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서부터 불어온 바람이었을까 
밤의 적막함은 끝없는 고독의 나락으로 떨어져 추락해 버리고

한순간의 사랑도 미움도 
인연의 부질 없음에 잡지도 말고 막지도 말자

그래 가야지 돌아서는 계절 
저물어 가는 가을과 함께

어차피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혼자였고 외로운 존재인걸

매서운 칼바람 불어오는 
겨울이란 인연이 찾아오고 있음을 가슴에 느끼면서”

임경 유희수 <돌아서는 계절> 

 

‘담벽(壁) 길에 떨어진 나무 그림자(Tree Shadows on the Wall)’  존 앳킨슨 그림쇼(John Atkinson Grimshaw) 1872. / 겨울로 향하는 길손이 보이는 쓸쓸한 이 작품은 '브람스 교향곡 제4번'의 이미지와 놀랍도록 비슷하다.
‘담벽(壁) 길에 떨어진 나무 그림자(Tree Shadows on the Wall)’ 존 앳킨슨 그림쇼(John Atkinson Grimshaw) 1872. / 겨울로 향하는 길손이 보이는 쓸쓸한 이 작품은 '브람스 교향곡 제4번'의 이미지와 놀랍도록 비슷하다.

모두들 돌아서고 있습니다. 차마 한 발자국마저도 내딛지 못한 채, 얼음 발처럼 차가운 가슴을 안고 저렇게들 돌아서고 있습니다.

봄이면 복사꽃에 영산홍이 흐드러지게 필 산허리 언덕과 겨우내 언 눈물 녹일 그 화해의 문턱을 보고도 추위에 시릴 손이 안쓰러워 가슴을 부여잡은 채 돌아서고 있습니다.

완충의 고요한 땅 한 떼기 없는, 모조리 일선으로 둔갑한 이 강산 위에서 목놓아 통곡도 못하고 움찔움찔 세월을 삼키면서 눈만 발갛게 뜨고 옹기종기 모였습니다.

12월의 발자국 소리가 멀리서 다가와 이내 문을 두드리며 닫힌 가슴들을 열라, 열라 소리를 외치는데 자꾸만 움츠러드는 몸피는 땅속 깊숙이 잠겨 들고 있습니다. 이렇듯 꽁꽁 얼어붙을 겨울을 바라보는 이 계절은 왜 이리도 몰인정하고 야박스러운지요.

사생결단이 난 젊음, 조급증에 갈증이 혓바늘처럼 돋는 인생을 수레에 싣고 맨살 맨 허리로 끌면서 한 해의 끄트머리를 봅니다.

찬 바람이 거세지고 나무에는 공허만이 나부끼며 얼어붙은 땅들이 모질게도 잇몸을 부딛는 동토(凍土)의 계절. 이제 한 철만 지나면 또다시 따뜻한 봄날이 찾아오련만 한겨울 한파의 육중함을 견뎌야 하는 부담감 때문인지 자꾸만 지나온 계절들이 그리워 모두들 돌아서는 몸짓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봐야 아무데도 갈 곳 없는 사람들이.....

 

작곡가, 요하네스 브람스(1833~1897)
작곡가, 요하네스 브람스(1833~1897)

오늘 소개할 곡은 ‘요하네스 브람스(Johannes Brahms)’의 <교향곡 제4번>입니다.

브람스는 그의 나이 52세가 되던 1884년 여름 마지막 교향악 작품으로 제4번 교향곡을 쓰기 시작했는데, 그즈음 그는 종래 느껴보지 못했던 인생의 허무함과 고독을 절실하게 실감하고 있었습니다.

‘빈(Wien)’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뮈르추 슬라크’ 라는 곳에서 잠시 요양하며 지내게 된 그는 젊은 날의 사랑과 예술에 대한 정열 그리고 아름다운 추억에 젖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그래서인지 교향곡 제4번은 우수어린 색채가 전편에 걸쳐 흐르고 있습니다.

사실 이 교향곡 제4번을 작곡하기 전 제1번, 2번, 3번에서 보여준 교향악 작품의 세계는 베토벤에게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아왔습니다. 제1번은 베토벤의 '운명', 제2번은 '전원', 제3번은 '영웅'과 흡사한 느낌을 떨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4번에 이르러서는 어두움으로 시작해서 점점 광명으로 향하는 베토벤의 구도를 버리고 어두움으로부터 비극으로 침잠해 가는 자신만의 교향곡 모델을 확립하게 됩니다. 그래서 제4번 교향곡은 진정한 브람스만의 음악이며 아무도 이 교향곡을 베토벤의 작품에 빗대지 않았습니다.

이 4번 교향곡은 이미 인생 중반을 넘어 노년의 초입에 들어선 브람스로서는 생의 비애와 함께, 또한 그 당시 읽고 있었던 '에우리피데스(Euripides)‘의 <그리스의 비극>에 대한 음습한 인상 등이 이 작품의 주된 기저(基底)를 이루는 브람스만의 고독한 세계를 그리고 있습니다.

누군가가 이 교향곡 제4번을 가리켜 ‘슬픈 탄식’이라는 표제가 어울린다고 말한 것은 가을을 지나 허전한 초겨울의 적막감을 적절하게 표현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일반적인 양식(樣式) 면에 있어서도 이전에 작곡된 것과는 달리 전 악장 모두 옛날 양식인 '프리기아 선법(Phrygian Mode)' 등 고색창연한 기법을 사용하여 전체 음악적으로 음산한 분위기를 풍겨주고 있습니다.

그에겐 그 고풍스러움이야 말로 인간의 지울 수 없는 과거의 추억을 새삼 맛보게 하는 가장 좋은 형식이라고 생각되었을지도 모릅니다.

특이한 점으로는 1986년 우리나라에서 우리 악단에 의해 외국 교향곡을 레코딩한 첫 음반이 바로 이<브람스 교향곡 제4번>이었습니다. 그것도 K.B.S 교향악단이나 서울시립교향악단이 아닌 故 ‘박종혁’ 선생이 지휘하는 부산시립교향악단에 의해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37년이 지난 지금 생각하면 '격세지감'(隔世之感)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브람스 <교향곡 제4번> E단조 Op.98.
1. Allegro Non Troppo
2. Andante Moderato
3. Allegro Giocoso
4. Allegro Energico e Passionato

‘카를로 마리아 쥴리니(Carlo Maria Giulini)’가 지휘하는 ‘비엔나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듣고자 합니다.

지휘자, 카를로 마리아 쥴리니(1914~2005)

'토스카니니'이래 이탈리아가 배출한 최고의 지휘자로 평가 받고있는 쥴리니는 작품에 대한 확신이 없을 때는 지휘대에 서지않는 철저한 완벽주의자였습니다.

그는 ‘캬라얀’이 베를린 필하모니 오케스트라 지휘자 자리에서 물러날 때 자신의 후계자로 지목한 인물입니다. 그러나 세계의 모든 지휘자가 갈망하는 영광스러운 자리를 "나는 당신처럼 그 많은 연주회를 다 소화할 수 없습니다"라면서 거절했습니다. 

마치 영화배우처럼 수려한 외모에 팻션 감각이 뛰어난 멋쟁이지휘자 쥴리니는 우리나라 지휘자 '정명훈'에게 지휘를 전수한 스승이기도 합니다. 

 

Johannes Brahms | Carlo Maria Giulini, Cond./ Wiener Philharmoniker(Salzburg Festival, 15 August, 1989)

깊은 '인생의 가을'을 살아가는 고독감.
이 작품을 통해 노년기에 이른 브람스의 심경의 깊이가 느껴집니다.

 

강인

 

 

예술비평가
사단법인 카프코리아 대표 
국민의힘 국가정책 자문위원(문화)

 

문화뉴스 / 강인 colin153@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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