하여 희미해지면 곧 다른 가로등 밑으로 옮기는 파렴치한(破廉恥漢)들입니다. 필자는 이런 사랑을 ’필요사랑‘이라 명명(命名)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이런 가식적인 사랑이 역겨워 어느 유명 가수는 자신의 노래를 통해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라고 절규(絶叫)했나 보다.

첼리스트 베르너 토마스 미푸네의 연주로 오펜바흐의 <재클린의 눈물>을 들으시겠습니다.

Jacques Offenbach Werner Thomas-Mifune, cello. Hans Stadlmair, cond./ Münchener Kammer-Orchestra

1987년 10월 19일, 가을을 남기고 떠난 여인, 재클린 뒤 프레.

참기보다는 쏟아내는 듯 그녀의 두 눈에 그렁그렁 맺힌 눈물이 당장 쏟아져 내릴 것만 같습니다. 온몸의 마비 증세로 눈물조차 마음대로 흘리지 못한 재클린 뒤 프레. 그저 가슴에 한껏 안아주고 싶은 가련한 여인입니다.

지금 내 곁에선 오펜바흐의 <재클린의 눈물>이 슬픔의 악기 첼로의 선율을 타고 하염없이 흐르고 있습니다.

강인

 

 

예술비평가
사단법인 카프코리아 대표 
국민의힘 국가정책 자문위원(문화)

 

문화뉴스 / 강인 colin153@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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