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주류 오케스트라로의 진입 타진할 명품하모니!”

122() 오후 5시 강동아트센터

유럽의 클래식음악 지형에서 주류를 형성하는 나라들은 독일, 프랑스, 영국, 네덜란드, 체코, 이탈리아등의 오케스트라를 보유하고 있는 나라들이다.

동유럽도 체코필이 터줏대감을 잡고 있는 느낌이어서 슬로박필 같은 연주단체가 국내 클래식계 무대에서 명함을 내민 것도 오랜 만인 것 같다. 더욱이 베를린필, 빈필, 암스테르담 콘서트헤보우,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 같은 메이저급 오케스트라들이 11월에 서울 클래식계 무대를 휩쓸고 간 터라 슬로박필 같은 연주단체에 관객흡인력이나 연주력 측면에서 사실 큰 기대는 하지않고 강동아트센터를 찾은 클래식 관객들도 상당수 있었을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은 기우(紀憂)였다. 슬라브 정통 사운드를 기반으로 한 국립 슬로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동유럽 명품 하모니로 메이저급 오케스트라들이 국내 클래식 무대를 휩쓸고 떠난 이후 유럽 주류 오케스트라로의 진입을 타진할 수 있는 명품하모니를 선보였다. 빈에 가까운 슬로바키아 브라티슬라바는 그만큼 음악 수준도 높아 서쪽 체코측을 대표하는 프라하의 체코 필하모니에 대응하는 동쪽의 큰 존재가 바로 이 오케스트라임을 증명해준 것이다. 슬로박필의 이번 국내 내한공연도 서귀포, 천안, 인천등 지방을 순회하는 일정들이었는데 지방 관객들에게 가뭄에 단비와도 같았고 슬로박필과 선우예권은 그러한 지방관객들의 갈증을 완벽히 해소해주는 호연을 들려주었다는 평들이 많았다.

나의 인생과 같이 가는, 동행하는 느낌의 라흐마니노프 '파가니니 랩소디'를 들려주고 있는 선우예권과 슬로박필. (사진 강동아트센터)
나의 인생과 같이 가는, 동행하는 느낌의 라흐마니노프 '파가니니 랩소디'를 들려주고 있는 선우예권과 슬로박필. (사진 강동아트센터)

초겨울의 서정과 담뿍 어울리는 다채로운 프로그램들

지난 주말 122일 토요일 오후 강동아트센터에서 있었던 국립 슬로박필하모닉의 최대 강점은 슬라브 정통 사운드였다.

세계 유수의 오케스트라들이 세계적인 사운드를 지향하고 있는 반면 슬로박필은 슬라브 정통 사운드를 유지하며 이를 긍지로 여긴다. 이런 슬로박필의 슬라브 정통 사운드는 첫 연주곡 얀 레보슬라프 벨라의 서곡 내리마장조에서부터 현현(顯現)됐다. 슬로박필의 레퍼토리 구성은 안토닌 드보르자크의 교향곡 8번을 비롯해 선우예권이 협연한 알렉세이 쇼어의 피아노협주곡 여행 노트와 라흐마니노프의 파가니니 랩소디등 초겨울의 서정과 담뿍 어울리는 다채로운 프로그램들로 구성되어 이채를 띠었다.

그러나 역시 동구권에서 클래식 터줏대감이 체코필인 탓에 과거 체코슬로바키아 한 나라에 속하긴 했지만 슬로박필은 체코필의 그늘에 가려온 면을 부인하기 어렵다. 올해 지난 1024일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에서 내한공연을 가진 체코필이 상임지휘자 세묜 비치코프 지휘로 드보르자크의 작품만을 선보여 사육제 서곡’, ‘교향곡 7을 비롯해 무대에서 자주 만나기 힘든 피아노 협주곡 g단조를 오리지널 버전으로 연주해 기라성같은 유럽의 메이저급 오케스트라 군웅할거(群雄搳據) 시장에서도 우뚝 서있었던 것은 이런 한 단면이다.

이런 가운데 슬로박필의 틈새시장(niche market)은 슬라브 정통 사운드에 있음을 이번 강동아트센터에서 있은 서울공연은 보여준다. 특히 드보르작 교향곡 제8번의 슬로박필 연주에서 3악장 Allegretto grazioso-Molto VivaceSlovonic dance풍으로 음악이 전개되고 작곡 배경에 따라 보헤미아 춤곡풍에 가깝게 여겨진 것은 이런 배경을 잘 설명해준다.

전반부에서 두곡의 피아노협연에 나선 선우예권은 후배 또래의 피아니스트 조성진과 임윤찬이 베를린필과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 그리고 임윤찬이 정명훈이 지휘한 뮌헨필과 협연무대를 화려하게 장식하던 차에 상대적으로 네임밸류면에서 명성이 높지 않은 슬로박필과 협연을 선택,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는 꾸준한 정진형 피아니스트로 내게는 비쳐진다. 세계 초연의 우크라이나 작곡가 알렉세이 쇼어의 피아노협주곡 여행노트의 협연에 이어 라흐마니노프의 파가니니 랩소디로 선우예권의 피아니즘이 건재해 살아있음을 클래식 관객들에게 알린 것이다.

예전의 어느 인터뷰에서 선우예권의 레퍼토리, 시그니처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물었을 때, ’러시안 레퍼토리 특히 라흐마니노프라고 선우예권이 답한 적이 있다. 가장 좋아하는 작곡가로 슈베르트와 슈만을 많이 이야기했지만 라흐마니노프는 조금 다르며 나의 인생과 같이 가는, 동행하는 느낌이라고 선우예권은 말한다. 특유의 그리움과 우울, 우수의 감성, 그로부터 나온 소리의 깊이와 그것을 노래하는 방법을 마음으로 공감했고 억지로 드러내지도 않아도 자연스럽게 이해하여 표현할 수 있었다는 것이 선우예권의 술회다.

알렉세이 쇼어의 피아노협주곡 여행노트는 정형화된 클래식 협주곡의 형태가 아닌 7악장으로 구성되어 각각의 주제가 분명히 있던 곡으로 여행노트라는 말처럼 7악장을 듣는 동안 각각에 맞는 여행이 떠올랐다는 관객들의 많았고 선우예권이 연주한 라흐마니노프의 파가니니 랩소디역시 영웅적인 피날레를 보이기도 하고 마치 모든 어두움을 극복하고 환희와 승리를 향해가면 화려한 불꽃이 있을 것이라는 인생의 방향을 제시해주는 것 같은 연주였다.

바츨라프 탈리히가 조련해온 슬라브 사운드의 역사 맛봐

20169월에 슬로바키아 슬로박신포니에타 서울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 내한공연이 있어서 이 연주단체가 서곡으로 베토벤 <프로메테우스의 창조물> 서곡 작품 43을 골랐고 후반부에서 베토벤교향곡 제7, 앙콜곡으로 모차르트의 휘가로의 결혼 서곡등을 비슷한 시기에 내한연주회를 가진 베를린심포니의 레퍼토리들과 똑같이 연주한 적이 있다. 베를린필과 과거 인근 체코필의 아성을 생각한다면 베를린심포니나 슬로박 신포니에타는 앞선 두 연주단체에 비해 그렇게 명성을 비교할 바가 안된다. 더욱이 형식이나 내용의 면에서 규모가 작은 심포니를 뜻하는 슬로박신포니에타의 경우는 오케스트레이션의 성량이 풀사이즈 오케스트라에 훨씬 못미쳐 깊은 감동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그런 면에서 이번에 감성과 정통한 기교뿐 아니라 폭넓은 레퍼토리로 경계를 넘나드는 지휘자로 알려진 다니엘 라이스킨(Daniel Raiskin)이 지휘한 슬로박필은 1949년 슬로바키아 수도 브라디슬라바의 첫 국립 오케스트라로서 첫 상임지휘자로 체코 지휘의 아버지로 칭송되온 바츨라프 탈리히가 조련해온 슬라브 사운드의 역사를 맛볼 수 있었다,.

2차 세계대전 종전 후인 1949년에 체코슬로바키아의 동부 슬로바키아 지방의 수도에서 오스트리아와 국경을 접하는 브라티슬라바에 창설된 국립 오케스트라가 바로 슬로박필이다. 초대 상임 지휘자는 이 오케스트라의 창립에 힘을 쓴 체코슬로바키아의 명지휘자인 바츨라프 탈리히인데, 그는 이 오케스트라를 단기간에 일류의 수준으로 육성하였으며 1961년 별세 전까지 이 자리에 있었다. 뤼도비트 라이테르가 그 뒤를 이었고, 1961년부터는 탈리히의 사랑하는 제자 브라티슬라바 출신인 라디슬라프 슬로바크가 예술 감독 겸 수석 지휘자로 영입되었다. 그 동안 클라우디오 아바도와 장 마르티농을 비롯하여 그 밖에도 일류 지휘자를 객원 지휘자로 초청하였고, 또 브라티슬라바 오페라 극장 음악 감독인 즈데녜크 코슐러도 상임에 준하는 지휘 활동을 하였다.

슬로박필은 후에 라디슬라프 슬로박, 리보르 폐색, 블라디미르 발렉등 체코 출신 거장들이 음악감독으로 역임하며 그 정통성을 굳히게 되었다고 하는데 이런 연주력이 이번 내한공연을 통해 다시 한번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니었음을 알게 된다. 슬로박필은 클라우디오 아바도, 첼리비다케, 제임스 콜론, 레너드 솔래트칸, 마리스 얀손스등 거장 지휘자들이 함께 하며 국제적으로 사랑을 받게 되었고 기돈 크레머, 마우리치오 폴리니등 최고의 아티스트들과 협연하며 세계적인 오케스트라로 입지를 굳힌 것으로 전해져 슬로박필의 위상이 유럽 주류 메이저급 오케스트라들과 어깨를 할 날도 멀지않아 보인다.

(: 음악칼럼니스트 여 홍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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