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나를 위해서만 살아달라고
나를 잊어선 안된다고
차마 소리내어
부탁하질 못하겠어요

죽는 날까지
당신을 잊지 않겠다고
내가 먼저 약속하는 일이
더 행복해요

당신을 기억하는
생의 모든 순간이
모두가 다 꽃으로 필 거에요
물이 되어 흐를 거에요

당신을 사랑합니다

수녀 시인  이해인 <물망초(勿忘草)>

물망초(꽃말, 날 잊지 말아요)
물망초(꽃말, 날 잊지 말아요)

사람에게는 ‘망각(忘却)’이라는 정신적 현상이 있습니다. 망각이란 경험적인 사건이나 물상을 기억의 다른 편으로 밀어 넣어버리는 것입니다.

오래전 학창 시절,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들'이라는 주제로 토론을 벌였던 기억이 납니다. 그 토론의 하이라이트는 망각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당시 망각에 대해 잘 알지 못했습니다. 나이가 어렸던 탓도 있었고 더욱이 망각을 심각하게 깨닫기에는 너무 인생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단지노인을 대할 때 그의 인생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아 가여워 보였고, 언젠가 우리도 그런 날이 다가온다는 것을 생각하면 약간의 연민(憐憫)이 느껴질 뿐 별다른 깊은 감흥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조금씩 이해가 되는 것 같습니다. 망각 한다는 것이 얼마나 고독한 일이며 또한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를 말입니다.

프랑스의 여류화가이며 시인인 '마리 로랑생(Marie Laurencin)‘의 ".....죽은 여인보다 더 불쌍한 여인은 잊혀진 여인입니다“라는 시구(詩句)처럼 잊혀진다는 건 분명 가장 슬픈 일입니다.

지난날 한 번쯤 사랑을 했고 그 사랑의 성곽 안에서 영원을 꿈꾸었다가 마침내 희박해진 인연을 타고 잊혀져간 그 사람.

이렇듯 잊혀졌다는 사실은 얼마나 고독하고 두렵고 슬픈 일인지 모릅니다.

정신과 의사들은 ”만일 인간에게 망각하는 기능이 없다면 거의 모두 정신병자들로 변해버릴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은 의학상(醫學上)의 소견에 불과할 뿐, 실제로 망각한다는 것은 비길 데 없이 쓸쓸한 법입니다.

사람이 늘 미래만을 생각하고 살 수는 없듯이 지나간 과거를 회상하고 추억하는 일은 지금의 나를 아름답게 하는 촉매(觸媒)가 됩니다.

그러나 정말 기억하고 돌이켜보고 싶은 지난날의 일과 그 경치와 그 분위기와 그 사람을 아무리 생각하려 해도 생각나지 않을 때 엄습해오는 두려움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큰 것입니다.

’절 알아 보시겠는지요?‘

어느 날 거리에서 만난 사람에게 이런 질문을 받고 도수 높은 안경을 벗으며 옆으로 비껴 보고 있는,그 설면한 얼굴을 하고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고 있는 노인을 보고 있노라면 우리는 어느새 절망에 빠지고 마는 것입니다.

절 알아보겠느냐고 말한 초로(初老)의 여인은 그냥 멍하니 그 자리에 서서 촛점없는 눈으로 지켜보고 있고, 아직도 잘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제 갈길을 가고 있는 노인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망각이란 이제 우리들 삶의 고귀한 부분까지도 삼켜버리는 악마의 장난 같아 보입니다.

잊어야 할 것은 많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정녕 잊어서는 안됩니다. 적어도 한때 그렇게 사랑했던 사람의 그 선연(嬋娟)한 얼굴과 그 자태(姿態)만큼은 말입니다.

오늘은 이탈리아 칸초네 중에서 ’크루티스(Ernesto de Crutis)‘가 작곡한 <Non ti Scardar di me ’날 잊지 말아라‘>를 듣고자 합니다. 이 곡은 영화 ’물망초(1958년, 이탈리아와 독일이 합작으로 만든 음악영화)‘에 삽입되어 우리 귀에 더욱 익숙해진 곡이기도 합니다.

<날 잊지 말아라>
도메니코 푸르노(Domenico Furno) 작시 

헤일수 없는 추움의 땅에서
저 제비떼들 모두 떠나갔네
비오델 향기로운 꽃을 찾아
따스한 그의 보금자리로
나의 정들인 작은 제비도
한마디 말도 없이
내곁을 떠났네

날 잊지 말아라
내 맘에 맺힌 그대여
밤마다 꿈속에 
네 얼굴 사라지잖네
날 잊지 말아라
내 맘에 맺힌 그대여
나 항상 너를 고대하노라
날 잊지 말아라

테너, 루치아노 파바로티(Luciano Pavarotti)의 노래입니다.

Ernesto de Crutis(1875~1937)   Tenor, Luciano Pavarotti

"내 맘에 맺힌 그대여..... 날 잊지 말아라"

세기의 음악영웅 파바로티는 이제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는 우리의 가슴에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청중들의 그칠 줄 모르는 환호가 이를 약속하는 외침인 듯합니다.

 

강인

 

 

예술비평가
사단법인 카프코리아 대표 
국민의힘 국가정책 자문위원(문화)

 

문화뉴스 / 강인 colin153@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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