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堯) 임금은 중국의 전설적인 성군(聖君)이었습니다. 그는 나이가 들어 기력이 약해지자 천자(天子)의 자리에서 물러나려 후계자를 물색하던 중 '허유(許由)'라는 현명한 은자(隱者)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찾아가 말했습니다.

"태양이 떴는데도 아직 횃불을 끄지 않는 것은 헛된 일이요. 청컨대 천자의 자리를 받아주시오."

허유는 즉시 사양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뱁새는 넓은 숲에 집을 짓고 살지만 나뭇가지 몇 개면 충분하고, 두더지가 황하의 물을 마셔도 배만 차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비록 음식을 만드는 포인(庖人)이 제사 음식을 만들지 않더라도 제사를 주관하는 제주(祭主)가 부엌으로 들어가지 않는 법입니다.“

이런 일이 있은 후 허유는 기산(箕山)이라는 곳으로 자신의 거처를 옮겼습니다. 요 임금은 그를 다시 찾아가 구주(九州)라도 맡아달라고 요청했으나 이를 단호히 거절한 허유는 그런 말을 들은 자신의 귀가 더러워졌다고 흐르는 강물에 귀를 씻었습니다.

때마침 소 한 마리를 앞세우고 지나가던 '소부(巢父)'가 이 모습을 보고 허유에게 물었습니다.

"왜 귀를 씻으시오?“

"요 임금이 나를 찾아와 나에게 천하를 맡아달라는구려. 이 말을 들은 내 귀가 혹여 더럽혀졌을까 하여 씻는 중이요. 차라리 똥이 묻었다면 참겠소"

이 말을 들은 소부는 큰 소리로 껄껄 웃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숨어 산다는 소문을 퍼뜨렸으니 그런 더러운 말을 듣는 게 아니요. 모름지기 은자는 애당초 자신이 은자라는 것조차밖에 알려서도 안되는 법인데 당신은 이를 은근히 퍼뜨려 명성을 얻은 게 아니요?“

그러고 나서 소부는 소를 몰고 강물을 거슬러 올라갔습니다.

이때 허유가 소부에게 물었습니다. 

"소에게 물은 안 먹이고 어디로 올라가시오?"

이에 소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대의 귀를 씻은 더러운 물을 소에게 먹일 수 없어 올라가는 거요"

이것이 고려시대 명심보감(明心寶鑑)을 통해 지금까지도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허유의 귀 씻은(세이<洗耳>) 이야기]입니다.

때가 때인지라 과거 허유의 처신을 돌아봅니다.

정치와 권력이 더럽다고만 한다면 과연 나랏일은 누가 맡을까?..... 하는 것을 생각하면 이 허유의 고사(故事)는 현실적으로 괴리(乖離)가 느껴지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정치 권력형 출세지향주의가 만연한 오늘날의 시대상과 비교해 볼 때 이는 자못 숭고하기까지 합니다.

청대(淸代) 화가 진숭광(陳崇光)의 '세이도(洗耳圖)' 1884년 작품
청대(淸代) 화가 진숭광(陳崇光)의 '세이도(洗耳圖)' 1884년 작품

지금으로부터 약 40여 년 전 필자가 봉직하던 모 신문사에는 당시 재미있는 유행어가 나돌았습니다. 바로 <미꾸 용>이라는 조어(造語)입니다. 이를 풀어서 말하면 ‘미꾸라지가 용(龍) 됐다’라는 뜻입니다.

그 당시는 군사정권 시대였고 대부분의 언론사들이 자발적은 아니었으나 비교적 정권과 유화(宥和)적 관계를 가지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중에서도 특정 2개 신문사('ㅅ'신문사, 'ㄱ'신문사)는 실질적 운영권이 정부에 있다 보니 원치 않는 권력의 시녀(侍女) 역할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ㅅ'신문사 는 '공창(公娼)‘이니, 'ㄱ'신문사는 '사창(私娼)’이니 하는 자조적인 말들이 생겨나기도 했습니다. 따져보면 필자도 사창가(私娼街)에서 먹고살던 사람 중에 하나가 아니었던가.....

이 ‘미꾸 용’이라는 유행어가 생겨난 연유(緣由)는 이러합니다.

권력자로서의 기본적인 '필요인연'이라 하면 '혈연', '지연', '학연'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관학교 출신의 당시 대통령으로서는 주변에 학연을 충족시킬 인물들을 찾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이때 약삭빠른 측근 참모 중 누군가가 발굴(?)해 낸 학연 인물 중 한 사람이 바로 'ㅅ'신문사 편집국장인 'ㅈ'모 씨였는데 그가 낙하산 인사에 의해 'ㄱ'신문사 사장으로 임명되자 생겨난 말입니다.

요즘 정치권의 모습을 보면 눈앞에 다가온 총선을 앞두고 정치인들 간에 신당 창당설이 분분하고, 각 정당(政黨)마다 불미스러운 공천(公薦) 파동이 예사롭지 않은가 하면, 아직 대선이 3년이나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벌써부터 은근히 출사표(出師表)를 던지는 정치인들이 눈에 띕니다.

과거 어느 대통령은 "앞으로 정치할 생각이 전혀없다. 그리고 정치는 제가 잘 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라고 공언(公言)하고도 지난 2012년 대선에 출마, 낙선하였고 그 후 "2012년에 이루지 못한 대선의 꿈이 2017년으로 미루어졌다"면서 당당히 차기 대선에 재도전할 것을 선언하고 나서는 모습에 "꿩 잡는게 매"라는 저급한 정치철학의 전형을 보는 것 같아 매우 씁쓸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http://youtu.be/h2LyUdUMIfI)

이뿐이랴, 수면 아래 온갖 미꾸라지들이 용이 되어 승천해보려고 꿈틀대는 모습에 온몸이 스믈거리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이는 속성(屬性)상 용인(容認)이 강요되는 정치권의 사정(事情)이라 차치(且置)하더라도 정치와 거리가 먼 사회 각계의 전문인력들마저 제 자리를 이탈하여 정치권에 진입하려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미꾸라지들의 처절한 모습을 보며 허탄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런가 하면 요즘 SNS가 확산되면서 일반 국민들도 정치에 대한 관심이 점점 더해가는 듯 페이스북, 트위터, 블로그, 카카오톡 마다 정치 글이 넘쳐납니다.

누군가가 화두(話頭)를 던져놓으면 이 사람 저 사람 댓글난에서 설전(舌戰)을 벌입니다. 직업 정치꾼들이 펼쳐놓은무대 위에 올라 서로 싸움질을 합니다. 그런데 유감스러운 것은 나라를 위하는 건설적이고 유익한 발언보다는 거의 욕설에 가까운 비판 일색이라는 점입니다. 목 언저리가 빨갛게 상기된 채 비난의 목청을 높입니다.

정치인도 인간인지라 공과(功過)가 있기 마련인데, 자신이 좋아하는 정치인에 대해서는 지지(支持)를 넘어 무흠(無欠)의 대상인 양 절대적 신앙심(信仰心)을 보이기까지 합니다. 실제로 본 적도 없으면서 어디서 귀동냥으로 듣고 와서는 혼자만이 알고 있는 듯 자신 있게 떠들어 대며 흥분하는 모습이 아주 가관(可觀)입니다.

정치인은 물론이고 온 국민이 마치 정치판이 아니라 싸움판에 뛰어든 듯합니다. 국회도 싸움판이고, 거리도 싸움판이고, 인터넷도 온통 치열한 싸움판입니다. 아마 싸우는 것이 정치인가 봅니다. 

이런 사람들마다 공통적인 변(辯)이 있습니다.  바로 애국심의 발로(發露)라는 겁니다. 내가 직접 그 판에 뛰어들어 열을 올려 봐야 변하는 것은 하나도 없건만.....  애국이란 각자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아닐런지요?

세계 어디에도 이런 나라는 없을 것입니다. 

변호사도, 판·검사도, 시민운동가도, 노동자도, 농부도, 군인도, 교수도, 문인도, 언론인도, 연예인도, 체육인도, 심지어 목사들까지..... 소리가 좀 높다 싶으면 결국 정치판으로 빠집니다. 마치 정치가 인생의 목표인 듯합니다. 아무튼 이렇게 정치 좋아하는 민족이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이렇듯 최근 정치권의 여러 불미스러운 소식을 접하며 그 옛날 허유는 천자가 되어달라는 말을 듣고 자신의 귀가 더러워졌다 하여 귀를 씻었지만(세이 '洗耳') 오늘 필자는 차라리 뇌를 씻고(세뇌 '洗腦') 싶은 충동이 강하게 느껴집니다.

고려 말 삼은(三隱) 중 한 사람인 '야은 길재(冶隱 吉再)‘의 유명한 '회고시가(懷古詩歌)’가 뇌리(腦裏)에 떠오릅니다.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데없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문득 필자가 평소 즐겨듣는 <청산에 살으리라>라는 우리 가곡과 함께 과거 어느 정치인의 에피소드가 오버랩(Overlap) 되는 듯 합니다.

지난 2015년이었던가요? 당시 어느 한 유력 정치인이 전라남도 강진(康津) 백련사 근처 흙집에서 칩거하고 있던 시절, 그의 겨울나기를 위한 장작 마련을 도우려고 결성된 지지자 모임인 '장작모임' 회원들이 마련한 송년회 자리에서 정계 복귀를 권유하자 그는 막걸리를 마시며 "살어리 살어리랏다. 청산(靑山)에 살어리랏다....."라고 시작되는 '청산별곡'을 부르며 답을 대신했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실상은 잘 모르나 전해지는 이야기만큼은 [‘허유’의 귀 씻은 이야기]와 한 치 정도 가까워 보입니다.

김연준 작시, 작곡 <청산에 살리라>, 테너 박세원의 노래로 들으시겠습니다. 

지금도 정치하느라 목 언저리가 빨갛게 상기되신 분들, 이 음악 들으시며 좀 식혀보시면 어떨런지요?

청산에 살리라 - 작곡 김연준, 노래 박세원

어떠셨습니까? 
 
이렇듯 순수한 영혼이 빚어내는 음향이, 정치판에서 깊히 병든 마음의 치료제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강인

 

 

예술비평가
사단법인 카프코리아 대표 
국민의힘 국가정책 자문위원(문화)

문화뉴스 / 강인 colin153@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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