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21년 11월 12일 당시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는 서울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외신기자클럽 초청 기자간담회에서 “러시아를 좋아하느냐?”는 러시아 기자의 질문에 “저는 차이코프스키(Pyotr Ilyich Tchaikovsky)와 쇼스타코비치(Dmitri Dmitriyevich Shostakovich)를 아주 사랑한다”고 대답했습니다. 

이어 윤 후보는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7번 ‘레닌그라드(Leningrad)’>를 언급하며 “특히 제2차 세계대전에서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가 나치에 포위됐을 때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이 러시아 국민에게 큰 힘이 됐다”며 “전 세계 인류의 한 사람으로서, 러시아 국민께 경의를 표한다”고 했습니다.

지난 대선 당시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가 2021년 11월 12일 서울프레스센터 외신기자클럽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2021. 11. 12.)
지난 대선 당시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가 2021년 11월 12일 서울프레스센터 외신기자클럽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2021. 11. 12.)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소 전투에서 독일은 러시아 제2의 도시인 레닌그라드를 1941년 9월 8일부터 1944년 1월 27일까지 872일 동안 봉쇄했습니다.

레닌그라드에서 나고 자란 쇼스타코비치(1906~1975)는 도시가 봉쇄되고 포화가 빗발치는 전투상황 속에서 <7번 교향곡>을 쓰기 시작하여 1941년 12월 가족과 함께 피신한 ‘쿠이비셰프(Kuybyshev)’에서 마지막 4악장을 마무리했습니다. 그 후 이 곡은 1942년 3월 5일 쿠이비셰프에서 모스크바 볼쇼이극장 관현악단의 연주로 초연되었는데 그 후 스탈린(Joseph Stalin)은 군사작전의 하나로 레닌그라드에서도 이 연주회를 추진했습니다.

1942년 8월 9일 밤. 쏟아지는 독일군의 포탄 속에서 스탈린은 “지금 레닌그라드에서 필요한 것은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7번 ‘레닌그라드’>를 듣는 것”이라는 결단을 내립니다.

그날 도시에 남아있던 레닌그라드의 라디오 오케스트라 단원 18명과 음악교사, 전직 연주자들이 함께 모여 연주에 동참했습니다. 연주장소인 필하모니 홀 안팎에는 수만 명의 시민(市民)이 모였고, 연주는 스피커를 통해 레닌그라드 전역은 물론 이 도시를 포위하고 있는 독일군에도 전달됐습니다.

이 연주로 인해 정신적 힘을 얻은 시민들은 독일군이 레닌그라드에서 물러가기까지 18개월이라는 긴 시간을 버틸 수 있었습니다. 이렇듯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7번 ‘레닌그라드’> 연주는 근대 러시아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위대한 사건으로 남아있습니다.

1942년 8월 9일, 당시 독일군에 봉쇄된 소련이 레닌그라드 필하모니홀에서 지휘자 ‘카를 엘리아스베르’의 지휘로 쇼스타코비치 [7번 교향곡 ‘레닌그라드’]를 연주하는 모습
1942년 8월 9일, 당시 독일군에 봉쇄된 소련이 레닌그라드 필하모니홀에서 지휘자 ‘카를 엘리아스베르’의 지휘로 쇼스타코비치 [7번 교향곡 ‘레닌그라드’]를 연주하는 모습

그러나 필자는 당시 윤 후보의 “쇼스타코비치를 사랑한다”는 발언을 들으며 <교향곡 7번>보다는 문득 그에 앞서 작곡한 <교향곡 5번>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5번>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1930년대 소련은 스탈린 1인 숭배체제 아래 3천만 명이 숙청당하는 공포정치의 시대였습니다. 따라서 당의 지침에 순응하지 않는 예술가는 타락한 자본주의자로 몰아 숙청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즉 이념과 체제의 잣대로 음악을 재단하던 시대였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활동했던 촉망받는 젊은 작곡가가 바로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입니다.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5번>은 그가 31세 때인 1937년에 완성한 곡으로 그의 교향곡 15곡 중 최고의 작품으로 손꼽히며 가장 많이 연주되는 레파토리 중 하나입니다.

이 교향곡 5번은 <혁명>이라는 표제가 붙여져 있습니다. 특히 교향곡에서 ‘5번’이라는 숫자는 <운명교향곡>을 작곡한 베토벤(Beethoven)에 대한 경외심을 갖게 마련인데 역시 ​이 곡도 5번이고 보니 쇼스타코비치의 또 다른 ‘운명교향곡’이라 여겨집니다. 이는 아마도 ‘혁명’에는 ‘운명’을 걸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일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86년 전인 1937년 11월 21일은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5번>이 초연된 날입니다. 이날 소비에트 사회의 최상류층 유명 인사들은 이 작품의 초연을 듣기 위해 연주회장에 모였습니다. 그들은 이 연주로 인해 작곡자인 쇼스타코비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가 초미의 관심사였습니다. 어쩌면 이 연주가 그의 운명의 분수령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느덧 4악장의 마지막 음이 멈추자 연주회장은 참석자들의 깊은 감동으로 삽시간에 눈물의 바다를 이루었습니다. 이는 그곳에서 한 젊은 예술가의 정직하고 용기있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날 발표한 <교향곡 5번(혁명)>은 스탈린의 공산 독재에 대한 쇼스타코비치의 대답이었습니다. 

곡의 흐름은 1악장에서 3악장까지의 비극적인 분위기와는 달리 마지막 4악장에서는 강력한 타악기의 연주와 함께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당시 관변 비평가들은 스탈린 정권의 더 밝은 미래의 비젼을 보여준 작품이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쇼스타코비치는 그의 만년에 이르러 "이 곡은 공산주의를 찬양한 곡이 아니라 스탈린 체제를 조롱한 곡"이라고 직접 밝힌 바 있습니다.

러시아의 유명 지휘자 ‘게르기예프(Veaery Gergiev)’도 "스탈린은 절대권력을 휘두른 독재자요 폭군이었다. 하지만 스탈린이 억누를수록 쇼스타코비치는 더더욱 강해졌다"라고 말했습니다.

당시 미국의 시사 주간지 ‘타임(Time)’은 "소방수 쇼스타코비치"라는 제목으로, 소련 공산권(스탈린)의 불길과 맞서 싸우는 소방관으로 캐리커처(Caricature)된 쇼스타코비치의 모습을 표지에 실어 보도하기도 했습니다.

‘소방수 쇼스타코비치'라는 제목으로 커버를 장식한 '타임'지
‘소방수 쇼스타코비치'라는 제목으로 커버를 장식한 '타임'지

현재 미국을 여행 중인 필자는 과거 30년 가까이 미국에서 살았지만 근래 한국인들에 대한 외국인들의 대우가 현격히 달라진 것을 피부로 느낍니다. 그만큼 우리나라의 국력이 신장(伸張)된 증거입니다.

반면 작금의 대한민국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전 분야에 걸쳐 총체적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본질적으로 국가와 국민을 위해 존재해야 할 정치인은 당리당략과 사리사욕을 위해 이전투구하는 정치 건달로 전락하였고, 경제는 부패하였으며, 사회는 폭력과 범죄가 만연하고, 문화는 퇴폐의 온상이 되어 마치 과거 자유당 말기의 혼란한 사회상을 보는 듯합니다.

이에따라 극도로 이분화(二分化)된 국내 사회 풍조는 진영논리에 매몰되어 ‘친미-반미’, ‘친일-반일’, ‘친중-반중’, ‘친북-반북’, '호남-영남' 등 극단의 국민 분열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특히 이 모든 것의 기본은 ‘좌파-우파’의 계파 다툼에서 비롯됩니다. 이러한 좌우로 나누어진 파벌의식이 국민 분열을 일으켜 결국에는 망국(亡國)의 지름길로 향하게 된 것입니다. 어쩌다 이 지경에 까지 이르렀는가? 참으로 통탄을 금할 수 없습니다.

특히 우리에게 가장 심각한 것은 안보(安保)입니다. 안보는 국민의 생사가 달린 문제입니다. 

국민이 지난 대선(大選)에서 정치 경험이 없는 검찰총장 출신을 대통령으로 세웠던 것은 호시탐탐 도발을 자행하는 북한을 위해 온갖 음모를 획책하는 친북, 종북, 주사파 운동권 등 반국가 세력을 여적죄로 다스려 법적 단두대에 세우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을 것입니다. 이미 이들은 교화(敎化)의 대상이 아닙니다. 타협의 대상도 아닙니다. 단지 일소(一掃)의 대상일 뿐입니다. 대통령은 대선공약을 이행하고 통치권자의 가장 중요한 첫 번째 책무인 국헌 준수와 국가 보위를 완수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반드시 대통령의 혁명적 결단이 필요합니다. 

최근 정부나 정치계 일각에서는 ’개혁‘, ’혁신‘의 목소리가 비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대한민국은 개혁이나 혁신으로는 안됩니다. 명운(命運)을 건 혁명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독재를 위한 혁명이 아니라 국태민안(國泰民安)을 위한 혁명이 필요한 때입니다. 과거 <혁명>이라 명명한 ‘운명’의 5번 교향곡을 작곡한 쇼스타코비치나, 5.16혁명을 주도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심정이 바로 이 국태민안을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혁명은 고독한 결단입니다. 그러나 고독한 그 길에 국민의 뜨거운 눈빛이 함께하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은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제5번 (혁명) d단조, 작품번호 47>, 총 4악장 중에서 제4악장(Allegro non troppo)만 듣고자 합니다.

필자는 이 곡을 대할 때마다 지난날의 한가지 에피소드가 떠오릅니다.

과거 세종문화회관이 개관되던 1978년, 필자가 제작진으로 참가하여 3개월간 열렸던 '개관기념예술제'​에 초청받은 뉴욕필하모니 오케스트라가 6월 29일 내한 공연을 준비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이 공연 레파토리 중​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5번>이 포함된 것을 알고 청와대에서 그 곡의 교체를 요구하자 지휘를 맡았던 '레너드 번스타인(Leonard Bernstein)'이 한국공연을 취소하겠다고 강력히 항의하므로 이에 굴복, 결국 연주가 이루어진 사연이 있는 곡입니다.

정부가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5번에 대한 교체를 요구한 이유는 그 작품의 부제가 ‘혁명’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혁명으로 새 시대를 이룬 대통령의 측근 참모들도 혁명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더 설명하지 않아도 그 당시​ 실무자였던 필자가 이 작품으로 인해 얼마나 어려움을 겪었을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쇼스타코비치의 제5번 교향곡은 필자에게는 '혁명'만큼이나 긴장되고 고통스러운 작품으로 기억되는 특별한 곡입니다.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5번에 가장 잘 어울리는 지휘자와 오케스트라는 '예프게니 므라빈스키(Yevgeny Mravinsky)'와 ‘레닌그라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Leningrad Philharmonic Orchestra)’일 것입니다.

므라빈스키는 50년간 레닌그라드 오케스트라를 이끌어 온 구(舊)소련을 대표했던 상징적인 지휘자이며 또한 앞서 1937년에 있었던 이 교향곡 5번(혁명)의 '운명적 초연'을 지휘하는 영광을 얻은 지휘자이기도 합니다.

거장 므라빈스키가 지휘하는 레닌그라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연주입니다.

Dmitri Shostakovich, D-minor Op.47, IV. Allegro non troppo / Yevgeny Mravinsky, Cond., Leningrad Philharmonic Orchestra

국태민안의 새 시대는 그저 열리는 것이 아닙니다. 국태민안의 걸림돌을 제거하는 혁명을 통해 열리는 것입니다.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5번 ‘혁명’>이 있었기에 <교향곡 7번 ‘레닌그라드’>가 존재할 수 있었던 것처럼 새 시대를 여는 혁명이 있어야 영광스러운 조국 대한민국의 앞날을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2024년이 열리는 새해 첫날. 

[마에스트로 윤석열]이 지휘하는 새 시대 [혁명교향곡]이 이 땅 위에 장엄하게 울려 퍼지기를 기대합니다.
 

강인

 

 

예술비평가
사단법인 카프코리아 대표 
국민의힘 국가정책 자문위원(문화)

 

문화뉴스 / 강인 colin153@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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