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온통 낭만으로 들끓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그런 시대에는 오늘같이 안개비와 실비가 자주 내렸고 짙은 핏빛으로 피어난 꽃들이 끈질기게도 살았습니다.

시대를 구가(謳歌)하기 위해 모든 것들은 하나 같이 몸살들을 앓았습니다. 시인은 폐병을 앓았고 화가는 제 머리카락을 거울 앞에서 삭둑삭둑 자르곤 했습니다. 소녀들은 환자처럼 흰옷을 즐겨 입고 낯빛도 그 옷처럼 창백하길 원했습니다. 

그중 한 소녀가 앓기라도 하면 그녀는 매일 꿈을 꾸었고, 그 꿈을 통하여 큰 성에 사는 왕자님을 만나러 가곤 했습니다. 그리곤 왕자와 헤어지면서 그녀는 더욱 병이 악화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 시대에는 모든 것이 짧았고, 종말로 치달으며, 아름다움이라는 규격안에서 한 치도 벗어나면 안되었습니다. 세상은 아름다웠지만 기간은 짧았습니다.

세월은 흘러 다른 시대가 왔습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꽃은 피었고 실비가 내리고 시인들이 각혈을 했지만 그것은 아름다움과는 상관없는 일이었습니다. 그저 사람들은 가끔 그 짧은 시대를 그리워할 뿐입니다. 병든 소녀는 책 읽는 소리로 말하고 건강할 때보다 더 또렷한 목소리로 사랑을 고백합니다.

어느 누구도 그것이 잠시 시들은 꽃잎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녀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녀가 살았던 그 시대는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와 매우 가깝습니다. 아니, 어쩌면 지금 우리 시대가 바로 그때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아름다움이 더 이상 아름답지 못한 세상 고통조차도 고통으로 말할 수 없는 테크노피아(Technopia)의 말라빠진 무미건조한 그런 세상 말입니다.

작곡에 열중하는 슈베르트
작곡에 열중하는 슈베르트

오늘은 슈베르트(Franz Peter Schubert)의 현악 4중주곡 <죽음과 소녀>를 소개하려 합니다.

"건강이 회복될 가망이 없어 그의 절망이 날로 심각해져 가고 있는 한 남자를 상상이나 해보게. 밤마다 잠자리에 들면서 다시는 깨어나지 않기를 희망한다네. 그러나 아침이면 어김없이 깨어나 어젯밤의 그 고통을 일깨워 준다네"

이 문구는 1824년 슈베르트가 <죽음과 소녀>를 쓰고 난 직후에 친구 레오폴트 쿠펠바이저(Leopold Kupelwieser, 1796-1862, 슈베르트의 유명한 초상화를 그렸던 친구)에게 쓴 편지의 일부입니다.

'죽음과 소녀' (왼쪽부터) 한스 발둥 그린(Hans Baldung Grien, 1517년 작), 에드바르트 뭉크(Edvard Munch, 1893년 작), 에곤 쉴레(Egon Schiele, 1915년 작)’ [출처:채널 예스] (좌) 16세기 초엽 독일에서 활약한 화가 ‘한스 발둥 그린(Hans Baldung Grien, 1484~1545)’의 '죽음과 소녀'라는 그림. 거의 알몸의 소녀를 해골 모양의 나신(裸身)이 뒤에서 꽉 붙잡고 있다. 소녀는 완전히 공포에 질린 모습이다. (중) 이 '죽음과 소녀'라는 모티브가 19세기에 이르게 되면 완전히 반전된 형태로 나타난다. 노르웨이의 국민화가인 ‘에드바르트 뭉크(Edvard Munch, 1863~1944)’가 1893년에 그린 '죽음과 소녀'를 보면 이 그림의 소녀는 아주 다른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벌거벗은 소녀가 ‘죽음’을 꼭 끌어안은 채 살짝 열린 소녀의 입술이 사신(死神)에게 키스해 달라고 애원하는 듯하다. (右) 비슷한 풍의 그림은 20년 뒤쯤에 또 등장한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표현주의 화가 ‘에곤 쉴레(Egon Schiele, 1890~1918)’가 슈베르트의 '죽음과 소녀'를 듣고 영감을 얻어 그린 동명의 작품이다. 이번에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소녀는 필사적으로 죽음을 포옹하고 있다. 이렇듯 ‘죽음’과 ‘소녀’는 동떨어진 것처럼 보이는 두 개의 표상이다.
'죽음과 소녀' (왼쪽부터) 한스 발둥 그린(Hans Baldung Grien, 1517년 작), 에드바르트 뭉크(Edvard Munch, 1893년 작), 에곤 쉴레(Egon Schiele, 1915년 작)’ [출처:채널 예스] (좌) 16세기 초엽 독일에서 활약한 화가 ‘한스 발둥 그린(Hans Baldung Grien, 1484~1545)’의 '죽음과 소녀'라는 그림. 거의 알몸의 소녀를 해골 모양의 나신(裸身)이 뒤에서 꽉 붙잡고 있다. 소녀는 완전히 공포에 질린 모습이다. (중) 이 '죽음과 소녀'라는 모티브가 19세기에 이르게 되면 완전히 반전된 형태로 나타난다. 노르웨이의 국민화가인 ‘에드바르트 뭉크(Edvard Munch, 1863~1944)’가 1893년에 그린 '죽음과 소녀'를 보면 이 그림의 소녀는 아주 다른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벌거벗은 소녀가 ‘죽음’을 꼭 끌어안은 채 살짝 열린 소녀의 입술이 사신(死神)에게 키스해 달라고 애원하는 듯하다. (右) 비슷한 풍의 그림은 20년 뒤쯤에 또 등장한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표현주의 화가 ‘에곤 쉴레(Egon Schiele, 1890~1918)’가 슈베르트의 '죽음과 소녀'를 듣고 영감을 얻어 그린 동명의 작품이다. 이번에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소녀는 필사적으로 죽음을 포옹하고 있다. 이렇듯 ‘죽음’과 ‘소녀’는 동떨어진 것처럼 보이는 두 개의 표상이다.

그는 당시 <죽음과 소녀>라는 제목의 현악 4중주곡을 쓰고 있었습니다.

이 곡의 테마는 '마티아스 클라우디우스(Matthias Claudius)'의 시(詩) ‘죽음과 소녀’에 맞춰, 먼저 가곡으로 완성 시켰던 것을 다시 '현악 4중주' 2악장의 테마로 채택한 것입니다.

내용은 죽음이 임박한 소녀가 병상에 누워 문간에 지켜 선 채 자신을 기다리는 저승사자와 대화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 소녀 : 죽음의 그림자여 부디 다가오지 마세요. 저는 죽음과 키스하기엔 너무 어려요.

- 저승사자 : 내게 다정한 손길을 다오, 난 너의 친구란다. 해치지 않으마. 꿈꾸는 소녀여 내 품에서 잠들어라. 청순한 아가씨여.

우울하면서도 애수에 젖은 아름다운 선율에는 삶에 대한 비관적 슬픔이 절제되어 표현되고 있는데 저승사자로부터 죽음을 받아들이고 편안한 안식처로 가고 싶은 마음이 숨어있는 듯합니다.

성병으로 죽을 날 만을 기다려야 하는 슈베르트. 그에게는 죽음이라는 개념이 그다지 낯설지만은 않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모두 4악장으로 되어있는데 그중에서 제2악장 ‘안단테 콘 모토’를 들으시겠습니다. 들으실 제2악장은 바로 <죽음과 소녀>의 주제 선율이 실린 부분으로 ‘테마와 변주곡’으로 되어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이 제2악장을 통해 깊은 슬픔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슈베르트 현악 4중주 No.14, D단조  D.810  <죽음과 소녀> 
카를스루에 체임버 오케스트라의 2011년 1월 24일 예루살렘 연주 실황입니다.

Schubert, String Quartet  No.14  D minor  D.810 Mov.2 ‘Andante  Con Moto.’ Chamber Orchestra of the Music Conservatory Karlsruhe(2011,1,24, Jerusalem)

슈베르트의 현악 4중주 <죽음과 소녀> 제2악장을 들으셨습니다. 어쩌면 이다지도 슬프도록 아름다울 수 있을까요?

느린 2악장은 장송곡을 연상케 합니다. 가곡 <죽음과 소녀>의 선율을 변주하는 악장입니다. 특히 첫번째 변주에서, 첼로의 피치카토 위에 얹힌 바이올린 선율이 애잔하기 그지없습니다. 두번째 변주에서는 바이올린과 첼로가 서로 위치를 바꿉니다. 바이올린이 뒤로 빠지고 첼로가 앞으로 나서면서 또 한번 슬픈 선율을 노래하지요. 세번째 변주에서는 리듬이 고조되면서 드라마틱한 분위기를 만들어 냅니다. 그 다음 변주에서 다시 템포가 느려지면서 온화하고 낭만적인 선율이 흘러나오지요. 다섯번째 변주는 짧은 음형을 연주하면서 뭔가 불안하면서도 격렬한 느낌을 짙게 풍깁니다. 바로 이 2악장에서 가곡 ‘죽음과 소녀’의 선율을 사용하고 있어서, 이 현악4중주는 동명(同名)의 부제를 갖게 됐습니다.

나는 이 곡의 부제를 [낭만시대의 깊은 슬픔]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슈베르트는 자신의 꺼져가는 생명 앞에 나타난 구체적인 실체로 회복 불능의 병으로 죽어가는 어떤 소녀를 떠올렸던 것이고 그것은 바로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런 인식이 슈베르트를 무엇보다 깊은 슬픔의 늪에 빠지게 했고 결국 <죽음과 소녀>라는 명곡을 탄생 시켰을 것입니다.
 
전체적으로 극적이고 강렬한 터치의 음이 비극의 요소를 더해주고 있는데 방금 들으신 제2악장은 예나 지금이나 인본주의로 퇴폐한 낭만의 늪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가슴을 뒤흔드는 깊은 슬픔으로 가득 차 있는 듯합니다.

 

강인

 

 

예술비평가
사단법인 카프코리아 대표 
국민의힘 국가정책 자문위원(문화)

 

문화뉴스 / 강인 colin153@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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