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출처-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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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만하면 빼놓지 않고 즐겨보는 TV프로그램이 있다. 바로 ‘퀴즈프로그램’이다.

퀴즈프로그램은 참 볼만 하다. 내 지식과 상식을 점검할 수 있고 상대의 실력을 탐색할 수도 있는 기회다. 그리고 아는 문제가 나오면 맘껏 뽐낼 수도 있는 시간이 주어진다. 한껏 우쭐거리며 대놓고 잘난 척해도 용서가 된다. 남들은 다 모르고 오직 나 혼자만 정답을 맞혔을 때 그 쾌감이란 이루 말할 수 없다.

“아싸! 난 죽지 않았어. 저기 나갔으면 1등은 내가 하는 건데!”

물론 카메라 앞에 서면 다리가 후들거려 단 한 문제도 풀지 못할 거면서도 괜한 허세도 떨어본다.

퀴즈프로그램은 유익함은 기본이고 때론 감동까지도 준다.

출연자들의 출연동기를 찬찬히 들어보면 눈물이 찔끔 나올 때도 있다. 아픈 딸을 위해 희망을 전하고자 출연한 아빠도 있고 초등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못해 늘 배움에 대한 목마름을 가진 할머니도 있다. 그런 분들이 1등을 차지할 때면 마치 가슴 찡한 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감동적이다.

어느 날이었다. 혼자 누워서 퀴즈프로그램을 보는데 아는 문제가 나왔다. 그 문제는 1등을 결정짓는 아주 중요한 문제였다.

친구 프란츠크니그 슈타인의 도움으로 미술 공부를 할 수 있었고 <기도하는 손>이란 작품을 남긴 화가가 누구냐는 문제였다.

나는 용수철처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밀레. 밀레. 와우! 쳇, 쟤들은 저것도 못 맞춰 쩔쩔매네. 바보 아니야?”

결승전에 오른 두 출연자 모두 입도 뻥긋 못했다. 나의 우쭐거림이 하늘을 찌르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잠시 뒤, 사회자가 정답을 공개했는데 정답을 보고 나는 아무 말도 못했다. 마치 망치로 뒤통수를 얻은 맞은 것 같았다.

“이번 정답은 ‘뒤러’였습니다. 아쉽게 두 분 모두 정답을 맞히지 못했습니다. 추가 문제를 하나 더 내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이상하다. 그럴 리가 없는데….”

‘밀레’가 정답이라고 확신했기에 도저히 ‘뒤러’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뭔가 잘못됐어! 이건 방송사고야!”

그렇게 ‘밀레’를 확신하는 이유는 며칠 전에 그에 관련된 책을 보았기 때문이다. 분명히 밀레는 친구의 도움으로 미술 공부를 할 수 있었고 그 친구 덕분에 유명한 화가가 되었다.

나는 나의 확신을 확인하고자 서둘러 책을 찾아보았다. 그런데 아뿔싸. 정답은 밀레가 아니라 뒤러였다. 밀레는 친구 테오도르 루소의 도움을 받았고 뒤러는 친구 프란츠의 도움을 받았다. 밀레와 뒤러의 일화가 비슷하다보니 내가 착각을 한 것이다.

순간,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다행히 혼자 있었기 망정이지 누구랑 같이 있었다면 두고두고 놀림을 당했을 게 분명했다.

살다보면 이런 경우가 있다.

내가 확실하다고 장담하는 상식이나 지식이 틀린 것이거나 진실이라고 믿었던 것이 거짓일 때가 있다. 확신이 무너지는 그런 순간이 오면 당황스럽기도 하고 정신이 혼란스러워 멍해진다. 그리고 나중에 어느 정도 제정신으로 돌아온 후에는 얼굴이 붉어진다. 내 사고와 경험이 얼마나 협소했던가를 깨닫게 되는 순간이다.

일찍이 철학자 베이컨은 자신이 가진 지식이 절대적인 진리인 듯 착각하는 이들에게 일침을 가했다. 그게 바로 ‘동굴의 우상론’이다.

깊은 동굴 속에 죄수들이 갇혀 있었다. 그들은 손발이 모두 묶인 채 동굴 안쪽 벽만 쳐다보게 되어 있다. 그래서 그들이 볼 수 있는 거라곤 해가 떴을 때 동굴 안쪽에 어른거리는 그림자뿐이었다. 그들에게 있어 그림자는 절대적인 존재이며 지식의 전부였다.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그림자는 절대적인 게 아니다. 그림자는 허상이고 실체는 분명 따로 존재한다. 한 마디로 동굴 안에 있는 죄수들의 꼴은 우물 안 개구리와 다를 바 없다.

베이컨은 ‘동굴의 우상론’을 주창하며 사람들에게 협소한 주관적인 사고와 경험을 경계해야 함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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