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람일: 2024.03.29
캐스팅: 박강현, 신영숙, 임지섭, 홍서영, 윤석원, 한유란 외
장소: 충무아트센터 대극장
좌석: 10열 중앙

오가는 사람들로 붐비는 지하철, 와글와글 북적이는 학교, 활기차고 소란스러운 길거리… 현대 사회의 사람들은 수많은 다른 사람 속에서 살아간다. 마음만 먹으면 누구에게나 다가갈 수 있고, 누구와도 대화할 수 있다. 인터넷과 SNS가 자연스러운 일상이 된 지금은 더더욱 그렇다. 이런 사회 안에서 사람들 틈에 섞이지 못한 채 세상의 경계 어딘가를 떠돌던 소년이 한 명 있었으니, 바로 이 이야기의 주인공 에반 핸슨이다.

어딘가 촌스러운 옷차림과 더듬대는 말투, 곧장 어느 구석으로 숨어들어 갈 것만 같은 소심한 성격. 소위 ‘아싸’라 불리는, 학교에 있는 듯 없는 듯한 존재인 에반의 오늘 하루는 자신에게 쓰는 편지로 시작한다. 디어 에반 핸슨, 오늘은 네가 가장 너다울 수 있는 멋진 하루일 거야. 용기 있는 다짐이 무색하게 오늘도 사람들 주변을 서성이기만 반복하던 에반은 학교에서 우연히 그와 닮은 한 소년을 만난다.

소년의 이름은 코너 머피, 학교의 소문난 문제아이자 에반이 좋아하는 조이의 오빠이기도 했다. 대뜸 다가와 에반의 깁스에 자기 이름을 대문짝만하게 써넣던 그 아이는 에반이 자신에게 쓴 편지까지 냅다 가져가 버린다. 그리고 ‘디어 에반 핸슨’으로 시작되는 그 편지는 이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코너의 주머니에서 발견되어 순식간의 코너의 유서로 탈바꿈된다.

코너의 부모님은 살아생전 친구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던 자식에게 이런 절친이 있었다는 것에 놀라고, 자신들이 몰랐던 코너의 모습을 에반에게 묻는다. 에반은 그렇게 코너의 베스트프렌드가 되어 거짓말을 시작한다. 거짓말은 또 다른 거짓말을 부르고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고 마는데… 에반의 거짓말은 어떤 끝을 맺게 될까?

​사진 = 강시언 / [리뷰] 뮤지컬 ‘디어 에반 핸슨’, 내가 나일 수 있는 오늘을 응원해
​사진 = 강시언 / [리뷰] 뮤지컬 ‘디어 에반 핸슨’, 내가 나일 수 있는 오늘을 응원해

 

똑똑, 세상을 향해 난 창문을 작게 두드리던 에반.  그 작은 소리를 듣고 자신을 알아봐 준 사람들을 위해 기꺼이 거짓 가면을 뒤집어쓴다. 가면을 쓰는 순간부터 그가 갈구하던 다른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이 물밀듯이 쏟아졌고, 궤도 밖을 돌던 그의 위치는 어느새 행성의 중심으로 바뀌었다. 이 달콤한 대가를 거부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해야 할 일이라고는 나 자신을 속이는 것뿐인데 말이다. 내가 가장 나다울 수 있는 하루를 살자, 어차피 이루지 못한 이 작은 다짐만 버리면 되는 일이다. 

거짓은 에반을 그가 꿈꾸던 모습으로 바꿔준다. 사람들 틈에 자연스럽게 설 수 있는 사람, 사람들이 알아보고 안부를 물어오는 사람. 마음속 깊은 곳에 있던 외로움은 그로 하여금 거짓이라는 독이 든 성배를 거부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에반에게도 누군가와 말하고, 웃고, 함께 걷는 하루가 찾아오지만 그게 과연 ‘진짜’ 그의 하루였는지는 모를 일이다.

뮤지컬 ‘디어 에반 핸슨‘은 초연결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단절된 관계와 부족한 소통, 쌓이는 고독과 상처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 어느 때보다 편하게 서로를 만나면서도 정작 진정한 서로의 모습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는, 아니 어쩌면 알려 하지 않는 모순된 소통 사회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작품의 시선은 소통의 창구는 늘어가는데 사람들은 오히려 점점 더 외로워지고 마음의 문을 닫는 현실을 조명한다. 

​사진 = 강시언 / [리뷰] 뮤지컬 ‘디어 에반 핸슨’, 내가 나일 수 있는 오늘을 응원해​
​사진 = 강시언 / [리뷰] 뮤지컬 ‘디어 에반 핸슨’, 내가 나일 수 있는 오늘을 응원해​

 

에반이 느끼는 결핍은 우리가 살면서 느끼는 것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무리에서 무시당하는 듯한 소외감, 부족한 자신의 모습을 보며 느끼는 좌절감, 주변 사람들의 무관심으로부터 오는 무력감… 그저 여리고 작은 소년이 감당하기엔 너무나 큰 무게이다. 이 힘든 짐을 짊어진 지친 아이에게 힘내라고, 잘 견딜 수 있다고 위로를 건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에반이 자신이 자신일 때의 고통에서 도망쳐 나와 끝도 없는 거짓으로 다른 자신을 만들어 내는 모습은 참 쓰리고, 애처롭다. 우리가 그를 이런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유는 어쩌면 우리와 같은 상처를 지닌 에반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누군가가 나의 존재를 알아보고 손을 내밀어주기를, 내가 가진 아픔을 눈치채주기를 간절히 바라며 시작한 에반의 거짓말에는 #youwillbefound 라는 해시태그가 붙는다. 너를 알아볼게, 너를 찾을게. 너는 혼자가 아니야, 너와 함께 할게. 그가 그토록 원했던 이 말을 들은 사람은 그 자신이 아닌 가짜 에반 핸슨이었다. 텅 빈 위로를 들으며 그는 처음으로 진짜 용기를 낸다. 진실된 내 모습으로 세상에 나설 용기를 말이다. 

화려한 거짓의 허상을 집어던지고 초라한 자신의 현실로 돌아온 에반은 홀가분한 모습으로 세상 앞에 선다. 여전히 아프고 무엇인가 부족하지만 괜찮다. 자신을 알아봐 주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줄 단 한 사람, 바로 자기 자신을 찾았기 때문이다. 나 스스로가 될 준비를 끝낸 에반은 더 넓은 세상을 향해 자라날 것이다. 단단한 뿌리를 내리고 수많은 가지를 뻗는 떡갈나무처럼 푸르른 모습으로.

뮤지컬 ‘디어 에반 핸슨’은 탄탄한 서사를 뒷받침하는 감동적인 넘버로 가득 차 있다. 주변 사람들에게 다가가고픈 에반의 간절함을 담은 ’Waving through a window’, 코너와의 거짓된 우정을 지어내는 ‘For forever’, 거짓된 모습 속에 숨겨진 진심이 드러나는 ’You will be found’를 비롯해 감성을 자극하는 아름다운 멜로디로 채워진 넘버들은 듣는 내내 귀가 호강한다는 느낌이 절로 들 정도로 환상적이다. 아마 누구든 공연장을 나서며 넘버 리스트를 검색하게 되리라고 확신할 정도다. 

스마트폰 화면이 무대 전반을 수놓고 있는 연출도 크게 인상적이다. ‘소통’이라는 주제를 단적으로 나타내는 직관적인 연출은 극의 흐름을 이해하는 데에 큰 몫을 할 뿐만 아니라 무대 디자인 자체만으로도 상당히 매력적이다. 대극장의 넓은 무대에서 지극히 현실적인 휴대폰 알림창과 댓글 창, 16:9 비율의 릴스 영상을 보고 있자니 어딘가 아이러니한 독특함이 느껴졌다. 이 재치 있는 무대가 작품을 더욱 특별하게 만들어주었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사진 = 강시언 / [리뷰] 뮤지컬 ‘디어 에반 핸슨’, 내가 나일 수 있는 오늘을 응원해
사진 = 강시언 / [리뷰] 뮤지컬 ‘디어 에반 핸슨’, 내가 나일 수 있는 오늘을 응원해

 

초연을 맡은 배우들의 연기 역시 두말할 필요 없을 정도로 뛰어나다. 상상해 오던 그대로의 엄청난 싱크로율로 몰입감을 선사함에 이어 높은 난이도의 넘버도 여유 있게 소화하는 모습까지, 그야말로 완벽한 공연이었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앞으로 이어질 공연을 통해 더욱 깊어질 감정의 합이 크게 기대된다. 다른 배우들의 무대까지 보고 싶어지게 만드는 좋은 무대였다.

내가 온전히 나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는 하루, 그 하루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것은 단 하나다.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나 자신. 진실된 내 모습 그대로 세상에 다가설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한 모두에게 이 작품을 강력히 추천한다. 공연장을 나설 때쯤에는 스스로의 내면을 마주할 준비가 된, 한결 성숙해진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뮤지컬 ‘디어 에반 핸슨’은 오는 6월 23일까지 충무아트센터 대극장에서 공연된다. 관람 시 송부된 QR코드를 반드시 지참할 것을 요하며, 포토존 및 캐스팅보드 촬영을 원한다면 공연장에 일찍 방문하여 여유롭게 이용하는 것을 추천하니 이용에 참고를 바란다.

문화뉴스 / 강시언 kssun08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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