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람일: 2024.1.5
캐스팅: 김수진, 최수영, 정웅인, 이승주, 정환, 표지은
장소: LG아트센터 서울 U+ 스테이지
좌석: J열 좌측

“나는 더 이상 당신의 와이프가 아니에요.”

‘인형의 집’에서 노라는 이렇게 말하고는 누군가의 아내도, 누군가의 어머니도 아닌 그저 자신이 되어 집을 떠난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녀는 그 집에서 ‘사람’이 아닌 ‘인형’이었기 때문이다. 곱고 어여쁜 모양새로 사랑받으며 집을 지키는, 얌전한 인형.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바꿀 수 없는 존재 말이다. 노라가 스스로 메인 줄을 끊고 문밖으로 나서며 그녀가 독립적인 한 인간으로써, 한 여성으로써 살아가게 될 것을 암시하며 책은 끝을 맺는다. 그리고 그곳에서부터 연극 ‘와이프’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연극 ‘와이프’는 노르웨이의 극작가 헨리크 입센의 대표 희곡, ‘인형의 집’을 모티브로 펼쳐지는 연극이다. 연극에서는 사회의 억압적인 시선에 갇힌 여성과 퀴어의 이야기를 집중적으로 다루며 이들의 사랑과 삶을 예술적인 시선으로 담아낸다. 인간이 살아온 모든 시대 속에 존재했던 수많은 와이프들, 자신을 옥죄는 굴레에 갇혀 살아온 수많은 여성들과 성소수자들의 이야기가 다음 시대로 전해지고 연결되며 짜임새 있는 하나의 작품을 완성한다. 

사진 = 강시언 / [리뷰] 연극 '와이프', 모든 시대의 노라들에게 바치는 강렬한 찬사
사진 = 강시언 / [리뷰] 연극 '와이프', 모든 시대의 노라들에게 바치는 강렬한 찬사

 

‘인형의 집’은 1879년 작으로, 지금으로부터 무려 145년 전에 쓰인 고전 중의 고전이다. 낡을 대로 낡아 지금 시대엔 맞지 않는 고리타분한 작품이군, 하는 생각이 들어도 모자라지 않을 만큼 오랜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이 이야기가 현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까지 깊은 공감을 불러오는 것은 우리 사회가 그때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사실의 방증일 것이다. 누군가의 와이프, 누군가의 무엇이 되어야만 인정받을 수 있다고 말하는 사회의 압박은 세대를 타고 넘어 계속되고 있다. 연극 ‘와이프’는 그러한 강요의 희생양이 된 여성과 퀴어의 고뇌와 욕망을 가감 없이 드러내며 이들이 인형이 아닌 한 사람임을 보여준다.

사회에 대한 묵직한 담론을 던지는 서사 구조와 별개로 연극 ‘와이프’가 이야기를 전하는 방식은 매우 세련되고 트렌디하다. 커튼과 조명, 극장의 형태를 재치 있게 활용한 무대부터 고전과 현대적인 매력을 절묘하게 섞은 음악과 춤까지. 우리가 무대 예술에서 기대하는 모든 것을 충족하는 완벽한 구성을 갖추고 있다. 깊은 이야기와 가벼운 유머, 현시대와 구시대의 콜라보레이션과 같은 상반된 요소를 한 작품에 담아내면서도 전혀 어색하거나 과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자칫하면 지루할 수 있는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센스있는 연출과 영리한 구성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사진 = 강시언 / [리뷰] 연극 '와이프', 모든 시대의 노라들에게 바치는 강렬한 찬사
사진 = 강시언 / [리뷰] 연극 '와이프', 모든 시대의 노라들에게 바치는 강렬한 찬사

 

연극을 이끌어가는 배우들의 연기 또한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인상적이었다. 모든 배우가 일인 다역을 소화하며 선보이는 변화무쌍한 연기도 훌륭했으며 무대에서 표출해 내는 강렬한 에너지도 뛰어났다. 마이크 없이 연기하기에는 꽤 큰 규모의 극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대사 전달에 문제가 없었던 점 역시 좋았다. 출연 배우들 모두 좋은 연기를 보여주었으나 특히 수잔나 역의 김소진 배우의 강렬한 눈빛과 깊은 감정 표현이 크게 와 닿았다. 가벼운 눈 맞춤, 대사 한마디의 떨림에도 영혼의 조각이 박혀있는 듯한 연기에 진한 감동을 받았다.

노라는 안정적인 집을 떠나 경험하지 못했던 많은 문제와 맞닥뜨려야 할 것이다. 의식주 문제부터 전염병, 야생동물, 각종 재해들… 인형의 집에는 없던 위협적인 존재들이 도사리고 있는 험한 바깥세상은 위험하고 두려운 공간이다. 노라는 이 위협에 맞서 싸우며 살아갈 수도 있을 테지만 어쩌면 다시 가정으로 돌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녀가 ‘스스로 선택을 할 수 있는 독립적인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다. 무엇을 선택하든 온전히 혼자의 힘으로 책임지고 헤쳐 나갈 수 있는, 한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그 변화만으로 삶은 충분히 아름답고 찬란하리라. 

자유를 찾아 집 밖으로 나서는, 모든 시대의 노라들을 위한 연극 ‘와이프’는 2월 8일까지 LG아트센터 서울 U+ 스테이지에서 공연된다. 완전히 새로운 감성으로 재건축된 인형의 집이 궁금하다면, 강렬한 예술적 체험에 목마르다면 연극 ‘와이프’의 남은 여정에 동참해 보는 것을 추천한다. 

문화뉴스 / 강시언 kssun08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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